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여신 세크메트. 태양신 라가 그의 뜻을 어긴 인류를 징벌할 때 도구로 쓴 여신으로 무시무시한 살육을 감행한다. ⓒ김정숙
인도의 칼리 여신(네팔 고고국 고문서관 소장 자료). ⓒ김정숙
그리스신화의 판도라.
갑옷을 입은 아테나와 무장한 전투복을 입은 발리 지역의 여신. 기본적인 여성성이 거세되어 남성 같은 모습이다.
위 왼쪽, 제우스와 헤라(안니발레 카라치 그림).  
위 오른쪽, 제우스와 이오(안토니오 알레그리 다 코레조 그림). 
아래, 제우스와 칼리스토(루벤스 그림)(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김정숙의 제주신화> ⑧ 낯설고도 친숙한 신화 속의 함의들  
 
낯설면서도 친숙한 신화들은 신화 속에 나타난 특유한 역사적 사회가 지녀온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게 한다.

세계의 신화들은 많은 여신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집트에서 최고의 숭배를 받는 신은 태양신 라(Ra 남신)이다.
라에게는 아들 겝과, 딸 누트라는 쌍둥이 자녀가 있고 이들을 둘러싸고 제주의 천지왕신화의 대별왕 소별왕 이야기와 비슷한 신화가 있다.

처음에 하늘과 땅은 겹쳐져 있어,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땅인지 혼란스러웠다. 태양신 라가 대기의 신 슈를 시켜 누트의 배를 떠받치게 함으로써 누트의 배는 하늘이 되고, 겝은 땅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보이듯 이집트 신화에서는 하늘을 여성, 땅을 남성으로 생각했다.
라의 딸 누트는 하늘의 신이고 아들인 겝은 땅의 신이다. 하늘의 영역으로 여신을 배정했으니 여신이 좀 더 우월했겠구나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 이집트의 여신 세크메트. 태양신 라가 그의 뜻을 어긴 인류를 징벌할 때 도구로 쓴 여신으로 무시무시한 살육을 감행한다. ⓒ김정숙
이집트는 사막과 홍해, 지중해로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을 거의 받지 않았다. 게다가 나일 강의 주기적인 범람이 만들어내는 풍요 속에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며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절대 과제는 현실의 풍요로운 삶이 죽음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죽어서도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음 후에도 풍요로운 삶, 집과 가족, 찬란한 도시를 세웠고 이 도시들을 지배하는 영광이 계속될 것을 염원했다.
그렇게 미이라, 파라오, 피라미드들이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산의 풍요와 도시의 찬란한 영광을 현현하는 구체적인 땅이었다. 이런 관련으로, 가장 중요한 땅을 관리하는 영역을 남신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개방된 지형 탓에 늘 외부의 침입에 시달렸던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매일 전쟁에 나가고 도시를 수호하고 수로를 정비하는 일로 피곤에 찌든다. 이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최고의 소원은 편히 쉬는 것, 조용해지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역시 메소포타미아답게, 기본적인 여성성을 거세해버리고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전쟁에의 참여를 종용한다.

인도는 좀 다르다. 7,8세기에 들어와 인도에서는 여성들의 힘이 강조되는 현실의 시기를 거치면서 여신들도 남신을 능가하는 힘과 모습을 가지기 시작한다. 여신은 남신 존재의 본질인 생명에너지, 링가(남근)의 원천으로 생각된다.  

가장 잘 알려진 여신 두르가는 많은 팔을 사용하여 곤봉, 칼, 활과 화살 등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물소 괴물을 물리치는, ‘가깝게 하기에 너무 두려운 여신’이다. 그녀의 이런 강한 이미지가 반영되어, 사악함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우주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가지게도 했다. 

인도의 대표적 여신인 칼리는 두르가가 물소 괴물을 물리치면서 극도로 분노한 상태에서 그녀의 이마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해진다.
칼리는 더 강력하고 더 무시무시하다. 칼리의 목에는 잘라낸 사람의 머리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고, 치마의 허리는 손을 잘라 이어 만들었다. 두개골로 된 잔으로 잘라낸 머리에서 피를 받아 마시면서 피가 묻은 입술 사이로 길고 빨간 혀를 내밀고 있다.

▲ 인도의 칼리 여신(네팔 고고국 고문서관 소장 자료). ⓒ김정숙
이런 모습으로 남편인, 인도 최고의 신 시바를 자신의 발아래 깔고 춤추고 있는 것은, 여신 칼리의 세력이 남편의 힘을 초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의 여신들은 강력하고 중심적이다. 인도의 곳곳에서 여신들이 숭배되고 있다. 여성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인 ‘피’는 오히려 성스럽고 모든 에너지가 집중된 것으로 표현된다. 오늘날에도 인도 여성들은 이마 가운데 빨간 점을 찍어둠으로써 에너지의 집합체로서의 중심인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여신은 재앙의 원인이 된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권위에 대항하자 제우스는 아름다운 여성을 창조하여 세상에 불행을 주기로 한다. 이 여성이 판도라이다. 판도라는 신들에게서 받은 선물상자를 열어버린다. 모든 것이 밖으로 날아가 버렸고 희망만이 상자 안에 남겨졌다.

이제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묘연한 희망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에 그녀를 탓할 수밖에 없다.

▲ 그리스신화의 판도라.
그리스 신화에서 여신들은 완전성을 가지지 못한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지혜와 용기는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듯, 지혜와 용기의 여신 아테나의 모습은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의 모습이다. 사이렌, 메두사, 스핑크스 등 많은 여신들이 괴물로 표현되고 악과 위험한 유혹으로 빠지게 하거나 피해를 주는 것과 연계된다.

▲ 위 왼쪽, 제우스와 헤라(안니발레 카라치 그림). 위 오른쪽, 제우스와 이오(안토니오 알레그리 다 코레조 그림). 아래, 제우스와 칼리스토(루벤스 그림)(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표면적인 것뿐 아니라, 제우스와 그의 여자들의 세세한 이야기 속에서도 이런 그리스의 여성관은 일관되게 흐른다. 제우스의 여성들은 제우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간택된다. 그의 아내 헤라는 최고의 여신이다. 헤라의 자리와 권력은 남편 제우스에 의한 것이고 그녀는 그걸 절대 잃을 생각이 없다.

제우스는 사랑과 결혼이라는 약속을 깨트리고 뭇 여자들과 놀아난다. 질투의 여신 헤라는 자신의 남편에게가 아니라, 남편과 바람이 난 상대여성에게 화를 내고 분풀이를 한다.

결혼의 신인 헤라는 머리에 관이나 장식을 하고 긴 옷을 걸치고 있다. 여유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방은 품격이 있고 빛은 밝고 안정적이다. 제우스는 응석을 부리듯, 자기를 믿어주라는 듯 헤라를 바라보고 있다. 바람난 남편과 그 아내의 모습이 저럴 수 있다는 건 뭔가.

이오와의 관계는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곳에서 이루어진다. 제우스는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데, 그의 색욕처럼 엄청난 크기와 어두운 색깔을 가진 어떤 괴물 같다. 이오와의 관계 후에 제우스는, 헤라에게 들키지 않으려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킨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을 피운 것을 알지만 모른 척하고 제우스에게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에게 이오를 꼼짝 못하도록 감시하게 한다.
 
칼리스토와의 관계도 어두운 곳에서다.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칼리스토에게 홀딱 반한 제우스는 아르테미스로 변장하여 칼리스토에게 접근하고,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질투의 여신 헤라는 칼리스토를 곰으로 만들어 버린다. 헤라의 음모로 결국 칼리스토는 아르테미스의 사냥에서 죽는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여성을 곰으로 만들거나 태워 죽이기도 하면서 화를 풀고, 오로지 아내라는 자리와 권력,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하는데 집중한다.
이오와 칼리스토는 힘센 남성 제우스에게, 이어서는 힘센 여성 헤라에게 이중으로 차별 당한다.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와 헤라는 욕정과 질투로 점철된 하나의 본성만으로 세상을 떠도는 유령 같다. 그들의 이야기엔 ‘관계’가 없다. 용서 이해 사랑 혼란 파괴 등, 둘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관계’가 없다. 이오와 칼리스토의 등장으로 달라지는 ‘새로운 관계’도 없다.

제우스와 헤라는 아무 일도 없는 척 계속 딴청을 부린다. 제우스는 별별 짓을 다하며 계속 바람을 피우고, 헤라 역시 상대여성에게만 별별 짓을 다하며 복수한다.
관계는 계속 달라지고 다차원이 되었는데, 제우스는 한결같이 전지적 제우스 시점, 헤라도 한결같이 전지적 헤라 시점으로 행동한다. 제우스는 욕정에, 헤라는 자기 자리에 일관되게 꽂혀있다.

가부장제는 몸과 자아를 빼앗아 가는 체제라고 했다. 헤라는 제우스에 의해 그녀의 몸과 자아를 계속 빼앗긴다. 이오와 칼리스토는 제우스와 헤라에게 이중으로 그녀들의 몸과 자아를 계속 빼앗긴다.

세계의 많은 신화들은, 신화가 언제 어디서나 아주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오래도록 존재해 온 것이듯, 여성에 대한 차별도 언제 어디서나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존재해 왔고 또 오래도록 그렇게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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