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잘나가던 그녀, 짝퉁 아줌마로 전락한 사연

쯔루하시에서 가방가게를 하고 있는 경진이.
낮에는 공포에 떨면서 장사를 해야만 오늘 밥을 먹을 수 있고, 밤에는 그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술로 한시름을 놓는 매일의 연속이다.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할 만 한 일이 없다. 지금까지 배운 거라곤 술장사이지만, 이젠 여자가 나이가 들었다고 술장사 세계에서도 먹히지 않는다. 술장사 잘 될때 돈이라도 저축해 놓았다면 좋았으나, 그때는 매일 매일이 돈 쓰는 일에 재미를 붙여 방탕한 짓 많이 하면서 탕진했다. 내일이 걱정인 오늘을 살고 있는 경진이, 과연 그녀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1960년생으로 한국 제주도 출신이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부잣집, 형제간 많은 집 딸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왔다. 여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공부는 싫어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여자대학의 내로라 하는 여대생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 입학시험을 봐보지만 여지없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재수를 한다고 서울에 가서 대입 종합반 학원에 다녀 또 입시를 보지만 또 떨어지고 말았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본래 공부 타입이 아니었다. 공부보다 남학생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를 더 좋아했다. 그야말로 '끼'가 있는 여학생이었다. 그래도 꿈은 서울에 있는 여자대학의 여대생은 되고 싶었지만, 실력은커녕 공부에 대한 자세가 되지 못했다. 책상에 조용히 차분히 앉아 문제를 풀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런 타입이 못되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면 책속에서 남자 얼굴이 떠올라, 공부이건 시험이건 다 던져버리고 그 남자를 만나러 튀어나가고 마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부잣집 딸이었기에 그나마 여대생 꿈도 꾸어보며 서울에 가서 재수라는 것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이 어떤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딸을 서울에 보내놓고 보니, 마치 다이나마이트를 몸에 지니고 있는 그런 기분으로 매일을 걱정해야 되는 것이다. 언제 남자가 생겼다고 나올지도, 또 배가 불렀다고 선언하고 나올지도 모를 그런 딸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 놓아두는 싶지 않았다. 시집갈 때까지 부모 곁에 두었다가 그저 무사히 결혼이나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학에 떨어졌다는 전갈에, 당장 제주도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미니스커트의 뽄나는 여대생은 물 건너갔고 제주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 내려가 취직을 하려고 해도, 실력이 있어야 어디든 시험을 볼 수 있다. 시험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란, 아버지 친구가 하시는 건축회사 사무실을 지키는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연애에는 실력이 있어서 곧 남자가 생겼다. 배도 불렀다. 집안에서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남편은 제주시 칠성통 출신에 부잣집 아들이다. 남편 역시 공부 잘 못했고, 공부를 못했다면 기술이라도 있어야 처자식 먹이고 살릴 수 있지만, 손에 기술도 없다. 아버지 졸라 집안 돈으로 사업이라고 하지만 고생을 모르고 산 남자였다. 남편 역시 '끼'가 있는 남자였다. 사흘이 멀다 외박을 한다. 남자의 바람에 견디다 못한 경진이는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친정에 들어왔더니 이젠 남편이 아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말았다.

친정에서 공밥을 먹지만, 올케가 있는 집안이 되고 말았고, 시집 간 여자가 딸까지 데리고 들어 왔으니, 바라보는 눈이 그리 고을 리가 없다. 집안식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친정집 식모처럼 해 보지만, 집안에선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이다.

남자도 생겼다. 예쁘장하고 젊은 20대 후반의 여자, 딸린 애만 없으면 처녀라 해도 되는 것이다. 걸리는 놈마다 재미 한번 보려는 놈들이지, 평생을 같이 살겠다는 놈은 없었다. 재혼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주위에 있는 친구가 일본엘 간다고 한다. 한번 가면 3개월 정도 살다오고, 한국돈 몇백만원 들고 와서 잘 먹고 잘 쓰다가, 돈이 떨어질듯 하면 또 일본으로 간다. 일본에 가서도 정상적인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유흥업소에 나가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한달에 일본돈 20∼30만엔은 모아두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당시 일본돈 20만엔이면 한국돈 200만원이 되는 환율이었다.

또 한국 일반 봉급수준은 40만원∼50만원 수준인 때이라, 3개월 일에 일본돈 100여만엔 가까운 돈을 가지고 올수 있다면 상당한 돈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집 한 채에 한국돈 몇천만원이면 살 수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한 달에 20만엔 봉급은 대단한 수준이다. 당시도 대졸 초임이 20만엔정도이고, 그 봉급 수준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한 달에 30여만엔을 가지고 한국으로 가지고 갈수 있다면, 실제 받는 봉급은 그 이상이란 것은 바로 알 수 있다. 유흥업소에 나가려면 옷에도 머리에도 얼굴에도 돈이 든다. 또 유흥업소에 나가는 사람들은 알뜰하게 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치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친척의 초청장이 있어야, 비자를 받을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누님인 고모가 일본 오사카에 살았다. 고모는 해방 전에 고모부와 같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교포이다. 이젠 고모에게 진드기 처럼 붙을 수 밖에 없었다. 고모에게 진드기를 붙으려면 아버지를 먼저 설득 시켜, 아버지가 고모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는 슬슬 잘 들어준다. 시집 간 딸이 친정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도 꼴 보기 싫은 일인데, 일본에 가서 교포하고 재혼이라도 해서 살아버린다면, 이건 더 속이 시원한 일인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아버지가 고모에게 전화를 한다. 3개월간 일본에서 식당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고 오겠다고. 초청장을 만들어서 보내 달라고. 초청장이 왔다. 여권에 3개월 비자를 만들었고, 딸은 친정집에 맡기고서 일본 비행기를 탈수 있었다.

오사카에 도착했다. 식당 설거지 등 하는 일은 무궁무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이제까지 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다. 식당 설거지 하는 일도 하루 종일 열심히 잘 하면 한달 20만엔은 벌수 있었지만, 덜 힘들고 좋은 옷 입는 술집에 나가서 더 벌고 싶은 것이다. 나이 30안팎의 젊고 예쁜 여자가 왔기에 여기저기서 우리 가게로 오라고 인기도 좋았다.

미나미(南)라고 불리우는 오사카에서 남쪽에 위치한 유흥가 동네, 일본에서도 세계에서도 유명한 흥청망청 동네다. 일본 술집들이 있으며 또 한국 술집, 타이완 술집, 필리핀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수천 가게는 있는 동내이다. 술집 종류도 다양하다. 남자들이 손님으로 와서 술을 마시는 여자가 옆에 앉는 그라브(Club의 일본 발음), '그라브' 보다 조금 싼 술집 스낙크(Snack의 일본 발음), 이런 남자들만을 손님으로 하는 술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손님으로 가는 호스트 빠, 또 동성연애자(게이)들이 하는 게이 빠, 등 술집 종류도 다양하다.

경진이는 미나미(南)의 한국 그라브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여자가 술집에 가서 일할 수 없다. 술집여자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끼'가 있어야 술집여자가 될 수 있다. 경진이는 그 '끼'에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밤에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또 거리가 향수냄새로 절여 있다. 세계 최고 향수는 여기에 가면, 그 냄새를 알 수 있다. 어두워 질 무렵부터 아침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이 동네는 사람으로 끊이지를 않는다. 늦은 밤에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의 출출한 뱃속을 채워주는 여러 식당 등, 흥청망청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다 정비되어 있는 곳이다.

그것 뿐인가. 당시 1990년쯤은 일본은 버블 경제시대였다. 실제가격이 1백만엔이란 부동산이나 주식이 3백만엔 4백만엔을 호가하는 그런 때였다. 실제가격 1백만엔보다 더 올라간 돈이 바로 거품(버블)인 것이다. 당시는 그 거품이 거품인줄 모르고, 가격이 올라갔으니 좋다며, 너도 나도 비싼 술집에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소비가 미덕인줄 알고 정부가 또 매스컴이 돈 잘 쓰는 것을 부추기는 그런 때였다.

이때는 싸면 안 팔리고 비싸야 팔리는 그런 때였다. 일본 땅을 다 팔면 미국 땅을 다 사고도 남는다며, 우리는 세계 최고급만을 써야 된다며, 그런 최고급 짓만을 하는 사람들을, TV가 성공한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높게 높게도 방영해 주는 그런 시기. 또 TV에서도 세계 최고만 세계 최고 물건만 방송해 주는 그런 시기. 이 짓을 보고서 너도나도 다들 최고급만 찾았다. 거품으로 만들어진 돈이 있었기에 그런 물건 찾으러 갈 수 있었다. 밤12시쯤에는 길에는 택시가 없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30분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좀 가까운 거리라면  걷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런 택시가 지금은 몇 키로 씩이나 빈 택시로 줄 서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빈 택시의 운전기사들, 요새는 한숨만 쉬고 있다. 일본은 지금 그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요즘에는 그때를 말해, 길가에 어슬렁대는 똥개 입에도 만 엔짜리 지폐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일본이 정신을 못 차린 그런 때였다.

이런 때이니, 여자가 있는 술집 잘 되었다. 젊고 예쁜 여자가 새로 들어갔으니, 남자 손님들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손님들에게서 인기도 좋았다. 도항(同伴의 일본어 발음)라고 있다. 한 달에 몇 번 도항을 꼭 하라는 것이다. 도항 건수가 많아지면, 술집여자 일당이 올라간다. 정해진 도항 건수를 못 올리면, 이젠 술집에 벌금을 내어야 되는 시스템이다. 도항이란 저녁때 남자 손님과 만나서 식사를 하든지 무얼 하든지 좀 느즈막한 시간에 남자손님과 같이(동반해서) 둘이서 술집으로 출근하는 것이다. 도항일 경우, 술값이 비싸다. 양주도 좋은 것으로 한병 내려야 되는 등등을 합치면, 술값이 남자손님 혼자서 최저 5만엔이상을 써야 되는 것이다. 술집에서 본다면, 매월 안정된 숫자의 손님을 확보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가 술집 여자와 시간 내서 만나서 저녁 먹고 또 여자가 일하는 술집에 가서, 비싼 돈을 주면서 술을 마셔야 된다. 남자의 시커먼 마음속과, 술집과 술집여자의 장사속이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시스템인 것이다. 이 도항에는 일본말을 잘 알고 모르고는 그리 상관이 없다. 여자 남자의 관계에는 말을 알고 모르고는 그리 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말 모르는 것이 더 순진하며, 새 맛이 난다면 속 시커먼 남자들이 더 좋아하는 것이다.

경진이에게는 도항을 하겠다는 남자들이 줄줄이 줄 서 있다. 술집 도항이 잘 되니, 술집에서는 최고의 일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당뿐인가, 남자들은 도항하는 그 술값만 들이는가. 한 달에 술집에서 받는 봉급이 50만엔 정도, 또 다른 수입이 있다. 잘 먹고 잘 쓰고서도 50만엔 씩은 남기고 돌아갈 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3개월 일하고서 비자가 끝나니 제주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 섭섭했고 미련이 남는 것이다. 더 오래 일본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3개월 일해서 일본돈 150만엔 정도 가지고 갔다. 일본돈 150만엔이면 한국돈 1500만원이 되었다. 1990년 당시, 한국도 1500만원이라면 상당히 큰돈이었다. 몇 천 만원이면 좋은 집 살 수 있었던 시절에, 3개월 일해서 천오백만원 들고 제주도에 갔으니,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것이다.

돈뿐인가? 식구들에게 일본에서도 최고 좋다는 것으로 선물을 사서 들고 갔다. 일본 가기전에는 친정집 천덕꾸러기가, 일본에서 오더니만 돈 들고 오고, 좋은 선물 들고 오니, 이젠 공주님이 된 것이다.

친정집에서는, 딸은 친정어머니가 잘 키울테니 아무 걱정말고 일본에 가서 돈 많이 벌고 오라고 한다.

학생비자를 받고 싶었다. 받기 쉬운 일본어 학교에 들어가면 2년간은 문제없이 학생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고모에게서 3개월 비자를 받으려고 초청장 해 달라고 목이 메질 않아도 되는 일이다. 바로 제주도에서 유학 알선업자를 찾아갔다. 아무 어려움 없이 척척 잘 진행된다. 6개월 어학연수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해는 딸이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해였다. 딸의 입학식은 꼭 보고 싶었다. 딸은 초등학교 입학식, 엄마는 일본어 학교 입학식, 한 집에서 학생 2명이 탄생 했다. /신재경 (2편에서 계속됩니다.)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세이비(成美)대학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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