[홍성석의 ‘선흘소담(善屹小談)']

▲ 화가 홍성석
나는 학창시절 나의 징크스라고 믿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급기야 고등학교마저 유독 내가 진학하는 학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학여행을 포기했던 것. 그 시절, 섬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있어 ‘수학여행’은 소위 ‘육지’에 대한 동경과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꿈에 그리던 이벤트였다.

그런 내게 학창시절 내내 수학여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어린 가슴에 ‘한’이 될 만도 했겠다. 내력이 그러해서인지 나는 아직도 여행을 무척 좋아하여 여름이면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어디론가 떠나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취미를 갖고 있다.

여행은 낯선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에서 비롯된다. 낯선 풍광과 자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언어가 다르고 풍속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각기 다른 세상을 체험한다는 것은 실로 매력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한번쯤 외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자기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하던 자신의 모습을 새삼 깨닫게 되고 다른 생각,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놀라기도 한다.

이렇듯 여행은 새로운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통해 보다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다.

여행은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여독이 적당히 누적될 즈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제주의 맑고 깨끗한 자연이 나를 반긴다. 익히 낯익은 길이며, 마주하는 사람들이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소박한 마을 표정, 밭 돌담 하나, 나무 한 그루, 바위와 흙의 색깔까지 새삼스러운 재회는 평소에 실감하지 못했던 제주만의 특별함을 느끼게 해 준다. “아! 이것이 제주였음이야” 비로소 ‘토박이 제주인’인 내가 ‘제주’를 새롭게 느끼는 순간이다.

▲ 선흘소담-성산포. 홍성석 작(2006)

역시 제주는 어느 곳과도 비교되지 않는 빼어난 자연풍광과 문화를 갖고 있는 보배로운 땅임에 틀림이 없다. 제주 토박이인 내가 봐도 그러한데 외방인들에게 있어서야 얼마나 특별한 것이겠는가. 그렇기에 제주가 오래전부터 국내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유명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해 오고 있을 터다.

개인적으로 그리 달가운 것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주의 장래를 담보하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관광산업’을 얘기한다. 감귤농사를 제외하면 특별한 여타 산업기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일견 타당한 논리로 보인다. 그래서 모 TV방송에서는 제주 지역뉴스의 첫머리를 ‘오늘의 관광객 수’로 시작하기도 한다.

‘제주국제자유도시’니 ‘제주 국제 평화의 섬’이니 하는 것들의 속성도 알고 보면 ‘관광전략’의 하나이다. 제주인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제주의 자원을 세계인들과 공유한다는 것은 두루 좋은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그것은 일갈하여 ‘관광’이 궁극적으로 제주도민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라야 비로소 의미 있는 화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관광제주’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 관광지는 어차피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실효성 있는 ‘관광정책의 목표’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목표는 제주인의 삶의 질을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최근 제주의 관광정책을 얘기할 때 많은 이들이 ‘체험형 관광’을 말한다. 옳은 말이다. 제주의 빼어난 자연과 독특한 문화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런데 ‘체험형 관광’에도 ‘질(質)’이 있다. 그 ‘질’은 다름 아닌 ‘문화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힘이 그 어느 때 보다 강조되고 있는 시대에 ‘문화적 가치’, 즉 ‘독자적인 문화의 매력’은 곧바로 경쟁력의 원천이고 모든 산업의 핵심 소스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나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경쟁력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겠는가.

제주는 독특한 문화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은 이미 경쟁력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관광제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선 ‘제주적’인 제 요소들을 발굴하고 포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제주적인 것’을 찾는 작업에 앞서 ‘제주다움’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문화적 매력’이란 ‘다움’의 미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낯선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나의 경우만이 아니라 제주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보편의 진리일진데 다른 곳에서 흔히 보았던 것들을 모아 놓은 ‘잡탕문화’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인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 문화의 시대에 문화적 매력이 없는 관광지가 도태될 수밖에 없음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체험형 관광’은 ‘문화체험관광’에 다름 아니며 나아가 지역 문화의 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로 역할하게 됨으로써 ‘관광’과 ‘문화발전’이라는 상호 동반의 관계항을 성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 '창'-홍성석 작(1998)

근래 들어 제주는 빠른 속도로 변해 가고 있다. 시간은 모든 만물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으니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바에야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겠다. 이 세상에 그 변화를 빗겨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변화에도 종류가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인 변화’와 우리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위적 변화’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변화야 인간의 능력 밖이니 논외로 하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변화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결과가 상반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와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어떻든 최근의 제주사회의 변화 중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제주를 이루는 많은 것들에서 ‘제주다움’이 우리들의 무지몽매함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훼손 일로에 놓여 있으며, 심지어 정책적으로 내몰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제주다움’은 우리의 정체성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전통적 소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진행형의 제주인의 삶과 문화 속에서 찾으려고 할 때, 지속 가능한 생산성을 담보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의 기저에는 예술창작이 있다. 예술활동은 한 사회 문화의 기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화생산 시스템이다. 따라서 예술 창작활동이 위축된 사회에서 건강한 문화생산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제주 사회는 예술 창작활동 기반이 턱 없이 부족하고 예술창작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저급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매우 낮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시승격50주년기념 상징조형물’ 사태는 그 단적인 예이다. 기초자치단체의 행정부가 자기 문화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면 가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일이 이쯤 되면 관광제주의 미래는 더 이상 빼어난 자연풍광에도 무의미한 공염불이다. ‘제주다움’은 화려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기교적이거나 화려하지 않드라도 순수하고 소박한 제주인의 정서가 묻어 날 수 있다면 그것이 ‘제주다움’이다. 좀 세련되지 못하면 어떤가. 세련미가 없는 것도 또한 매력일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스스로 우리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 보자.

제주는 목하 변신중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수고하고 있다. 이전에 없던 일대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때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주는 교훈이 더 없이 중요한 시기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원년에 내 딛는 한 걸음이 제주의 미래, 그 지향점이 결정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해법은 출발점에서부터 헤집어 보면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니다.

가장 상식적인 수준에서 출발할 때 그 만큼의 역사적 오류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특별자치도’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에 있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덕목은 제주문화에 대한 주체적 자긍심을 회복하고 문화적 마인드로 모든 현안에 접근하는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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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홍성석님은 조천읍 중산간 마을의 '善屹山房'에서 자연과 벗삼아 자신의 창작세계를 일구어 가고 있는 분입니다.
그동안 6번의 개인전과 150여회의 국내외 초대전 및 단체전에 참가한 바 있습니다.
홈페이지 '선흘 소담'(http://seokart.com/)을 통해 관객과 창작세계를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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