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大學校(university)과 大學(college)을 가리킨다. ⓒ양기혁
Old Observatory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학생들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② 지난(濟南)에서 온 청년과의 조우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짧은 복도를 지나가자 곧 좁은 홀과 데스크가 나왔다. 검정색 뿔테 안경을 낀 밝은 표정의 여자가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니 하오(안녕하세요)? Do you have a reservation?”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예약했는지를 묻고는, 여권을 달라고 한다. 유스호스텔 회원증과 여권을 꺼내주자, 내가 한국인임을 확인하고, “안녕하세요?”하고, 한국말로 인사하며 한 번 더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도미토리 6인실 숙박요금 40원 중 인터넷 예약시 지불한 금액 외의 차액과 보증금 100원을 지불하자 그녀는 영수증을 써주면서 자기를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그녀를 따라 3층의 한 객실로 들어갔다. 아래위 2단으로 된 나무침대 3개가 방 안에 놓여 있고 침대 중에 몇 개는 주인이 있는 듯 침구가 흐트러진 채 짐들이 놓여 있다. 짐이 없는 깨끗한 침대 중 아무거나 쓰면 된다고 해서 아래 칸에 비어 있는 것을 골라 지고 있는 배낭을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 우리나라의 大學校(university)과 大學(college)을 가리킨다. ⓒ양기혁

3층 복도에서 옥상과 돔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경사의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을 올라가자 넓은 홀이 나왔다. 이 홀의 둥근 천장이 밖에서 본 돔이었다. 홀을 지나 문 안쪽에는 7~8명 앉는 긴 탁자 하나와 4인용 탁자 하나가 전부인 조그만 카페가 있었는데 까만 테의 안경을 쓴 앳돼 보이는 청년이 반겨준다. 손님이 없는 빈 카페에서 칭다오에 온 기념으로 칭다오 맥주를 한 병 마시고 카페 옆문으로 건물 옥상에 나가니 거기엔 야외 노천카페로 꾸며졌고 포켓볼을 칠 수 있는 당구대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방이 트여 있어서 칭따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밖에는 바람이 차고 세차게 불어와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카페를 내려와 유스호스텔 주변의 공원을 둘러보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 위쪽에는‘SINCE 2010’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것이 보였다. 이곳은 산동대학교 미술대학 학생들이 위탁관리하며, 실습기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데스크에서 접수하는 여학생과 카페에서 맥주를 꺼내주던 앳된 모습의 청년도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건물 벽에는 이 건물 역시 아까 보았던 천주교당과 마찬가지로 독일 조차지였을 당시천문대로 쓰기 위해 독일인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 Old Observatory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학생들

공원을 한 바퀴 돌아가자 건물 모퉁이 한쪽에서 건물을 스케치하는 학생들이 보였고, 주변엔 노인들과 중년의 여인들이 몇 명씩 모여서 쿵푸 같은 운동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 곧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배가 고팠다. 옷을 챙겨입고 공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다시 방으로 올라가니 한 중국 청년이 들어와 있었다. 그와 인사하고 나서, 겉옷을 입고, 신발끈을 묶은 다음 그에게 말하였다.
“워샹츠완판, 니건워이치츠판바.(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식사하러 가자.)”
그와 조금 전에 처음 만나서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 꼭 그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서 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저 한국식의 인사치레이고, 작문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되어 나왔다.
“하오(好, 좋다)!”
그가 선선히 승낙을 하고, 뜻하지 않게 중국 청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카페에서는 가벼운 음료만 팔았고, 식사를 하기 위해 선 공원을 내려가야 했다. 우리는 어둠이 깔리고 있는 공원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식당주인은 우리를 탁자 하나가 달랑 놓여 있는 2층의 한 독방으로 안내했다. 이름도 모르는 초면의 중국청년을 마치 중요한 사업상의 손님을 만나는 것처럼 독방에서 마주 앉고 보니 좀 어색한 분위기 되었다. 그에게 음식을 알아서 주문하게 하고, 맥주를 시켜달라고 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우리는 칭다오 맥주 한 병씩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수첩을 꺼내 내 이름을 한자로 적고 그 밑에 영어로 한글 발음을 적은 뒤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그 밑에 써줄 것을 부탁했다.
‘취싱타오(cui xing tao)’, 한국식 발음으로는‘최흥도’가 그의 이름이다.
그는 산동성 성도(省都)가 있는 ‘지난’에 사는 청년으로, 그의 집은 지난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주로 면화와 옥수수를 많이 재배한다고 한다. ‘칭따오 르바오’에 지원하여 내일 아침 일찍 면접을 보러 가야 하기 때문에 유스호스텔에 묵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직업과 나이, 도시에 사는지 농촌에 사는지, 왜 혼자서 여행하는지 등 여러 가지가 궁금한 듯 물어왔다.

내가 오십이 넘은 나이를 말하자 그는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자기 아버지와 비슷하다며 농사짓는 아버지가 생각났는지 내가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인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여행 초반이라 머리가 짧았고, 수염도 깔끔하게 깎고 있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중국 현대사의 인물들인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시아오핑, 그리고 쑨원 등의 이름을 말하고, 누구를 좋아하며,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묻자 쑨원이란 ‘쑨종산(孫中山)’을 말하는 것이냐며 고쳐 물었다. 중국에서는 쑨원이라고 하기보다 쑨종산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마오쩌둥시절에 중국은 가난했고, 인민은 배가 고팠다. 덩시아오핑이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었고, 인민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덩시아오핑을 더 높이 평가한다. … 지금 중국은 부자이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 인민들은 가난하다. 이러한 차이가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지금 심각한 빈부격차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30여 년의 개혁개방정책의 결과, 중국은 경제대국이 되었고 소수의 부자가 생겨난 반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온 수억 명에 이르는 농민공(農民工)을 비롯하여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빈곤계층이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사회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다. 어쩌면 현재 중국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화려한 모습은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인민들의 희생 위에 위험스럽게 쌓아올린 부실건축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조 말 무술변법운동을 주도하다 좌절했던 중국의 개혁적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캉요우웨이(康有爲)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태평(太平)사상과 선진제자(先秦諸子)의 하나이며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가르친 묵가(墨家), 중국 전래의 신선사상 그리고 불교 등을 결합하여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고 국경, 종족, 계급, 그리고 남녀의 차별이 철폐된 유토피아적인 이상사회로서‘대동(大同)세계’를 제시하였는데, 마오쩌둥은 자신의 학창시절 영웅적 인물로 숭배하고 있었던 캉요우웨이가 그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실현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자신은 노동자 농민계급이 이끄는 인민공화국을 통하여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덩시아오핑의 중국적 사회주의하에서 마오쩌둥이 꿈꾸었던 평등한 이상사회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최 군의 중국어 발음은 물론이고 영어 발음조차도 알아듣기 힘들어 대화는 몹시 힘들었다. 그는 내 수첩에 영어로 질문을 썼다.
“Do the people in your country want unify or separate?”
통일과 분단을 동사형으로 썼지만 그 질문이 의도하는 바는 알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원하는지, 분단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라는지 묻고있었다. 나에게는 좀 갑작스럽고, 도발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질문을 보고 즉시 대답했다.
“당란(當然), want the unification.”
누구나 통일을 원하지만 분단국의 통일이란 한쪽의 일방적인 의사나 희망사항일 수가 없고 양쪽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 간의 파워게임 내지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고차원의 방정식이 아닐 수 없다.
“But USA, Japan, China, … don’t want Korea unification. Maybe they want Korea separates. That’s their natonal interests.(그러나 미국, 일본, 중국 등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은 한국이 통일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그들의 국가이익이다.)”

국제외교나 남북한관계에 대해서 전문가도 아니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추측건대 그렇지 않을까. 결국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될 것인가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은 오이를 듬성듬성 썰어서 살짝 절인 것와 면종류, 그리고 닭고기 삶은 것이 나왔다. 나는 그에게 이 집에 미판(米飯)이 있는지를 물었고, 그는 있다고 대답했는데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밥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요우(有)’라고 했을 때, 좀 기다리면 밥이 나오겠구나 생각했는데, 밥이 있지만 따로 주문을 하지 않은 것이다.

崔군은 대화가 너무 재미없다고 느꼈는지 축구로 화제를 돌리더니 한국축구가 대단하다며 중국축구에 문제가 많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였다. 그가 사는 지난은 축구에 매우 열광적인 도시이고, 광적인 축구팬인 치우미(蹴迷)도 많다고 한다.

나도 중국이 큰 나라이고 다른 스포츠 종목은 잘 하는데 축구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격려성 발언으로 중국이 잠재력이 있으니 기대를 걸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시간여의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먼저 방을 나와서 계산을 하기 위하여 아래층으로 내려와 물었다.
“둬샤오치엔(多少錢, 얼마에요)?”
주인이 음식값을 계산하고 있는데 뒤늦게 내려온 최 군이 자기가 음식값을 내겠다면서 나를 밀어내고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하고 말았다. 음식값은 60원 나왔는데 한국 돈으로는 만 원 정도이지만 나는 좀 어리둥절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가 식사를 같이하자고 제안을 했고, 그는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일 뿐인 것이다.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 중국말로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음식을 많이 안 먹고 대부분 자신이 먹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중국에 온 손님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일까. 잘 안 풀리는 숙제를 떠맡은 것처럼 머릿속이 좀 복잡했다.

우리는 어두워진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 숙소로 돌아왔다. 그는 곧 세면장에서 씻고 나더니 내일 있을 인터뷰 때문인지 위 칸의 그의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한다. 좀체 그냥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침대에 누웠다가 몸을 일으켜, 카페로 올라갔다. 카페에는 외국인들과 중국 청년들이 어울려 요란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과 좀 떨어져 칭따오 맥주와 화셩미(花生米, 땅콩) 한 접시를 주문하여 부족한 술기운을 채우고 나서 방으로 돌아갔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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