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칼럼] 청춘은 ‘위안’이 아니라 ‘대안’을 원한다!

신문 한 장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기자의 꿈을 키웠던 여학생이 있었다. 방학 때면 하루에 대여섯 권의 책을 몰아서 읽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참여기획단으로도 활동하며 ‘인권전문 기자’의 꿈을 키웠다. 서울 근교의 모 대학 언론홍보학부에 진학했다. 이제는 스무 살이 된 여학생이 얼마 전 페이스북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 “나이 스무 살에 많은 일들이 스쳐갔고 그 중에서 가장 큰 깨달음은 이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다.”

청춘의 고백의 들으면서 나는 그가 겪었을 아픔에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제자와 선생으로 만났던, 짧은 인연으로 그 아이의 슬픔의 무게가 남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의 청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었기에 이 땅에서 마이너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아픈 고백을 하게 만들었을까.

그의 ‘아픈 고백’을 들으면서 문득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청춘의 아픔을 위로하는 그 책의 내용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공감의 연장선상에서 서울대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 씨의 ‘청춘콘서트’가 있고 이른바 ‘안철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안철수 교수는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지금의 시대정신이 ‘위로’와 ‘공감’이라고 밝힌바 있다.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하지만 ‘위로’와 ‘위안’의 포옹이 과연 청춘의 아픔을 달랠 수 있을까. 대학생이 된지 일년 만에 마이너리티로서의 삶의 고통을 깨달았다는 청춘의 고백 앞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무한경쟁에 내몰린 사람들. 경쟁에 뒤처진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껴안는 포용의 위로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라고들 한다. 서울대 안철수 교수가 유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바로 소통을 통한 위로와 위안의 메시지가 대중들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의 저자 서울대 김난도 교수, 안철수 교수 등은 모두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들이다. 소위 ‘386’-이제는 ‘486’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들이 20대의 청춘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위안의 메시지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뜨겁다. 이들의 메시지는 이렇다. 방황과 고통은 청춘의 전유물이고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치열하고 아파하고 방황해라. 그리고 자기 내부의 변혁을 만들어내어라.

살인적인 등록금과 졸업 후에도 비정규직의 늪이 버티고 있는 20대들에게 보내는 위로는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우리사회에 퍼지고 있는 ‘위로의 수사’의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그리고 ‘위로의 수사학’이 혹시 은폐하고 있는 현실은 없는지 살펴보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20대에 대한 위로는 몇 가지의 버전을 거치면서 진화한 수사로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처음은 “짱돌을 들지 않는 20대에 대한 비난”이다.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질타는 몇 차례의 선거와 맞물려 사회적 논란으로 부상한다. 그러다가 나온 담론이 바로 ‘88만세대’. 우석훈과 박권일이 함께한 『88만원세대』는 20대의 사회적 고통을 전면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김영하의 소설“퀴즈쇼”가 있다. 소설의 한 구절은 20대의 불안과 불만을 이렇게 드러낸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비난과 연민에 이어서 20대에 대한 위로로 ‘수사’의 외피는 변화되어 왔다. 하지만 비난이든 연민이든, 그리고 지금의 위로이든 이 모든 담론의 공통점은 하나다. 그것은 20대를 대상화한다는 것이다. ‘청춘콘서트’에서 20대는 기성세대의 위로를 듣는, ‘관객’일 뿐이다. 그리고-대단히 거칠게 비유하자면- 기성세대는 그 공연의 장연에서 20대들에게 기껏 박카스나 주고 있는 것이다. “힘들지, 원래 스무 살 때는 다 그래.”하면서.

문제는 여기에 있다. 기성세대는 ‘위로’와 ‘위안’을 20대에게 던질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어 놓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먼저 했어야 한다. “그래. 힘들지”가 아니라 “미안하다. 더 좋은 세상을, 이 무한경쟁의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이 지독한 세상을 만들어놔서 미안하다.” 이렇게 솔직히 말했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고 기업의 CEO가 되어버린 그들이 ‘위안의 수사학’ 뒤에 숨어서 자신의 과오를 숨기려 한다면 그것은 음험하며 또 하나의 죄악이다. 그것은 직무유기다. 자기반성의 부재이다.

위로와 위안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지 못한, 대안을 만들기 보다는, 경쟁의 승자가 되어 사회적 기득권을 누리고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고 이러한 사회적 시스템을 개선하고 20대들이 자본의 악다구니 속에서 청춘을 낭비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기성세대의 몫이다. 위안과 위로의 포옹이 아니라, 20대 앞에서 반성과 성찰의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다.

▲ 김동현.

이러한 의문이 스물의 고백을 듣고 난 뒤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위로의 수사학이 난무하는 사이에 은폐되는 현실은 없는 것인가. 기성세대가 던지는 위로의 수사학에 감동할 수밖에 없는 스물의 청춘들에게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아픔을 알아주길 원하는 당신들에게, 그리고 스무 살의 나이에 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의 쓸쓸함을 알아버린 당신에게,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지난날의 청춘’이 오늘은 이렇게 말하려 한다. “미안하다. 청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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