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를 시작하며 : 감성 코드로 들여다본 제주 저항사

▲ 제주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탐라호국신 광양왕이 매로 변하여 호종단의 배를 침몰시킨 전설 내력을 담고 있는 차귀도. ⓒ박찬식

  4·3사건 당시 제주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던 고창무는 학살을 피해 생존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사선을 넘나든 그가 10년 뒤 4·19혁명 직후 조선일보에 기고한 <한라산은 고발한다>라는 4·3에 대한 회고의 글(1960. 7. 16)에서 제주도민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여 관심을 끈다.

  “제주도민은 이조시대에는 선벌후계(先罰後啓)의 특권을 장악한 목사의 전횡에, 일제시대에는 군수와 경찰서장과 검사의 직권을 한 손에 잡고 갖은 횡포를 다하던 도사(島司)의 억압에 시달려 관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여야 한다는 체념과 생사의 판가름을 하여야할 궁지에 처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진(猛進)하는 성격, 이와 같은 도민의 이율배반의 심성은 방가(方哥)난, 이재수란, 일제시대의 해녀사건 등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중간 생략) 외부에서 선전하는 바와 같이 제주도민이 빨갱이는 아니었다. 분별 있는 분은 생각하여 보시라. 토호도 없고 3정보 이상 농토를 가진 지주도 없는 이 고장에 당시 각 정당이 서로 떠들어대던 농토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몰수 유상분배 등에 무슨 이해관계가 있어 헌신적 투쟁을 하였겠는가. 자고로 야불폐문(夜不閉門) 도불유습(道不遺拾)의 미풍이 있다는 도민에게는 일출이작(日出而作)하고 일입이식(日入而息) 할 수 있는 자유만 보장되면 그만인 것이다. (중간 생략) 3․1사건에 시달리고 시달려 참으려 해도 더 참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른 도민은 최후의 수단으로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일규봉기(一揆蜂起), 도로를 봉쇄하고 경찰에 무장반항의 태세를 취하니 이것이 바로 4․3사건인 것이다. 산봉우리에 있는 돌멩이는 극소의 외부적 힘의 작용에 의하여 구르기 시작하면 어떠한 큰 힘으로도 정지시키기 못하고 평탄한 지점까지 전락(轉落)하고야 마는 것과 같이, 건조할 대로 건조한 들판에는 불씨만 있으면 필사의 소화 작업도 보람 없이 온 들판이 회신(灰燼)하고야 마는 것과 같이 4․3사건은 폭발하고야말 정황에 놓여 있었다.”

  대문·도둑·거지가 없는 순박한 삼무의 전통, 지주와 소작인 구분이 없는 형평의 공동체사회를 이루며 살던 제주도민들은 관의 억압에 체념하면서도 생존을 위협하는 부당한 횡포에 용맹하게 저항하는 이율배반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민의 성격이 잘 표출된 역사적 사건으로 ‘방성칠란’(1898), ‘이재수란’(1901), 해녀항일투쟁(1932) 등을 예로 들었으며, 4·3사건 또한 도민성이 작용하여 분출한 봉기로 보고 있다.

  #. 감성 코드로 민중사 읽기

  지금까지 한국 민중운동사 연구는 19세기 한국사의 발전 방향을 증명하기 위하여 민족의식의 발현, 사회·경제의 발전, 계급 갈등의 출현, 혁명적 사회세력의 형성을 규명하는 데 치중해 왔다. 계급투쟁론에 입각한 연구들은 하층민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으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하층민들이 민란의 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 참여자로 드러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상당수 민란의 근본적 에너지가 된 것은 지역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차별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지역 엘리트들이 민란에 참여하게 되었고,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을 단일한 구호 아래 불러 모을 이념적 정당성이 되었다. 경제계급이나 사회신분보다 지역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지도부와 일반 참여자를 가릴 것 없이 집단적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4·3 등 항쟁사적 모습을 보아도 이념 분쟁을 뛰어넘어 저변에 흐르는 의식이 작용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며, 심연에 존재하는 자치적 의식, 외부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때로는 화산과 같이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민중운동사 연구에 문화사적 시각과 해석, 감성체계의 도입을 통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함을 지적하는 비판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서북지역의 ‘홍경래란’, 호남지역의 동학농민전쟁, 제주도의 ‘이재수란’, 일제하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해녀항일투쟁, 4·3과 5·18 등에서도 이런 요소를 적극적으로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복합혁명으로 파악했던 조르주 르페브르는 농민의 실천을 자율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민중을 고유한 문화를 가진 자율적 존재로 복권시켜 놓았다. 지금까지 민중을 투쟁의 주체로만 내세웠던 민중운동사 연구는 앞으로 기층민중을 자율적 존재로 보는 관점에 의거할 때 비로소 민중의 일상성과 감성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차별과 그에 저항한 자치 지향의 문제를 역사적인 원근법에 따라서 조명하고 지역의 다원적인 감성문화의 소산이라는 개방적 자세로 접근한다면, 한국사회의 감성문화는 국가적 획일주의와 지역폐쇄성을 극복하고 소통과 보편성·개방성을 추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 제주민의 역사적 자치의식

  제주민은 제주섬이 갖는 지리적인 고립성이나 지역적인 협소함 때문에 전통적으로 특수성을 강하게 띠어왔다. 또한 섬이기 때문에 섬을 에워싼 외부 주변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제주민의 역사는 고대 독립국(탐라)에서 변방으로 바뀌어간 과정이었다.

   상고시대로부터 1105년 고려왕조의 지방으로 편입되기까지 제주민들은 중앙으로부터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외관계를 독자적으로 맺어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고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자 제주섬은 유배지로 전락하였다. 제주민들에게는 2백년간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유배인과 다를 바 없는 폐쇄적인 삶을 강요받았다.

   제주민들은 고대 독립국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자율성을 내면화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주민의 자립적·자강적 정체성으로 지속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고려·조선과 같은 강력한 국가체제의 구심력에 이끌리면서 중앙에 대하여 순응하여 갔지만, 반발하는 사례도 자주 발생하였다. 강력한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제주민의 정체성은 ‘순응과 저항’의 양면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순응’의 정체성은 제주민을 극심한 수탈과 억압 속에서도 참고 버텨낸 근면함과 강인함의 상징으로 각인시켜 놓았다. ‘저항’의 정체성은 중앙의 통치력에 대한 반발로 표출되었고, 대개 민란이나 항쟁으로 귀결되었다. 대규모 항쟁이 일어날 때에는 ‘순응’하여 왔던 제주민들의 강인한 요소가 외부세력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제주민 저항사의 특징

▲ ‘목호란’ 최후의 결전장이었던 범섬과 관련 전설이 남아있는 외돌개. ⓒ박찬식

  제주의 전체 역사를 통해 수없이 일어난 민인들의 저항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탐라국의 멸망과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고, 이후에도 장기지속적으로 탐라국 독립과 자치에 대한 집단적인 감성과 기대심리가 잠복해 있다가 표출되곤 하였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의 경우, 1168년 양수가 주동한 반란, 정부군을 외면하고 삼별초 반란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사실, ‘목호란’에 대거 동참했다가 정부 진압군에 몰살당했던 사례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소덕유·길운절 반란’ 사건에 문충기 등 토호가 가담했던 일, ‘양제해란’을 탐라국 독립 거사로 조작했던 사례, ‘방성칠란’ 때 ‘탐라왕족’ 고여송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사실 등이 거론된다. 일제하 아나키즘운동과 자주운항운동, 공동체적인 저항인 해녀투쟁 또한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4·3의 공동체적 저항과 집단적 희생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저항의 움직임이 반드시 외래세력과의 관계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한반도 중앙정부를 외부 세력으로 보았을 때, 양수의 반란을 비롯한 고려시대 민란, ‘강제검란’을 비롯한 조선후기 민란은 중앙정부를 대신한 목민관에 대한 투쟁이며 곧 외래세력과의 전면전이었다. ‘이재수란’, 일제하 항일운동과 4·3은 침략세력으로 인식된 프랑스·일본·미국에 대한 전면 투쟁이었다. 또 한편으로 제주민은 외래세력과 연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삼별초와 함께 한 반정부·반몽골 투쟁, 몽골인들과 더불어 싸운 ‘목호란’, ‘육지인’(소덕유·길운절, 남학당, 유배인 등)들과 합세한 ‘문충기란’, ‘방성칠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새로운 제주역사 읽기

  이번 연재를 통해 지역의 종교와 문화, 지역공동체의 문화와 정서에 주목해서 아래로부터의 지역문화사, 민중사를 새롭게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지역과 중앙, 지역과 지역 간 문화적 상호 관계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해 무수히 일어난 제주민의 저항사에 영향을 미친 지역의 문화적 감성체계를 역사자료를 통해 추출하고 해석해내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 이번 작업은 제주역사에 대한 새로운 서술 시도라고 여겨본다.

  시간적으로는 12세기 초 탐라 멸망 이후 비로소 일어나 1168년 ‘양수의 난’을 시작으로 1901년 ‘이재수란’까지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식민지시대 항일운동과 4·3항쟁,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가 주어지면 이번 연재와 같은 시각으로 글을 써볼까 한다. 시간을 한정해 두어야 부담도 줄이고 기획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관계를 엮어나가기보다 제주민의 감성, 정신세계에 초점을 두고 사실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더욱 관심을 두고자 한다.

  근거 사료가 부족한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충분히 동원해서 메워나갈 것이다. 신화와 전설 같은 구비전승 자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직접 맡은 민초들의 향기를 글 속에 녹여내도록 하겠다. 그래도 딱딱한 문체로 독자들이 답답하게 여길 것 같아 미리 걱정된다. 조금이라도 쉽게, 이야기하듯이 써내려가고자 노력하겠다. /박찬식

   
 박찬식 박사는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특히 제주민란과 4ㆍ3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해 왔다. 서귀포시 출신으로 오현고와 제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ㆍ3위원회 전문위원으로 4ㆍ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터를 닦았다. 제주4ㆍ3연구소 소장과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 제주대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과 4ㆍ3평화재단 이사를 맡으며 자유로운 저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한국근대 천주교회와 향촌사회, 4ㆍ3과 제주역사, 4ㆍ3의 진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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