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주 칼럼] 시장의 본질은 더듬어 길 찾기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고속 철이면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앰트랙(Amtrak) 기차로는 아직도 2시간 46분이 걸린다. 미국은 철로뿐 아니라 자동차 전용도로, 교량, 댐, 도시가스관 등이 대체로 매우 낡았다.

경기가 나빠 소비와 투자가 얼어붙어 있을 때 부득이 정부가 나서서 이런 저런 일들을 벌여 경기회복의 '마중 물'을 부어야 한다는 것이 케인즈 식 경기부양 처방일 터이다. 이 경우 흔히 정부는 사회간접자본(SOC)투자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고용을 늘리고 노후한 여러 기반시설도 확충하게 된다.

그러나 떠들썩했던 소위 경기부양패키지(Stimulus Package)의 내용을 뜯어보면 조세감면과 의료비 지원이 56%를 차지했고 정작 SOC 투자는 전체 금액의 13%에 불과했다.

미국은 SOC의 80% 이상이 이미 사유화 되어 있다. 미 전역의 총 400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시가스관을 3천여 개의 민간업자들이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현실이 그 정도를 가늠케 한다.

1970년대의 노후시설인데 이 회사들은 그것을 보수하는 데 드는 돈을 아껴 종종 가스관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화의 진전으로 인해 정부의 재정정책이 발 디딜 틈은 극히 제한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미국은 '시장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라'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 같다. 시장이 알아서 회복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양상이다. 세금을 깎아 주고 시중에 돈을 넉넉히 풀면 언젠가는 가계와 기업들이 경제를 살려낼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지만 구제금융으로 큰 은행들도 살려냈고 1•2차에 걸친 양적 완화(QE) 조치로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한데도 시장은 소생되지 않고 있다. 금년 들어서는 상반기 중의 성장률이 연율 1% 미만이며 실업률은 여전히 9% 이상이다.

시장의 본질은 더듬어 길 찾기

일반균형이론의 원조, 레온 왈라스는 시장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암벽등반가가 손과 발을 더듬어 길을 찾는 모습'으로 비유했다. 이곳 저곳을 감촉으로 더듬어 보고 비교해 최적의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시장의 본질은 일과주의(一過主義)이며 그 시야는 근시안적이라는 점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경제활동 인구의 취업률 58%는 1983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이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의 앨런 크루거 교수는 "일자리 부족의 원인 70%는 경기변동 탓이고 나머지 30%는 노동시장의 변화, 즉 임시직 시장의 발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시장이 노동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는 한 이런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로 시장을 비난할 수는 없다. 시장은 이런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8월 2일은 14조300억 달러에 이른 미국의 국가채무한도를 재차 증액해야 하는 최종시한이었다. 국가 디폴트의 위험에 불구하고, 또는 그것을 무기(?)로 당파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애쓰는 미국 정치권의 모습은 매우 안쓰럽다. 거기에 티 파티운동이라는 초강경 보수도 가세하고 있어 일이 더 꼬였다.

마지막 순간 한도증액이 의회를 통과했지만 향후 10년 동안 어떤 분야의 지출을 얼마나 감축할 것인지는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어 추후에 결정하기로 미루었다. 이 과정에서 여야 간에 힘 겨루기가 계속될 것은 자명하다.

시장은 반응할 뿐이다. 정치적 리더십이 문제를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 불확실성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시장은 임시변통의 수단을 강구해 낼 뿐이다.

그러나 시일이 촉박해 내리는 답은 대개 정답이 아니다. 국제신용평가 기관들이 미국의 트리플 A 신용등급을 더블 A로 낮추겠다고 경고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시장은 단지 '반응'할 뿐이다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신용등급 하락이 세상의 끝은 아닌 것 같다. 일본 호주 캐나다 등의 선례에서 보면 신용등급 하락 직후 주식과 채권, 및 차입비용은 큰 변동을 보이지 않았고 환율만 다소의 출렁임을 보였다고 한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축통화 국인 점, 그리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라는 점이 우려되기는 한다.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는 어느덧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약간의 치욕이 여야를 막론하고 미국이 당면한 현실을 보다 차분하게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면 이는 미국의 장래를 위해 지금 필요한 정치적 결단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이 기사는 '내일신문'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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