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아강발국 아강발은 돼지족을 이르는 제주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발목 아랫부분이다. 곧 아강발국은 돼지족탕이다. 어떻게 해서 ‘아강발’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가. 재료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고운이름 아강발국. 여인들을 위한 음식이라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면 억지일까? 아강발국은 배려의 음식이다. 동네에서 돼지추렴을 하면 아강발은 젖먹이가 있는 집으로 간다. 먹는 게 부실한 산모를 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제주의 산모들은 출산을 하고 나...
(26) 전복죽 봄 바다는 세련되고 차분하다. 지천에 부산대는 생명들로 아침마다 꿈자리가 몽롱하고, 방올방올 헤삭헤삭 꽃봉오리 터져도 바다는 은근한 눈빛을 보낼 뿐이다. 절경을, 때론 절망을 앞에 두고도 호들갑스럽지 않는 제주 사람들에겐 어쩌면 봄 바다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바다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전복죽 한 그릇 놓고 마주하고 싶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제주 음식 중에 귀한 것으로 치면 전복죽을 빼놓지 못할 것이다. 해녀의 집이라 해도 전복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아니었다. 지금도 자연산...
(25) 돼지고기무국 입학식을 하고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햇살은 따스해도 유리창 안은 춥다. 서먹한 얼굴들과 겉 다르고 속 다른 날씨에 긴장하는 3월. 이런 날 뱃속 든든하라고 어머니는 고깃국을 끓여 주셨다. 무와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국에 밥 서너 술 말아 놓으면 없는 입맛도 잘 다독여 주었다. 제주음식의 절반은 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해공을 망라하여 끓여내는 국이 참으로 다양하다. 풍족하지 못한 재료로 여럿이 나누어 먹는 데는 ‘국’만 한 요리가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24) 봄동과 동지 다시 봄이다. 꽃을 먹는 봄이다. 하루걸러 성애가 내리고 하루걸러 광기어린 바람 불면서 멈칫멈칫 오는 봄. 이제 발자국소리 가까이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달함에 부쳐서 봄동은 부지런히 꽃대를 올려 세우고 있다. 봄동은 잎이 결구형태를 취하지 않고 노지에서 월동하는 배추를 말한다. 제주에서는 ‘퍼대기’라고도 한다. 우리는 배추를 뿌리째 캐서 먹지 않았다. 속잎을 키우면서 돌아가며 겉잎만 뜯어 먹었다. 몇 포기 안 되는 퍼대기배추로도 긴 겨울 초록밥상을 차려내는 비결이었다. 눈바람 맞...
(23) 옥돔죽 바람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차다. 생선 말리기 딱 좋은 날이다. 이제 국민생선이 된 마른옥돔은 주로 구워 먹는다. 제주 사람들은 다르다. 구이는 물론 국(갱)이나 죽으로도 즐긴다.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죽 중에서는 마른옥돔으로 끓인 죽이 최고다. 신선한 옥돔으로 죽을 끓인다면 수긍 하겠지만 마른옥돔이라면 고개를 갸웃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신선한 옥돔으로 죽을 끓여도 맛있지만 마른옥돔으로 끓인 죽은 더 맛있다. 생선이 마르면서 더해진 감칠맛 때문이다. 저장기술이 좋다보니 신선한 것에만 초점을...
(22) 빙떡 제주 향토음식을 말할 때면 빠지지 않는 음식이 ‘빙떡’이다. 얇게 부친 메밀전으로 채 썰어 데친 무를 비잉 말아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음식이 떡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다. 맛은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한두 번 먹어보고서는 알 수 없다. 여러 번 먹고 나서야 그 심심하고 담백한 맛의 깊이를 가늠 할 수 있다. 떡들이 얼마나 일취월장 했는가. 다양한 재료, 고물과 고명으로 먹기가 아까울 만큼 맛과 모양이 화려해 졌다. 그 떡들 사이에서 빙떡은 옛 맛과 모양이 그대로다. 크기가 좀 작아졌을 뿐이...
(21) 꿩메밀칼국수 산새가 텃밭을 들락거린다. 사람 사는 냄새가 싫지 않은 모양이다. 무차별적인 사냥이 금지되고 나서 새들이 날개부심이 날로 심하다. 까투리를 거느린 장끼가 텃밭 돌담에 올라 집안을 살핀다. 붉은 깃털과 길게 뺀 꼬리, 치켜든 고개가 늠름하고 멋지다. 뒤이어 산비둘기 다녀가고, 참새가 포롱포롱 순찰하고 갔다. 저녁 무렵엔 까치무리가 발자국을 뒤지며 시끌벅적 할 거다. 주워 먹을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맴도는 자유가 새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비도 눈도 내리지 않으면서 하늘...
(20) 과즐 이번 설에도 넉넉히 과즐을 산다. 만들려면 하루를 다 투자해도 어림없는데 믿고 살 수 있는 업체가 가까운 지역에 있으니 편하다. 차례 상에도 올리고, 차와 함께 내기에도 좋고, 가족 친지들에게 싸 줘도 모두 반기는 식품이다. 산남지역으로 시집을 가서야 제주에도 한과가 있다는 걸 알았다. 친정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과줄’을 맛 본 것이다. 삶이 척박한 제주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과가 제주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흥분했었다. 맛도 모양도 누가 만들었는지도 아닌, 단지 ‘제주형 한...
(19) 신년특집-무 옥돔국 해가 바뀌는 길목에선 날씨도 널을 뛴다. 맑다 흐리다 비 내리다 개고, 햇살도 비추고 바람 사이사이 눈발도 날리다가 또 한 해를 보낸다. 이슬도 내리고 서리도 내린다. 영상과 영하를 오르내리는 기온, 맑고 포근한 날이 있는가 하면 춥고 바람 센 날이 있다. 이파리, 열매 다 떠나보내고 마음마저 비운 들이 갖은 변덕을 다 받아 줄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럼 그렇지, 변덕은 받아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다. 그 누군가가 사뭇 그리워지는 때. 이런 변덕을 다 받아주는 음식이...
(18) 콩국 첫눈이 내렸다. 제주도에서 첫눈은 늦게 내릴수록 좋다. 대개는 감귤 수확 대목에 첫눈이 찾아온다. 익을 대로 익은 감귤이 동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농부들은 눈이 내리기 전에 수확을 끝내려고 애를 태운다. 부족할 대로 부족한 일손을 도와주는 건 오로지 날씨뿐이다. 올 겨울은 들어서는 모습이 따듯했다. 가을보다 더 쾌청한 하늘까지 선보이며 보름가까이 좋은 날씨로 일손을 거들었다. 그리고 내리는 첫눈이라 더욱 반갑다. 중산간 마을에 산다는 건 첫눈을 일찍 맞이할 수 있어서 좋다. 눈 내리는 ...
(17) 방어수제비 고모님은 가셨어도 방어수제비는 남아있다. 입맛도 사상도 순수하던 시절 처음먹은 방어수제비의 맛은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작은 고모님은 제주시 한경면 바닷가마을로 시집을 갔다. 고모부는 작은 고깃배를 부리는 어부셨다. 그 덕에 웃뜨르인 우리 집에도 찬바람을 빌어 넉넉히 생선을 말리는 날이 있었다. 우럭이며 조기며, 갈치, 고등어 등 여러 가지 생선이 빨랫줄에 빨래대신 널려 있을 땐 저녁이 기다려지곤 했다. 어느 해 가을, 친정나들이 한 고모님을 졸라 그 바닷가 마을로 놀러갔다. 바닷게가 ...
(16) 감귤잼 감귤 하면 제주, 제주하면 감귤이다. 쌀쌀한 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제주 섬 어느 곳을 달려도 황금색으로 익는 감귤이 팔 벌려 맞아준다. 끝없이 이어진 풍경이 아니라 오름과 마을과, 숲과 돌담과 다른 작물들과 바다와 사람들과 적당히 어우러진 풍경이 정겹고 아름답다. 오히려 감귤소득 그 이상이다. 아무에게나 눈 호강 제대로 시켜주는 이 풍경 값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제주 감귤역사가 일백년을 넘어간다. 맛있고, 영양가 좋고, 먹기 편한 식품으로는 감귤 이상이 없다. 가져 다니기 쉽고...
(15) 초기죽 가을비가 잦다. 수확을 앞둔 작물들에게는 귀찮은 손님이지만 즐거운 생명도 있다. 죽은 나무나 부엽토가 키우는 버섯들이다. 가을 숲에 가면 단풍도 곱지만 축축한 구석에 핀 가지가지 버섯들을 볼 수 있다. 약도 되지만 독이 되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기에 손 놓고 구경만 할 뿐이다. 다행이다. 죽은 나무들이 피운 꽃을 지켜 볼 수 있어서. 아무 때나 온습도만 맞으면 피는 버섯. 자연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신 인간에게는 경작의 지혜를 주셨다. 처음 보는, 이름도 독특...
(14) 접작빼국 비거스렁이, 가을비 다녀 갈 때마다 기온이 반 뼘씩 내려간다. 겨우내 소 먹일 꼴 해놓고, 가을걷이로 일손이 바빠지는 계절, 이렇게 비거스렁이 하는 날이면 제주 아버지들은 돼지 추렴을 하셨다. 여럿이 합세하여 살아 있는 돼지를 눈대중으로 흥정한 다음 사서 잡는다. 고기며 갈비며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서 팔고, 내장이며 뼈, 부스러기로 남은 고기들은 골고루 나누어 가지고 고기값을 분담했다. 잡아서 나누다 보면 수고비는 고사하고 비싼 고기값을 치를 때가 있는가 하면 추렴 재미와 함께 잡다한 ...
(13) 범벅 그 난리를 치른 하늘이 아무렇지도 않게 쾌청하다. 가을다운 가을이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끝없이 푸른 창공을 보는 것이. 봄에 고사리장마, 여름장마, 그리로 9월 중순의 장마처럼 지속된 비 날씨, 그리고 태풍 ‘차바’까지. 비는 비끼리 뭉쳐 축축한 날을 쌓고, 볕은 볕끼리 틈을 주지 않고 불을 붙이며 힘든 시간을 더 힘들게 했다. 봄볕 사이사이 더운 날 사이사이에 내리는 비는 얼마나 고맙던가. 서로 음양을 보충하며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충실하고 달콤한 열매를 맺게 한다. 이를 모르지 않을...
(12) 호박 초록이 점점 사그라든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살이 하루하루 가늘어 가는 상강 무렵. 울안의 호박을 거두어 들였다. 조선호박 모종 서너 개를 심었었다. 방향 잡으랴, 길 내랴, 꽃 피우랴. 노란 나팔 소리가 장마와 폭염 속을 헤매더니 호박 주렁주렁 열린 것이다. 태풍이 훑고 간 뒤에도 그런 일 어디 한 두 번이냐는 듯 덩그러니 남아 가을을 지킨다. 크건 작건 존재 자체가 푸근푸근하다. 조선호박은 병충해에 강하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타고난 무공해 식품이다. 열매가 맺히면 그 크는 속도 ...
(11) 꿀오미자차 곱게 늙는 감나무처럼 가을비가 내린다. 온전히 귀 기울여야만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를 지니고 막둥이 마농꽃을 씻고 있다. 이렇게 여러 날을 두고 내리는 비가, 연적 같다. 밖을 보면 세상 마음이 편안해 지다가도 이제 수확을 기다리는 일터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복잡하다. 이런 날은 따뜻한 오미자차가 제격이다. 눈 내리는 날 만큼은 못하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달고, 쓰고, 시고, 짜고 매운 맛을 한데 버무린 붉은 차를 삼키면 전신이 뜨거워 온다. 우리 삶이 이런...
(10) 갈치호박국 호박이 익어 가면 갈치가 맛있어진다고 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갈치와 호박의 조합은 이렇게 타고난 천생연분이다. 조선호박은 척박한 화산회토에서도 잘 자라는 채소다. 갈치도 제주에서는 흔한 생선이었다. 갈치 맛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 갈치가 가을로 들어서면 더 맛있어진다. 잘 익은 호박이 맛 제대로 든 갈치를 만나 가을은 초입부터 풍성했다. 호박국은 백번 눈으로 봐서도 모른다. 먹어봐야만 그 맛을 안다. 문화가 관광자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던 이천년 대 초쯤으로 기억한다. 지역...
(9) 고등어가 마농지를 만나면 인생사에도 고등어 같은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맛있고 영양가 좋고 비싸게 굴지도 않는 사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만만해서 좋은 사람. 성질 급해서 빨리 상하는 단점이 오히려 인간적인 사람. 늘 궁핍한 어머니 장바구니도 은근슬쩍 고기냄새를 풍겨주던 고등어. 그런 고등어 같은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제주 사람들에게 생선류는 친근하고 자주 볼 수 있는 식품이었다. 지금은 황금어족이 된 갈치, 한치도 쉬웠다. 고등어는 더 쉬웠다. 싱싱하면 국 끓이고, 조금...
(8) 곤밥 ‘곤밥’은 고운 밥이다. 보리밥이나 조밥과 달리 하얗고 고운 쌀밥이다. 쌀이 귀한 제주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은 제사나 명절 때 뿐이었다. 제사나 명절을 기다리는 것은 순전히 곤밥 먹을 생각에서였다. 눈 비비며 일어나 제삿밥을 먹고 친척집을 돌며 여러 번 ‘곤밥’이라는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날이 설이나 추석이었다. 곡식이 귀했던 제주에서 쌀로 만드는 송편은 추석음식이 아니었다. 교과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제주의 떡 또한 모양이나 재료, 이름들이 독특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