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5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

늘 그렇지만 신학기가 되면 학생들을 비롯해 교사와 학부모들까지도 새로운 긴장감에 사로잡히는 게 사실이다. 새로운 학교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학생들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심어주어야 하는 교사들의 마음도 사뭇 설렘과 기대감, 혹은 다소의 중압감도 있을 법하다.

그건 학부모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학년이 높아지면서 학업에 더 충실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소위 말하는 '왕따'와 같은 일을 당하지 말고 좋은 친구들과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건 모든 부보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필자 역시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인지라 아이들에게 새 학기 학교생활이 어떤지 은근히 물어보기도 한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냐는 질문에 아이는 특정 친구의 이름을 거명하며 서너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나의 호기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떤 친구들인지, 성격은 어떤지를 또 묻는다.

그러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한다. 나의 그런 질문 속에는 우리 아이가 은근히 좋은 친구만을 가려 사귀었으면 하는 욕심과 더불어 좋다, 나쁘다를 자신의 잣대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숨어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는 모두 8부작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 <티보가의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인데, 티보가의 열네 살 된 아들 자크와 그의 친구 다니엘의 성장통을 그린 소설이다.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은 의회 의원 티보에게는 열네 살짜리 둘째 아들 자크가 있었다. 그는 말썽만 부리는 골칫덩어리에다 성적이 바닥에 이른 열등아이다. 성격은 반항적이고 다혈질적이다. 그에 비에 자크의 친구 다니엘은 위태롭지만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차분하고 진중한 성품의 아이였다.
두 소년은 회색 노트를 통해 주로 시와 소설에 대한 소감을 교환하고, 사랑과 고독에 관한 솔직한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시와 책을 소개해주는 것은 주로 다니엘이었는데, 루소, 위고, 라마르틴, 뮈세, 에밀 졸라와 같은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회색 노트에 남긴 편지에는 방황하는 자크를 위로하는, '공부하라! 희망을 가지라! 사랑하라! 독서하라!'와 같은 문구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색 노트를 사제에게 압수당하고 만다. 사제는 그 노트에 적힌 내용들을 보면서 '심각한 과오'를 범한 중죄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티보가의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사제는 자크를 불러 프로테스탄트의 자식인 다니엘과는 멀어져야 하며 '회색 노트'의 내용은 중대한 죄이기에 퇴학을 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에 자크는 심하게 반항하고 다니엘을 꼬드겨 가출을 하기에 이른다.

파리를 떠나 낯선 도시 마르세유에 도착한 두 소년은 여관과 부둣가를 헤매며 모험을 하지만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행이었다. 끝내는 갑자기 여관방으로 들이닥친 경관에 의해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는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다니엘의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따뜻한 차를 끓이고 맑은 눈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한 기색은 있지만 치마폭에 쪼그리고 앉은 강아지를 쓰다듬어주는 편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난 너를 믿고 있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자크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보며 내심 안심이 되면서도 특유의 고집으로 아들을 냉정하게 대한다. 자크가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기를 기다린다. 방안에 갇힌 자크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용서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를 향해 영원히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니엘에게 유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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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한낱 짐승에 불과하고, 사랑만이 인간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상처 입은 내 마음의 부르짖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하다! 사랑하는 친구여, 네가 없다면 나는 한낱 열등생,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상을 열망하게 된 것은 순전히 너의 덕택이다.

(중략)

친구여. 나는 너에게 이 글을 유언으로 쓴다. 그들은 나를 너에게서 떼어놓고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들은 지금 나를 어떤 곳에 처넣으려고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는 너에게 말할 용기조차 없다. 나의 아버지가 부끄럽다! 나는 너를, 나의 유일한 벗이며 나를 선량하게 만들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벗인 너를,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것 같다. 그자들이 나를 너무 불행하게 만들고 너무 괴롭히면 난 자살해버리겠다. 그때는 내가 자진해서 일부러 죽었다는 것을, 그들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다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저세상의 문턱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사람은, 친구여, 그건 너일 것이다. 아듀!

만약 이 땅의 부모들이 자크가 남긴 유서를 읽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 것이다. 부족한 것 없는 집안의 아들 자크는 권력욕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 실제로 자크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문제가 터지자 자신의 위신에 금이 가는 것만 생각하지 그 아들이 그런 방황과 가출을 한 이유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가출했다 돌아온 아들에게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며 용서를 구하기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자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청소년 시기가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자아정체감을 획득하기 위한 방황은 청소년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며 성숙을 위해서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의 친구 간의 우정은 부모를 대신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질풍노도를 순항하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회색 노트'는 자크와 다니엘만의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 대화의 장이었으며 교실에서 나누지 못하는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해방구이기도 하였다. 이런 우정의 기록을 부정한 행위라고 판단한 것은 어른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탐독하는 것을 위험스럽게 생각했으며, 종교가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것을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다. 어찌 그것이 퇴학의 사유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는 점을 참작하며 해석해야 하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 적용해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인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 아이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교과와 상관없는 서적에만 탐닉하고, 돈도 안 되는 시를 쓰겠다며 학업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학교가 감옥이다'는 말을 아이로부터 간혹 듣는다. 학업에 대한 중압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신에 대해 자유롭게 탐색하고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이런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진부한 대안일 수 있으나 사랑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인간이란 한낱 짐승에 불과하고, 사랑만이 인간을 높일 수 있다'고 부르짖는 자크의 외침처럼,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있거나, 자동차로 대신하거나, 높은 평수의 집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마음이며, 그 마음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남편과의 불화를 겪고 죽어가는 딸까지 둔 다니엘의 어머니가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다정하게 다니엘을 껴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개나리 개화 소식이 들린다. 돌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등에 얹고,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책가방에 담고 들어오는 아이를 위해 사랑 가득 담은 편지를 쓸 노트 한 권 마련해보는 것은 어떨까. 햇살을 닮은 개나리 노트면 더욱 좋겠다. 아니면 무숫잎 같이 시퍼런 바다색 노트 한 권이라도.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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