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김동성 그림/출처 http://blog.naver.com/cibaba12)

<김정숙의 제주신화> ⑨ 우리나라 신화 속의 여성

많은 신화들은, 신화라는 것이 어느 사회에나 보편적이고 오래된 것인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성의 분리와 차별도 아주 보편적이고 오래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여성차별은 신체 안에, 지각과 사고에, 행동에, 그리고 모든 사회집단 안에  아주 자연스러운 질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무가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바리데기 신화 역시, 신화라는 이면 아래에서 ‘영원한 여성성’(혹은 남성성)의 신화를 계속적으로 재구축하거나, 남성지배를, 신화와 궤를 같이하는 불변적이고 영원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그 구조를 항구화시키는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바리데기(김동성 그림/출처 http://blog.naver.com/cibaba12)
바리데기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아무 잘못 없이 버려졌는데도 그녀는 아버지가 위독하자 온갖 고생을 다 견디며 생명수를 구해다 아버지에게 바친다. 또 세 아들을, 3년, 또 3년, 또 3년에 걸쳐 낳고서야 아버지를 뵈러 가겠다는 말을 남편에게 할 수 있었다.
 
이 신화는 우리 사회의 제1의 전통윤리라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효를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보여준다. 가문을 이을 아들 셋을 낳아야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겨우 말할 수 있는 남성지배의 ‘역사적인’ 자연스러움도 볼 수 있다. 또 ‘눈 막고 귀 막고 입 막아 삼년’이라는 여성의 결혼생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면서, ‘삼종지도’라는 좋은 순종의 전형적인 예, 지배적인 담론을 유지시키고 있다.
 
신화는 아니지만 심청이의 이야기도 이런 효를,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윤리라고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는 기능을 한다.

심청 역시 바리데기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표준형으로, 우리의 내부에 강력하게 자리잡아온 가치가 되어 왔다.
사실 효나, 어른에 대한 공경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자세이고 남성이나 여성, 과거나 현재에 상관없이 가치롭게 인정되는 태도이다.

그러나 바리데기나 심청의 무조건적인 순종과 효는 개인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 가족관계의 조화로움을 이루어 내는데 제한적이다. ‘나’라는 존재를 의식의 기저에 두지 않는, 무조건적인 순종이나 효는 나에게는 물론 결국에는 상대에게까지 족쇄와 억압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헤라는 질투라도 하지만, 우리 아내들은 더 딱하다. 감히 남편의 행동에 화를 낼 수도 없었고, 남편의 바람기나 폭력에도 말없이 참아야 했다. 질투도 안 된다. 자신에게 행해지는 부당한 것에 대해서 반항하는 행동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상황이었든 시부모는 무조건 잘 섬겨야 하며 그러지 못한 경우는, 아들을 못 낳는 것, 부정한 행위, 질투, 말이 많은 것 등과 함께 여성들에게 내려진 칠출, 칠거지악이었다.

심지어는 남편의 부정행위나 폭력 앞에서도 ‘나 때문인가?’, ‘내게 잘못이 있나?’ 돌아보았다. 미운 마음 다 버리고 조용히, 예쁘게 살아내고 있는데도 어느 날 달랑 보따리 하나와 함께 문 밖에 내던져지기도 했다.

바리데기, 심청, 춘향, 많은 열녀들은 바로 그렇게 생겨난 가부장적 남성지배의 표찰이고 표창일 것이다. 설령 지고지순한 희생이고 선한 의지였다 하더라도 세상의 권력에 대한 지각능력이 없이 행하는 그들의 선함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실한 사회를 만드는데 해악이 되기도 한다./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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