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명나라의 등장

1368년(공민왕 17) 몽골은 수도를 명(明)나라의 군대에 빼앗기고 황제와 황후 및 태자 등이 상도(上都)로 달아납니다. 이에 고려는 몽골과 단교하고 명나라와 국교수립의 절차를 밟아 나갑니다.

1369년(공민왕 18), 제주에서는 고려관리가 목호에게 살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사실상 망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임에도 목호가 고려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목호의 세력기반이 여전히 건재했다는 얘깁니다.

1370년(공민왕 19), 고려는 명나라와 국교를 수립합니다. 국교수립 직후에는 탐라 일 처리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밝힌 ‘탐라계품표(耽羅計稟表)’를 보냅니다. 이때 고려는 개국 이래 탐라와 연고를 맺어 관할해 왔음을 강조하면서, 몽골은 단지 탐라의 물과 목초를 활용해 말을 방목했을 뿐이라는 점을 애써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몽골이 방목한 말 등은 탐라민이 맡아 기르게 하면 명에도 바칠 것이며 목호는 고려의 양민으로 삼겠다는 뜻도 밝혔습니다.

고려가 서둘러 탐라 일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중국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가 몽골 대신 탐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미리 막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탐라말의 조공 약속은 몽골이 말을 방목한데다가 목호의 관할로 말이 많아진 탐라를 빌미로 명나라가 침략할 수 있음을 염려한 공민왕의 의도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372년(공민왕 21) 3월, 고려는 명나라에 바칠 말을 가지러 관리를 보냈지만 목호의 반발과 기세에 눌려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그해 4월에 목호가 반기를 일으켰는데, 6월에는 탐라민이 반기를 일으킨 목호를 죽입니다. 목호세력이 강성했을 때는 이들에 동조했던 탐라민도 몽골이 사실상 망하고, 목호세력에 대한 고려의 압박도 점점 커가는 추세를 보자 목호세력을 거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1월에야 고려는 탐라말을 거둘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목호가 명에 가져갈 말과 노새를 고려에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1년 사이에 고려가 명나라에 바친 탐라말은 겨우 4필이었나 봅니다. 공민왕 22년에 명나라가 고려에 고압적 태도를 취하며 거론한 몇 가지 이유 중에 그 점을 질책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명이 몽골의 잔여세력을 정벌하는데 필요한 말을 탐라말로 충당하기 위해서도 고려를 압박했던 것입니다.
1374년(공민왕 23)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고려에게 탐라에서 좋은 말 2천 필을 가려 뽑아 보내라고 합니다. 이에 고려가 말을 가져가려 하자, 목호들은 자신의 황제 쿠빌라이가 풀어놓아 기른 말을 명나라에게 바칠 수 없다며 300필만 내주게 됩니다.

고려에 왔던 명나라 사신이 2천 필을 채워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자,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제주정벌을 결정하고 같은 해 7월 출정군을 편성합니다.

<관련유적 둘러보기>

몽골지배 100년의 마침표  범섬전투 전적지

▲ 법환 배염줄이 포구와 범섬 ⓒ김일우·문소연

▲ ⓒ김일우·문소연

범섬은 법환마을 해안에서 1.3㎞나 떨어져 있지만, 법환포구에 서면 제법 가까워 보입니다. 법환포구에 ‘막숙’과 ‘배염줄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막숙은 최영장군의 대규모 정예군이 군 막사를 치고 주둔했다는 데서, 배염줄이는 이곳으로부터 범섬으로 건너갔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이곳은 100여 년 동안 이어진 몽골의 제주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한 실질적인 종착지였습니다.

목호정벌을 위해 제주에 들어온 최영장군의 출정군은 목호군과 한 달 가까이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가 범섬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최영의 군대는 범섬 앞 법환포구에 군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전함 40척을 이어 묶어 범섬으로 건너가 목호군 수뇌부를 궤멸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군막을 치고 숙영한 곳에는 ‘막숙’이라는 지명이, 배를 연이어 묶은 지점에는 ‘배염줄이’ 또는 ‘배연줄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게 된 것이지요.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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