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라봉꽃 솎아내며 4월, 성급한 계절이 봄의 계단을 얼렁뚱땅 넘어와 덜컥 여름의 문을 열어 제치는 시점. 한낮의 하우스 안은 한여름의 바깥 온도와 다를 바 없다. 그 시점에 맞추어 꽃을 솎아내는 작업도 시작된다. ‘꽃을 딴다’는 어감에 담긴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 그 이미지만으로 시작은 늘 좋다. 초록색 이파리 사이사이 신부의 부케처럼 순결한 꽃망울이 아침 공기보다 더 신선하게 눈을 자극한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하우스 안을 가득 채우고, 거기서 하루쯤 일을 하다보면 내 몸에도 그 향기...
(4) 부르고 싶지 않은 이름이여 시를 쓰고부터 ‘잡초’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 존재 이유가 있고, 그렇기에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하며,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걸 증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어 주었다는, 그래서 그 이름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이 내게 걸어오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게 시인의 역할, 곧 나의 역할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잡초라는 이름 아래 무시된 존엄성을 찾기 위해 식물도...
(3) 더하기와 빼기 사이에서의 곡예비행 엊그제 뿌려준 유기농 비료 위에 하얀 성에 같은 것이 끼어 있다. 손으로 만지면 손가락 세포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얇은 솜털 같은 것들이다. 하얀 베개 솜털을 한 줌씩 뽑아내어 여기저기 뿌려 놓은 듯하다. 비료를 뿌리고 난 뒤 준 물 때문에 유기농 비료가 분해되고 있는 것이리라. 약간 상한 닭똥냄새가 하우스 안에 꽉 차있다. 비닐 봉투 속에서 갓 나왔을 때와는 또 다른 냄새다. 그 냄새에 익숙해지기까지엔 내 경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2) 덜어냄의 시간 산고를 막 이겨낸 나무에게 가위를 댄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기도 전에 들이댄 가위질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수확기를 놓쳐버린 열매 몇 개 가지에 매달려 있다. 추위에 동사해버린 것들은 아직 제 어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농부의 생각은 오롯이 잘라낼 가지만을 찾고 있다. 살집만 부풀리는 가지들과 열매의 무게 때문에 제멋대로 휘어진 습관들을 잘라낸다. 햇살의 길을 방해하는 것, 양분에 욕심을 부려 다른 것들의 몫까지 빼앗을 수 있는 ...
(1) 터전을 옮기다 두서없이 심어졌던 나무들을 정리한다. 한라봉 사이 천혜향, 천혜향 사이 황금향,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나무들이 서로 엉겨 살기가 팍팍했다. 나무가 생길 때마다 욕심 부려 여백을 채웠던 것이 화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 최소한의 여백까지 점령하려는 나무들과, 만만한 천혜향에게 위력을 가하는 한라봉을 솎아낸다. 마지막 힘을 놓아버린 나무가 삶의 가지들 사이에서 뽑혀 나오자 햇살이 공간을 채운다. 어두침침하던 나무 사이가 밝아졌다. 삶의 가시만 키워가던 천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