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용진의 제주음식이야기] 무근성을 중심으로

  제주의 선인들은 제주성의 축조 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음식문화를 형성해 왔다. 섬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돌이 많은 화산토의 척박한 농업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영밭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독특한 식재료 공급체계를 구축한 점과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바다를 식량창고로 활용하여 계절별로 필요한 만큼의 신선한 어패류를 지속적으로 섭취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산남과 산북, 동촌과 서촌, 어촌과 산촌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징들도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산남 일부지역에서만 채취할 수 있었던 반치를 이용한 조리법이나 가시리와 같은 해초류의 활용 등이 산남과 산북의 차이를 보이며 노루나 꿩을 이용하는 빈도수와 초기버섯, 고사리와 같은 산채의 활용과 생선을 구이와 지짐으로 활용하는 조리방법의 차이는 산촌과 어촌의 차이로 볼 수 있으며 비교적 비옥한 서촌의 토질과 빌레가 많은 척박한 동촌의 토질의 차이로 인한 생산 작물의 차이와 그로인한 행사용 음식의 차이 등이 동서 음식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제주사람들의 상차림은 그 질량이나 구성 요소의 분포상으로 반상의 구분이 없었으며 도농의 구분이 없었음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성안사람들의 식생활이라해도 특별할 것이 없었으며 성안에도 2~30년대까지 대부분 농경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었으므로 여타 농어촌과 다르지 않았음을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 제주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차림의 재현. 겨울철 상차림과 여름철 상차림의 일반적인 예. ⓒ양용진
  그러한 제주의 음식문화가 외세의 영향을 받은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고려말 원나라의 직접 지배하에서 받아들인 소주와 메밀은 이후 제주 음식문화에 밀착되어 제주 특유의 음식들이 나타나게 되며 그 이후 조선조에서는 타 지역의 음식문화가 전파되기 보다는 오히려 제주의 특산물이 진상품이 되어 이동 경로인 강진, 고흥, 장흥 등에 제주의 흔적을 전파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한반도 전체에 밀어닥친 외세의 영향은 제주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제주음식문화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초반부터라고 추정되며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가장먼저 체험하게 되는 이들이 바로 제주성안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외세라 함은 일본인들과 이를 추종하는 친일 관료들로서 지배계층을 이루며 자신들의 친일화 된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현지 관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현지 관료들은 제주성안에 모여 살았고 특히 무근성 일대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한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형성된 무근성은 북신장로 서쪽인 서문다리동측 입구에서 북초등학교쪽으로 진입하는 길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기와집 군락이 자리하면서 토호세력중심의 마을로 지속되며 일본인들과 외지에서 유입된 신흥세력은 칠성로와 북신장로일대에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퍼트리는데 이러한 흔적으로 7~80년대까지도 칠성로일대에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었으며 공기업이나 도지사 등 중앙관료들의 관사들이 북초등학교 동남쪽으로 몰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의 제주성의 인구분포의 변화를 보면 그 중심인 관덕정과 성곽주변에 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심지인 관덕정 앞 북신작로와 칠성로는 급격한 변화를 주도하며 일본인들의 의한 일본 유사 문화를 형성한 반면 병문천과 가까운 무근성 일대에는 제주 토박이들이 거주하면서 나름대로는 제주 본류 문화를 지킴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변화의 바람에 조금씩 바뀌어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토박이들에 의해 주도된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근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겨진다.

1. 제주 음식문화의 개요

  구한말에서 191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성안사람들이 특별한 음식을 섭취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앞서 거론했듯이 성안사람들도 성밖사람들과 다름없는 제주사람들의 일반적인 음식문화를 유지 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8.15 해방이전의 음식문화는 지극히 일부분의 특징을 제외하면 성 안팎이 유사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개괄적인 사항을 살펴본다.
 
  안타깝게도 제주 전통 음식문화에 대한 기록들은 그다지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다. 간혹 유배인들의 기록에 나타나는 바는 특산물 정도이고 구체적으로 식생활에 대해 기술해 놓은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루어져온 음식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는 시대적 분류가 가능한 유물의 쓰임새를 추정하면서 관련지어 추리해 볼 수밖에 없으며 전파 경로와 시기가 비교적 정확한 일부 식재료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구체적인 추리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 테면 앞서 언급한 메밀 등은 기록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이후부터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음을 짐작케 하며 소주의 제조법과 함께 고리가 전파되어 고소리가 제조 되었음을 당연시 하는 것 등이 그렇다 할 것이고 고구마가 일본으로부터 유래가 되었고 일본의 재배환경과 가장 흡사한 제주에서 많이 재배되었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할 것이다.

  또한, 과거로부터 기록을 의무화했던 왕실의 기록 가운데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제주 특산에 관한 진상 기록 등이 남아있어 비록 서민들의 음식문화가 아닐지라도 이를 토대로 자연에서 얻어낸 음식재료들을 가늠케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토도 필수적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타 지방의 경우에도 음식에 대한 기록은 양반가문의 아낙네들에 의해서 기술되어 전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전국 어느 지방에서도 서민들의 음식문화를 기록해 놓은 바 없고 그로인해 제주에서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행위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서민들의 음식을 연구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기도 하다. 제주에서의 전통음식 복원은 제주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최근까지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상태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타 지방의 그것들과 달리 복원과 전승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음이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한 제주 전통음식의 복원과 전승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오면서 큰 줄기의 특징을 요약 정리해 놓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단순한 조리방법이다. 제주음식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조리방법의 간단함일 것이다. 그러나 조리 방법이 단순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철칙이 있는데 그것은 재료의 신선도를 최우선 한다는 것이다. 사면이 바다인 덕에 제주사람들의 식탁에서 동물성 단백질을 매일 공급해준 식재료가 어패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왜 단순조리법을 고집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신선도가 떨어지는 어패류를 단순한 조리법으로 가공하면 비린내가 심하고 다른 음식과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음은 자명하기 때문에 늘 대하는 식재료에 알맞은 조리법이 바로 단순조리방법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 찬물에 신선한 재료를 넣고 끓여 청장이나 소금간으로 마무리하는 제주의 국은 단순조리의극치이다. ⓒ양용진
  둘째는 “된장” 위주의 단순한 양념이다. 조리방법의 단순함을 말할 때 반드시 거론 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양념에 대한 의견인데 특히 된장에 대한 의존도는 전국 어느 지방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고 또한 전국에서 가열하지 않은 날된장을 먹는 지역이 제주밖에 없다는 사실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된장의 종주국임을 익히 알고 있으나 품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된장을 만들어내는 지역이 제주도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 제주의 된장은 날된장을 먹는다는 특징과 함께 숙성기간도 짧아서 여러모로 우수성이 돋보인다. ⓒ양용진

  셋째는 잡곡위주의 거친 식사와 국이 발달해 왔다는 것이다. 쌀이 귀한 탓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보리, 조, 메밀, 팥 등 잡곡이 주곡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인해 거친 밥의 목넘김을 수월하게 보조 해 주어야 할 ‘국’이 반드시 필요했던 탓에 다양한 국이 생겨났고 첫째 특징의 이유와 같이 신선한 재료를 이용하고 또한 된장을 이용한 국이 많이 만들어 졌고 특히 여름철 냉국은 여름 밥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 쌀이 귀한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잡곡을 주곡으로 조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다양한 잡곡밥을 만들어 먹음으로서 단조로움을 피했다. ⓒ양용진

  넷째는 사시사철 신선한 채소를 자급자족하며 섭취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나물이 다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울담 안에 우영밭을 만들어 경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채소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또한 늘 가까이에서 관리하며 채소는 신선하게 생채로 먹는 것이 가장 좋은 가식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양음식에서 샐러드는 부의 상징이었을 만큼 특권계층의 전유물로서 귀한 음식이었고 아시아권에서도 매 끼니마다 신선한 채소를 섭취한 예가 드물었는데 유독 제주사람들은 늘 채소를 직접 가꿔먹었다는 것은 식품의 역사에서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제주음식문화의 가치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에 한식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한가지인 나물류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 않다는 것은 다른 지방과 비교해서 상차림이 빈약한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있으나 나물이라는 음식이 채소를 좀 더 긴 시간 먹기 위한 방편으로 열을 가하여 양념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채소의 신선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비롯된 음식인 만큼 신선한 채소를 생식 할 수 있었던 제주에서는 익힌 채소인 나물류가 다양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 우영밭 또는 우녁밭이라 부르는 텃밭은 다른지방과 달리 집안의 가장 안쪽에 형성된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정지와 통시사이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용진

  다섯째는 저장음식이 다양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한국음식에서 저장 음식이라하면 김치, 젓갈, 장아찌 등을 말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발효음식이라는 점인데 김치의 경우 우리고장의 평균기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까닭에 빨리 시어지기 때문에 타지방처럼 한꺼번에 많은 량을 만들어 저장시키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으며 젓갈의 경우에도 사철 바다에서 신선한 어패류를 공급 받을 수 있어서 이 또한 저장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다만 자리젓과 멜젓의 경우처럼 어획량이 넘쳐날 만큼 한꺼번에 많이 잡힌 어류를 저장하는 방편으로 젓갈을 담아먹곤 했을 뿐이다. 장아찌의 경우도 앞서 거론한 나물류가 많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몇가지 되지 않는다.

▲ 마농지는 몇가지 되지않는 제주장아찌의 대표이며 자리젓도 지져먹는 맛이 별미다. ⓒ양용진

  그러나 전국에서 발효음식의 종류가 가장 적은 지역인 반면 음식을 발효시키는 조건이 가장 좋은 곳도 바로 제주이다. 연중 영상의 온도를 유지하고 평균습도가 높기 때문에 발효균의 활동이 활발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독특한 ‘죽’을 많이 만들어 먹었으며 국이 발달한 만큼 찌개나 전골류가 없으며 행사음식이 아닌 일상식에서 ‘탕’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이 없고 구한말 이전까지는 칼국수나 건진국수 등 ‘면’이 없었으며 무속신앙이 불교와 함께 성행하여 쌀이 귀한 와중에도 쌀떡, 메밀떡, 밀떡 등 떡이 발달한 음식문화를 형성했다. 

2. 일제강점기의 최초의 음식문화의 변화

  구한말에 이를 때 까지 제주의 생활문화에서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으나 서서히 시장경제가 형성되면서 그때까지 자급자족체계를 유지해왔던 식재료를 돈을 주고 구입하는 형태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근대형태의 상업활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는데 그 시발점이 관덕정 광장에서 서던 오일장이었고 이곳에서는 장돌뱅이로 불리는 보부상들이 육지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판매하며 관리들과 짜고 도민들을 수탈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한말 크고작은 민란의 원인이 되가도 했다. 그런 오일장이 식민지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산지포구 서쪽으로 이전하고 그 대신 목관아지 옆 구 우체국 동쪽에 상설시장이 열리게 되는데 이것이 형성된 시기가 1920년대 후반 또는 30년대 초반으로 증언이 모아지고 있다.    또한 북신작로 일대에 붙박이점포가 늘어나면서 상권이 형성되는데 관덕정 앞으로 현재의 중앙로와 칠성로일대는 일본인과 관련된 점포가 늘어섰으며 특히 칠성로 나사로병원 북측 골목에 일본 요정과 일식당이 들어서서 일본인들과 고급관료만 드나들었다고 전하고 있고 그밖에 장난감 가게, 기모노, 양복점 등의 고급 상권이 형성되었으나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은 기억하는 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존재하지 않았거나 조선인들을 손님으로 받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반대 지역인 무근성 입구인 서문로에는 조선사람들의 점포가 있었는데 포목상과 잡화상, 양복점과 담배가게, 국수가게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현재 김판규외과의원 자리에 있었던 국수집은 한국사람에 의해 건면을 만들어 파는 집이었는데 그 집 자녀의 이름을 따서 석산이네 국수집이라 불렸다는 증언도 확보할 수 있었다.

3. 건면(국수)의 등장

  결국 현재의 제주전통식품으로 불리는 고기국수의 주재료인 건면이 제주에 도입된 시기가 일제시대였다는 추론의 근거가 마련되는 셈인데 2~30년대에 제주사람이 기술을 습득하여 무근성 주변 붙박이 점포에서 만들어 판매하였다는 사실은 무근성 사람들이 국수를 즐겼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만큼 토박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음식으로 빨리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실제 녹취한 자료로는 1917년생인 강모씨가 북초등학교 입학하고 국수를 먹었다는 증언이 있어 이미 1920년대에 국수가 많이 전파되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수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음식이긴 했으나 사실상 밀도 귀한 곡식이라 궁중음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고급음식이었고 더구나 제주와 같은 변방에서는 구경조차 못하는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30년대만 하더라도 경조사에 귀한 음식을 대접한다는 의미로 국수를 대접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었던 것이었는데 이후 밀가루가 원조물자로 들여오면서 값싼 식재료로 전락하는 바람에 국수가 값싼 음식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 최근 제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각광받는 고기국수는 일본식 건면이 도입된 이후에 생겨난 음식으로 주로 행사용 음식으로 애용되었다. ⓒ양용진

4. 주방구조의 변화와 상차림의 현대화

  1928년 제주도와 오오사까 간에 여객선이 운항되면서 많은수의 제주사람들이 돈을 벌기위해 일본으로 향하게 되는데 1938년의 한 통계에 따르면 제주사람 사만육천명이 일본에 거주한다고 조사되었을 정도였다. 이들 중 많은수가 짧게는 2~3년이상 일본의 방직공장등에서 근무하면서 근대화된 일본을 경험하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생활의 경험을 살려 성안에서 살게 되고 또한 현지 관료생활을 지속해온 토박이들 또한 외지와의 왕래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이들에 의해서 전통적인 생활문화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특히 주거환경이 개선되는데 현재 무근성 표석이 세워진 속칭 무근성 ‘물통’ 반경 50m 내외의 경작지들을 정리하여 기와집을 세우기 시작한다. 주로 30년대 중반 이후에 세워진 기와집들은 당시 전쟁통에 지어진 집들이라 좋은 자재를 골라 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음에도 나름대로 외형적으로는 기와집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일본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었고 45년 해방 될 때까지 이어진 기와집 건축붐은 결국 무근성일대를 제주 최초의 기와집군락지 로 변화시키게 된다.  

옛 성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있는 이곳이 무근성의 중심으로 불려지는데 이곳의 서쪽 3~40m 지점에 속칭 물통이 있었고 그점 때문에 일대에 기와집촌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기와집 건축붐이 음식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다름 아닌 주방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상차림과 조리법의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이다. 제주의 전통적인 주방인 ‘정지’는 아궁이가 매우 원시적인 형태를 띄고있다. 일단 바닥이 그냥 흙바닥이고 벽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돌멩이 세 개를 삼각형으로 놓아 솥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고 그냥 그 자리에 불을 땐다. 이른바 각이 잡힌 부뚜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와집은 부뚜막을 통해 음식을 조리하거나 온돌방의 군불을 땔 수 있게 건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주의 정지와 기와집의 부뚜막의 차이는 솥의 크기, 즉 음식을 조리하는 량에서 차이가 나게 된다. 제주사람들의 전통적인 살림에서는 결혼한 자식들과 겸상을 하지 않고 각자 밥을 따로 해 먹기 때문에 큰솥을 쓰지 않아 돌멩이 세 개로도 즉석 아궁이를 만들어 내는데 기와집은 집안의 가족이 늘어나는 대가족 주거형태를 염두에 두고 지어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제주의 솥단지보다 2~3배는 큰 솥을 앉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정지에는 2단 또는 3단의 ‘살레’하나가 유일한 수납공간인 반면 기와집부엌에는 붙박이 장 형태의 수납공간과 별도의 일본식 찬장을 같이 비치해 두고 심지어 부엌에 딸린 별도의 ‘고팡’을 건축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주방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은 1회에 조리하는 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식재료의 구입량이 증가하고 조리한 음식을 보관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것을 뜻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제주사람들의 일상적인 두레반 상차림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다행인 것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일본식 상차림으로 변화하는 것이 오히려 더 당연시 될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일반적인 반가의 한식 상차림과 유사하게 변화가 된다.  즉, 두레반상의 중심을 차지했던 낭푼밥을 각자 개인에게 배식하는 방법으로 바뀌었고 점차 양념이 다양해지며 그에 따라 조리방법도 점점 다양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5. 그 밖의 해방이전의 음식문화의 변화

  현대의 제주 음식문화에서 자주 지적받고 있는 문제 가운데 화학조미료의 과다 사용에 대한 내용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요즘은 MSG라고 표기하는 화학조미료는 일반적으로 식당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70년대 이후에 일반화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화학조미료는 일본에서 아지노모도(未の元)라는 상품으로 1908년에 발명되어 급격히 사용범위가 넓어 졌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미 1920년대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출입하는 고급식당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접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거론한 제주-오사카 간의 여객선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돌아오는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는, 혹은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사람들이 보내주는 아지노모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미 해방 이전에 성안사람들 특히 무근성 사람들은 이 마법의 가루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소위 물 건너온 귀한 가루라서 양껏 많은량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하며 주로 국을 끓일 때 사

▲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부원장 ⓒ제주의소리
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해방과 4.3, 6.25 등을 겪으면서 잠시 잊고 살다가 60년대부터 다시 재일교포의 초청으로 일본 친지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들여오고 특히 국산 조미료가 나오면서 이를 병행하여 사용하던 시기도 있었다.

45년 해방 즈음에 10만명 정도의 제주사람이 일본에 거주했으며 그중 3만여명만이 귀국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주사람들은 인구비례상 일본에 가장 많은 친인척을 두고 있었고 그로인해 일본의 인스턴트 음식과 가전제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환경이 유지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화학조미료의 과다사용은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양용진 제주향토음식 보존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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