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주 칼럼] 위기는 위기로 다루어야

미국과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이어지고 있는 주가 폭락의 주범은 미국의 8월 고용증가가 제로였다는 지난 금요일의 뉴스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연방주택금융공사가 모기지 증권의 판매와 관련된 소송을 세계 굴지의 17개 은행으로 확대한 것도 같은 날이었다. 거래를 무효로 하고 은행당 크게는 수백억달러에 달하는 원리금을 반환하라는 주문이다.

이들은 주택금융 호황기에 주택담보 대출을 대량으로 취급했었는데 이 대출자산으로 자산담보부 증권을 발행하면서 제출한 유가증권 신고서와 투자 설명서에 과장과 허위가 있었다는 혐의다. 가뜩이나 불안한 금융시장 분위기기 다시 냉각될 것은 당분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반면에 잭슨 홀에서 버냉키 연준의장이 별다른 대책을 내 놓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시장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만일 제3의 양적 완화 같은 대책이 발표되었더라면 이것은 미국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 될 뻔했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다.

유럽 재정위기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악재다. 그리스에 대한 추가 금융지원이 지체되고 있는 가운데 유럽 중앙은행의 시장 개입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의 국채 할인율은 계속 치솟고 있다.

그 와중에 유럽금융안정기금(EFSF)의 구제금융과 관련하여 핀란드가 그리스에게 따로 담보제공을 요구했고 그리스가 이에 응한 사실이 밝혀졌다. 핀란드가 참여하는 금액을 별도로 구분하여 트리플A 유가증권에 투자해서 상환을 100% 보장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가 기왕의 국채 발행시 약속했던 네거티브 플렛지(negative pledge)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 국채 전부에 대해 기술적 디폴트가 선언될 수도 있다.

위기는 위기로 다루어야

참고로 네거티브 플렛지란 나중의 채권자에게 채무자의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게 되면 먼저의 무담보 채권자들에게 돌아갈 상환재원이 감소하게 되므로 이런 불공평한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 문제도 유럽 재정위기를 더욱 혼돈스럽게 만들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위기를 위기로 다루려는 정치적 선택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4.0"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 칼럼니스트 아나톨 칼렛스키는 큰 시장, 작은 정부의 자본주의가 시장의 재무적 선택과 정부의 정치적 선택이 상호 조화를 추구하는 새 자본주의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한다. 시장은 자유롭게 작동하도록 방임하되 시장의 인센티브는 시장 그 자체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마련해 주는 복합경제 체제로 자본주의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경기하강을 막는 것과 이를 위한 정치적 선택이다. 그런데도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 정부가 시장의 선택을 닮아간다면 희망이 없다. 유럽 단일통화를 사용하며 불원간 재정통합까지 목표로 해야 할 유로존 내에서, 자국 내의 지지만을 염두에 둔 핀란드 정부의 선택은 칼렛스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선택은 아니었다.

IMF와 유럽중앙은행까지 나서서 빈사상태의 채무국에게 통화 재정 양면의 긴축을 독촉하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일까?

"과(過)발전과 저(低)발전과 미(未)발전이 한 나라 안에서뿐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형평이 결여된 성장, 참여가 부족한 자유, 분배가 무시된 효율을 수반하는 근대화는 자폐적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사회는 점점 더 불안해져서 급기야는 위험이 대형화되고 재난은 국제화된다는 것이 '성찰적 근대화'의 공저자 앤소니 기든스의 진단이다.

발전 단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한 입장이 서로 다른 국가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형평과 참여와 분배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시장의 재무적 선택으로는 풀어지지 않는다.

불황 속의 긴축 요구가 옳은가?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강자와 약자는 서로 얽힐 대로 얽혀 있다. 유럽의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들이 끝내 경기회복을 하지 못하면 최대 채권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전 유로존 전체에 이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정치적 선택이 필요한데 역시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선진국 중 막대한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긴축을 실시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오는 목요일 오바마 대통령의 미 의회 특별연설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이유도 미국의 진보진영이 그나마 형평, 참여, 분배의 정치적 책임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이 글은 '내일신문'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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