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부터 날이 갈수록 몽골의 잔존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그들과 더불어 살았던 흔적 자체도 부정해갔던 제주는 조선시대 들어 몽골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현상들이 빠르게 사라져 갑니다. 조선 초기까지 원을 선향으로 삼은 성씨 그리고 명이 유배 보냈던 원 왕족과 후예들의 성씨를 지닌 주민들이 상당수 거주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이들의 계보를 추적할 수 없게 됩
이 무렵 명나라는 고려에게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몽골이 강제로 점거했었던 것을 공민왕이 회복했는데, 이전에 원나라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입니다.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하며 요동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최영을 의지하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최영이 목호토벌을 위해 제주에 와있는 동안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우왕이 추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는 최영이 목호를 토벌하고 떠난 뒤에도 반(反)고려·명(明)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목호 잔존세력이 합세하거나 주도한 반기가 잇달아 일어났고, 제주사람들도 고려를 향해 선뜻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제주출정군은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됩니다. 출정군 말고도 예비부대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따로 주둔했다고 합니다. 정예군만으로도 당시 제주인구와 맞먹었을 만큼 대규모였고, 뒷날 국경지대까지 더해 동원했던 요동정벌군 3만8,830명과 견주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병력이었으니 당시
1368년(공민왕 17) 몽골은 수도를 명(明)나라의 군대에 빼앗기고 황제와 황후 및 태자 등이 상도(上都)로 달아납니다. 이에 고려는 몽골과 단교하고 명나라와 국교수립의 절차를 밟아 나갑니다.1369년(공민왕 18), 제주에서는 고려관리가 목호에게 살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사실상 망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임에도 목호가 고려에 맞설 수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역 거의를 지배하며 번창을 누리던 몽골족의 왕국 원나라는 권신(權臣)들의 계속된 정쟁으로 내부 국정이 해이해지고, 이 틈을 타 한족(漢族)이 여러 곳에서 반기를 드는 등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나면서 쇠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 시기에, 즉위하기 전의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 냄【� 10년 동안 지냈기 때문
불교가 언제 제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제법 널리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수정사,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원당사 등의 사찰이 고려 때 제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몽골과 관련이 있는 사찰은 법화사와 원당사입니다. 특히 법화사는 몽골이 매우 공을 들인 사찰이었습니다. 법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1295년(충렬왕 21) 제주의 행정단위가 제주목(濟州牧)으로 개편됩니다. 당시 고려의 목(牧)은 오늘날의 도(道)와 같은 위상을 지닌 최상급 지방행정단위였습니다. 더불어 제주는, 수령층 목사(牧使)[3품 이상]와 부사(副使)[4품 이상] 그리고 속관층(屬官層)에 해당하는 판관[6품 이상], 사록참군사(司祿參軍事)[7품 이상], 장서기(掌書記)[7품 이상,
제주와 몽골의 만남으로 제주는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변화도 겪습니다. 몽골이 직할령으로 삼은 초창기에는 1만223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된 탐라민의 수가 1374년(공민왕 23)에 이르러서는 3만 명 내외에 달했을 정도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대립과 갈등관계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몽골족이 제주에 들어와 정착하고 제주사람들
몽골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목축업의 발달은 제주 중산간 지대의 마을 형성을 가속화시키기도 했습니다.제주에는 선사시대부터 해안지대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려 전기에도 제주의 농업생산력은 농경만으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제주사람들은 농경지와 바다를 오가며 반농반어 형태의 생업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농경에 적합한 토양과 수원도
몽골과의 만남이 가져온 제주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목축이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제주는 말 사육이 번성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고려가 전국의 여러 섬에다 말을 키우고 번식케 해서 세금으로 거두어 국가 수요에 충당했는데, 그 수요의 상당량을 제주가 채웠었습니다. 그만큼 제주는 말을 기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지요. 전통적인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그것을 못 알
1273년(원종 14) 4월, 마지막 항몽세력인 제주삼별초가 평정됐습니다. 몽골은 두 달 뒤인 6월에 관부를 설치합니다. 제주를 직할령으로 만든 것이지요. 당시 몽골의 직할령이 된 지역은 제주 말고도 화주[함남 영흥], 서경[평남 평양]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배 방식이 달랐습니다. 화주와 서경은 그곳의 토착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했지만 탐라는 몽골
제주에는 김통정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져 왔습니다. 설화들 속에는 항파두리성에 관련된 내용, 삼별초와 제주백성들과의 갈등, 여·몽연합군과 삼별초의 전투 상황 등 역사적 사건들이 얽혀 있습니다. 설화들 속에 등장하는 당시 인물들은 흥미롭게도 이야기에 따라 상반된 인식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김통정은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패배자로 그려지기도
1273년(원종 14) 4월, 고려 개경정부의 김방경과 몽골의 홍다구 등이 병선 160척과 여·몽연합군 1만2천 명을 이끌고 제주바다로 들어섭니다. 이들은 중군, 좌군, 우군 등 3군으로 공격진용을 편성했고, 세 지점에서 공격을 진행했습니다. 지휘부가 있는 주력군이었던 중군은 항파두리성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함덕포로 들어왔습니다. 중군이 외
1270년(원종 11) 9월, 제주에는 고려 개경정부가 보낸 관군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진도를 항전 거점으로 삼고 남해의 섬들과 연안 지역을 장악한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주 방어군은 김수의 200명 관군과 현지민 그리고 삼별초의 위협이 높아지자 추가로 파병된 고여림의 군사 등 1천여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삼별초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고려는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고려정부의 부몽(附蒙)에 반기를 들고 항몽을 내세운 ‘삼별초’가 전면에 등장한 것입니다. 삼별초는 어떤 조직이었을까요? 1219년(고종 6) 무신집정자가 된 최우가 1230년(고종 17) 경에 야간 치안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합니다. ‘별초&rsq
무신정권 말기, 제주는 고려의 서울 후보지로 떠올랐던 곳입니다. 이 역시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정부의 제주 재천이 거론되던 당시 고려정부는 강화도에 있었습니다. 고려가 개경에 있던 정부를 강화도로 옮긴 것은 몽골의 첫 침략이 있고 난 다음해인 1232년(고종 19)이었습니다. 무신집정자 최우가 강화도 천도를 위압적으로 몰아붙였고, 몽골과의
고려 원종 8년인 1267년, 제주토착세력의 최고위층인 성주 등이 몽골조정에서 몽골황제를 만납니다. 몽골은 1271년 ‘원元’으로 개칭됐지만 이 책에서는 계속 ‘몽골’이라는 이름을 쓰겠습니다. 당시 몽골황제는 “탐라를 주목했다”는 세조[쿠빌라이:1260~1294]였습니다. 『원사元史』의 기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