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기 칼럼> 4.3 64주년에 생각하는 평화, 평화의 섬

  햇살의 기운이 두드러진 날들이다. 어느덧 봄이다. 이미 중산간의 들판은 푸른 기운을 드러내고, 봄의 전령 양지꽃, 제비꽃은 제주의 오름과 들녘 곳곳에서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4월 3일이면, 제주 4.3사건이 발생한지 64년째 되는 날이다. 늘 봄소식과 함께 4.3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위령해야 하는 제주민들에게 여전히 봄은 따스한 햇살보다 오름허리를 감아오는, 아직은 차가운 바람의 기운으로 다가온다.

 # 제주도민들은 64년이 지난 오늘도 4.3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과거’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산다. 당시의 ‘억울한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연좌제란 이름으로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질곡이 되었다.

4.3해결이 제도화되었다지만,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는 가슴속에서 대를 물려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4.3당시 누구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어떤 집안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관계의 굴절을 겪고 있다.

4.3에 대한 진실규명도 이미 그것이 국가차원에서 공식화되었지만, 생각을 달리하는 지금의 정권은 애써 그것을 축소하고, 외면하려 했다. 4.3의 성격과 심지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일부 우익의 왜곡과 도전을 사실상 방조했다. 국가가 사죄한 사건임에도 현재의 대통령은 지난 4년간 단 한 번도 4.3 위령제장을 찾지 않았다.
 
   작년부터 그 양상이 전국적으로 격화된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문제는 이 문제를 직접 경험한 제주사람들이 제2의 4.3이라고 칭할 만큼 사람들을 갈라 놓았다.

해군기지 건설강행 지원을 위해 찾아든 육지경찰은 강경진압이란 이름으로 들이닥쳤던 육지 응원경찰의 망령이 60년만에 부활한듯한 인상으로 제주도민에게 다가왔다. 해군기지 건설문제로 인한 강정마을의 갈등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단절, 증오, 상처들을 남겼는데, 그것은 분명 어떤 폭력의 산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가폭력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제주민에게 국가의 해군기지 건설강행은 또 다른 국가폭력으로 다가왔다. 이렇듯, 4.3은 그 자체의 상처와 한으로서, 또한 한편으로, 새롭게 제기된 현재의 문제로도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 두 동강 난 강정마을, 파편화된 제주사회...이걸 ‘평화’라고 한다면...

  지난 2005년 1월, 제주는 정부로부터 4.3이라는 역사의 사건을 배경으로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 ‘평화’의 내용은 이른바 ‘적극적 평화관’에 따른 것이었다. 제주 평화의 섬은 "모든 위협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인 적극적 의미의 평화를 실천해 나가는 일련의 사고체계와 정책 등을 포괄하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체계"로서 공식 정의되었다.

그러나 해군기지 건설이 추진되는 순간, 이 정의는 곧 사문화되었다. 물론, 안보론자들은 군기지의 건설이 이러한 정의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하지만, 지난 6년 ‘강정의 현상’은 이것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보여줄 따름이다.

해군기지 추진 첫 단계부터 한 마을의 전통적 평화마저 산산조각 낸 마당에 궁극적으로 군사기지가 평화의 섬과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적어도 해군기지 건설문제가 국내적 차원은 물론, 국제적 수준에서까지 ‘평화’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의 사안으로 떠오른 지금, ‘세계 평화의 섬, 제주’라는 명함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지금 추진되는 기지가 동북아의 잠재된 군사적 대결과 군비경쟁 가속화의 위험한 빌미가 될거라는, 지난 수년 동안 도처에서 제기된 우려는 이미 전쟁방지용 기지라는 추진론자들의 주장을 상식선에서 밀어내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제주의 경험적 입장에서 더욱 명약관화하다. 4.3사건이 전후 냉전체제하의 한반도 정책을 둘러싼 미국의 셈법(주한미군 주둔 여부를 둘러싼 미국 정부 내부의 논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특히 미-중간의 세력경쟁이 체제화되는 지금 현재 추진되는 기지가 자위력 확보수단이든, 한미군사동맹의 산물이든 그것이 동북아 평화에 나쁜 영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주에 대규모 군사시설이 들어선다면, 제주는 국제적 위험성 앞에 노출되고 말 것”이라던 지금의 우근민 도지사의 2001년 평화포럼 개막연설 내용은 이런 점에서, 일찍이 지금의 상황을 갈파한 경계의 목소리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에 추진되기 시작한 해군기지 건설계획이 오늘 날에 이르자, 당시 도지사는 지금,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해 본 적이 없다고 공언한다. 특별자치 도백의 슬픈 아이러니다.

  여기에 해군기지 건설과정의 첨예한 논란거리로 등장한 생태계 파괴문제 또한 제주 평화의 섬 실체는 물론, 본질적 평화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고 있다.

앞서 제주 평화의 섬 정의에서 언급되듯, 평화란 ‘모든 위협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일진대, 그것도 국가, 혹은 세계로부터 그 보호가치가 충분히 인정된 귀중한 생태자원들이 군사안보를 매개한 또 다른 국가논리로 위협 당하는 현상은 평화의 섬 지정당시의 그 정의란 단지 진정성 없는 수사에 불과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4.3 이후, 어려운 시대를 건너오며 제주가 그나마 도약의 기운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은 다름 아닌 천혜의 자연환경이었다. 때문에 평화의 섬 지정 이후에도 평화의 섬 논리에 4.3의 역사논리와 더불어 생태․생명논리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제기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추진된 지금의 군사기지 계획이 4.3진실규명의 토대위에 올려진 평화의 섬에 대한 제주도민의 염원을 한순간에 분열시키고, 귀중한 생태계마저 무참히 파괴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 4.3이 슬픈 건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 때문...64년전 본 그 국가폭력이 오늘 또 다시

  4.3이 아직도 슬픈 역사인 것은 또 다른 국가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는 해군기지 건설문제에 평화의 목소리로 응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제도화’된 4.3이 군기지 건설이라는 국가차원의 ‘제도적 결정’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렵게 일군 진실규명과 화해의 노력이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역사가 또 다른 국가폭력에는 눈감아야 하는 역설적 슬픔이 4.3의 현재가 아닐까한다.

  “아멩 반대해도 나라가 허젠 허는 일은 기어코 헌다(아무리 반대해도 국가가 하려고 하는 일은 결국 이뤄지고 만다)” 이 말은 지난 2002년 이래 해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지역 어른들로부터 심심찮게 접했던 말이다.

▲ 고유기
이 말에 4.3이라는 굴곡의 역사의 한 가운데를 살았던 제주 사람들의 체념과 슬픔이 녹아있다. 이 체념이 슬픔으로만 남아있는 한, 제주 평화의 섬이란 강정마을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시국의 흐름에 따라 밀려다니는 한낱 허상의 여망일 뿐이다. 제도의 언어가 아니라, 제주민이 밑에서부터 다시 쓰는 평화의 섬이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4.3의 아픔으로부터 새롭게 제주가 태어나는 길이다. 고유기/민주통합당 제주도당 정책실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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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월간<종교와 평화>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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