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제주 목호세력의 최후

▲ 범섬 ⓒ김일우·문소연

제주출정군은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됩니다. 출정군 말고도 예비부대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따로 주둔했다고 합니다. 정예군만으로도 당시 제주인구와 맞먹었을 만큼 대규모였고, 뒷날 국경지대까지 더해 동원했던 요동정벌군 3만8,830명과 견주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병력이었으니 당시 고려가 제주의 목호세력을 얼마나 막강하게 여겼는지 짐작됩니다. 사실 1366년(공민왕 15)에 배 100척을 거느려 목호평정에 나섰던 고려군사가 격퇴 당했던 일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한편 제주 목호도 출정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동·서 아막(阿幕)의 탐라목장 중 서아막을 관할하던 목호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普) 등이 목호세력의 수뇌부였습니다. 이들은 기병 3,000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제주 서쪽 명월포에 포진했습니다. 목호군이 수천 명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마을을 이루어 살았을 몽골족, 이들과 혼인한 제주여성들 사이에 태어난 반(半)몽골족화의 제주민 그리고 고려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을 제주사람들도 가세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 새별오름 ⓒ김일우·문소연

1374년(공민왕 23) 8월 명월포 바다에 다다른 최영은 목호무리의 항복을 권유하는 회유활동을 벌인 뒤, 먼저 전함 11척의 군사를 해안에 상륙시켰습니다. 그러나 포진해있던 목호군이 이들을 모두 살해해버립니다. 겁을 먹은 고려출정군이 다음 공격 명령에 머뭇거리자 최영이 한 하급장교의 목을 베어 조리 돌리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제주출정군은 최정예 대규모 병력으로 구성되었고 예비부대도 따로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극도로 긴장했던 것입니다. 종전에 고려군의 공략을 격퇴시켰던 목호군의 전투력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제주사람들이 전부 목호와 결탁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모양입니다.

▲ 최영장군 사당 안치 영정 ⓒ김일우·문소연
여하튼 명월포 전투는 다시 벌어졌고, 이번에는 목호군이 밀리게 됩니다. 그 뒤 목호군이 서남부 쪽으로 계속 밀리면서 전투는 명월촌[한림읍 명월리] → 어름비[애월읍 어음리] → 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 → 금물오름[한림읍 금악리] → 새별오름[애월읍 봉성리] → 예래동[서귀포시 예래동] → 홍로[서귀포시 동·서홍동] → 법환포구[서귀포시 법환동] → 범섬 등지로 이어지며 한 달여간 밤낮으로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전투에 밀린 목호군 수뇌부는 마침내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도망칩니다. 최영이 배 40척을 몰고 직접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이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고, 석질리필사는 항복합니다. 그러나 최영은 석질리필사는 물론이고 그의 아들 3명의 목을 베어 죽이고,자살한 목호의 시신을 찾아내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습니다.

범섬 전투 이후 최영은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동아막의 목호 석다시만(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계속 저항했습니다. 최영은 장수들을 거느려 성을 쳐부수고, 도망가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전부 죽였습니다.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甲寅)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이는 최영의 출정군과 목호세력의 전투가 있은 지 40여년 뒤에 제주사람들로부터 직접 목격담을 들은 소감문의 일부입니다. 조선조 1417년(태종 17)부터 1420년(세종 2)까지 제주목 판관으로 부임했던 하담(河澹)이 기록한 것이지요.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처절했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그렇게 최영이 출정군을 거느려 명월포에 닿았던 1374년(공민왕 23) 8월 28일부터 평정을 마치고 제주를 떠난 9월 23일까지 25일 동안 벌어진 총력전으로 목호세력은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제주사람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로써 몽골의 제주지배 100년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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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의 고마운 수호신   최영장군 사당

▲ ⓒ김일우·문소연

최영장군 사당은 추자초등학교 뒤쪽 언덕 위에 있습니다. 최영과 추자의 인연은 몽골과 제주의 만남으로 비롯됩니다. 최영이 제주 본섬을 오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세찬 바람을 만나 추자도에 잠시 머물게 된 것이지요.

사실 옛날의 추자도는 배가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면 알맞은 바람을 기다리던 후풍처로  종종 이용됐던 곳입니다. 이름도 추자도보다 훨씬 앞서 후풍도라 일컬었었지요.

▲ 최영장군 사당 ⓒ김일우·문소연

최영이 제주본섬을 오가게 된 것은 목호세력 정벌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최영은 추자도에 두 번 머물게 됩니다. 처음에는 1374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두 번째는 목호세력 정벌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인 9월 23일부터 10월 10일까지였습니다. 순풍을 기다리며 추자도에 머무는 동안 최영은 추자주민들에게 그물을 만들어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그 고마움과 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뒤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12월 말일에 풍어와 풍농을 빌며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런가하면 추자도가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탈을 자주 받았던 것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왜구 토벌에 공이 많았던 최영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의 침탈을 면해보려는 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웠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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