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할망은 송당리 마을신 백주또에게(좌), 백주또는 지혜와 사랑의 농경신 자청비에게(우)
자청비는 조왕을 지키는 조왕할망에게, 조왕할망은 요망진 셋째 딸 가믄장아기에게

<김정숙의 제주신화> 14 신화 - 제주, 제주여성의 원형

신들의 이름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신화학에서 신화 속 이름들은 이름 이전에, ‘속성’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 삼승할망은 송당리 마을신 백주또에게(좌), 백주또는 지혜와 사랑의 농경신 자청비에게(우)

백주또

백주또는 일만팔천 제주 신화의 뿌리가 되는 송당본향당의 당신이다.
북제주의 송당리는 제주 신화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그리스로 치자면 올림푸스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신들은 마을을 다스리거나 각각의 영역을 담당하고 있어, 위아래없이 평등한 신격을 가지나, 굳이 따지자면 백주또는 최고의 신 제우스와,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를 합친 느낌이다. 

신화를 보면 이 여신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며 돌아다니던 ‘소로소천국’과 부부 인연을 맺고 살림을 시작하면서 송당 마을이 설촌되고, 이들의 자손들이 줄을 뻗고 발을 뻗어 제주의 온 마을에 좌정하고 마을을 다스리는 당신이 된다.

아들이 열여덟, 딸이 스물여덟, 손자가 삼백이른여덟이 되어가니 백주또는 남편 소천국이 사냥을 접고 농경을 해야 이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청한다. 그러마 응하고 소천국은 밭으로 나가 일을 한다. 배가 고파지자 일하는 소를 홀딱 잡아먹고 그걸로 양이 차지 않자, 옆에 있던 남의 소까지 잡아먹어버린다.
밭에 온 백주또는 “소를 잡아먹는 것은 예사로 있을 수 있으나, 남의 집 소를 잡아먹는 것은 쇠도둑놈, 말도둑놈 아닙니까!, 우리 땅 가르고 물 갈라 이혼합시다” 라 말한다.

백주또는 자신의 남편이라는 개인적인 관계에 앞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경제정의와 도리를 요구한다. 신뢰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가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관심과 상호존중을 그녀는 기꺼이 우선한다.

우영밭과, 안팤거리 가옥구조, 소가족제도, 갈중이, 겹부조의 풍습은 그녀가 만들어낸 문화 인듯하며, 혼자 살기를 고집하는 독립적인 제주의 할머니들은 백주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백주또 여성들이다.

자청비

자청비는 사랑과 미와 농경의 신이다. 아프로디테와 아테나, 데메테르를 합친 느낌이다. 
신화에 보면 15세가 되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베틀을 만들어 준다. 해당 기득권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전형적인 일인, 실을 곱게 잣고 조신한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녀는 어느 날 빨래를 하여 손이 고와졌다는 하녀의 말을 듣고 손빨래를 하러 나섰다가 문도령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그것에 몰두한다. 사랑만큼 그녀의 모든 것에 커다란 동기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남성중심의 불평등한 세계를 적나라하게 인식하게 한다. 

사랑의 극치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일지나, 가부장적 문화는 만날 수조차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안과 밖, 사랑채와 안채, 과거를 보러 가는 시험의 길과 베틀을 짜는 수도의 길은 남성과 여성을 만날 수 없게 했다.

이 사물의 질서에 자청비는 과감히 도전한다. 우선 그녀는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글공부를 위해 부모를 설득하고 남장을 하여 문도령의 세계로 들어간다.
남장을 하고서 자청비는, 여성이라는 옷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에 배제되고 차별당하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남성인 문도령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루어 내고, 오로지 힘으로 자신을 범하려했던 정수남이를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를 무기로 복수도, 이용도 하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 면서, 성차별에 첫 번째로 기여하는 성과 성역할 구분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집안 단장을 하거나 자기 외모에 단장을 할 요만큼의 겨를도 여유도 없이 오로지 일만 하며 살았던 제주여성들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을 꿈꾸면서 만들어낸 모습이 자청비가 아닐까.  

▲ 자청비는 조왕을 지키는 조왕할망에게, 조왕할망은 요망진 셋째 딸 가믄장아기에게

조왕할망

조왕할망이 등장하는 <문전본풀이>는 인간이 몸담고 살고 있는 집의 곳곳을 지키는 신에 대한 신화다. 조왕할망은 부엌을 관장하는 신으로 집안의 안전과 평화가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했던 신이다. 그리스신화의 헤스티아와 비슷하다. 
이 여신은 부엌에 좌정하여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고 끼니를 마련하며 정화(淨化)와 생명력의 상징인 물과 불을 관장한다고 믿어 제주의 여성들은 부엌을 늘 깨끗이 하고 여신에게 정화수를 올려 기원하였다. 빙떡, 물허벅과 조냥의 항아리는 그녀의 선물인 듯도 하다.

가믄장아기

가믄장아기는 운명의 여신이다.
신화를 보면, 가난한 집의 여식에다 가장 나이 어린 막내인 가믄장아기는 동네 사람들이 나무바가지에 밥을 해다 먹이며 키워준 ‘나무바가지 아기’다.
가믄장아기는 ‘가난’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결핍된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가믄장아기는 자신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가난'과 '여성'이라는, 천부적이고 사회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경제력과 독립의 성취를 위해 매진한다.

그런 그녀는 남편이 옆에 있든 없든, 별 차이 없이 스스로 완전하게 존재한다. 남성들보다 일찍 일어나, 채근대지도 않고 혼자 훌쩍 밭에 나간다. 통시의 거름을 퍼다 밭에 뿌리고, 애기구덕을 불턱에 놔두고 저승길과도 같은 바다로 자맥질했던 것이다.
일을 하고, 흙벽을 메우거나, 장롱을 옮기거나, 전구를 갈아 끼울 때도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혼자 후딱 해치운다.
이런 그녀의 독립심은 긍지가 되기도 하지만 미련하게 이중으로 힘들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험한 세상사에 대한 적극적 도전과 성공, 현실적인 감각, 실용적인 태도, 자아 지향적인 욕구,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강한 희구, 반면 부드러움이나 낭만적 태도의 결핍 등은 많은 제주의 가믄장아기 여성들이 가진 특징이다.

우리는 제주의 많은 여성들에게서 여신 가믄장아기를 만날 수 있다. 여신 가믄장아기가 늠름하듯, 가믄장을 닮은 제주여성들은 늠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애교를 부리는 귀여운 여인의 역할을 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
까마득한 바다로 자맥질하면서 바당밭을 개척해 내었던 도전적인 제주의 해녀들, 고난을 이겨내며 부를 성취하고, 많은 사람에게 되돌려 주었던 김만덕 등은 가믄장아기 원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여성들이다. (계속)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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