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기슭 절벽에 새겨진‘蔣介石藏身處 ⓒ양기혁
여산 기슭에 새겨진 제2차 국공합작을 보여주는 부조 ⓒ양기혁
여산 아래에서 투어 일행과 기념사진, 앞줄의 두 소녀가 시아오펑과 시아오핑이다. ⓒ양기혁
진시황의 병마용 ⓒ양기혁
진시황의 병마용 ⓒ양기혁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6 중국 대륙의 심장부 '시안(西安)' ②  

버스에서 한국말로 인사했던 소녀가 나에게로 오더니 한국말로 단어 몇 가지를 말했는데“아빠, 엄마, 오빠 ….”라고 얘기하면서 뭘 물어 보는 것 같았다.

“니먼 스 이쟈런마 (너희들은 한가족이냐)?”
그녀가 한 말로 유추하여 나와 가이드를 제외한 나머지 8명이 가족이나 친척인지를 묻자 그녀가 성급히 손을 내젓고 아니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한궈위, 수수지아오서머’는 한국말로 뭐라고 하느냐)?”
“삼촌 또는 아저씨?”
내가 아저씨라고 말하자 그녀가“아저씨!”하고 따라 외쳤다. 그녀는 전에 들어서 알고 있던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애를 태웠던 것 같았다. 말없이 옆에 서 있던 그녀의 친구와 뭐라고 얘기하더니 그녀는 나에게 자기를 소개하였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통통한 소녀가‘왕 시아오펑’, 말없이 새침하게 서 있던 친구가‘쳰 시아오핑’이라고 했다. 우리는 산을 걸어서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시아오펑과 시아오핑은 나를 아저씨라 부르며 곁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얼마를 가다 보니 한국말로‘문자왔숑, 문자왔숑’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시아오펑의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얼마 전 현빈과 하지원이 주인공으로 나오던 드라마‘시크릿 가든’을 TV에서 방영할 때 우리 집에서도 아내와 딸이 그 시간만 되면 만사 제쳐놓고 온 정신이 팔려서 드라마를 시청하였었다.

시아오펑에게 물었다.
“니시환 수엔빈(현빈을 좋아하니)?”
“수엔빈, 헌시환(현빈을 아주 좋아한다).”
작년에 극장에 가서 본 두 편의 영화 중의 하나가 현빈과 중국 여배우 탕웨이가 주연한‘만추’였다. 세 번째 리메이크된다는 ‘만추’는 이만희 감독이 만들었다는 첫 번째 것과 배우 정동환과 김혜자가 나온다는 두 번째 만추도 보지 않아서 그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탕웨이를 보고 싶었다.

영화는 2% 부족한 듯 아쉬움을 남겼지만 탕웨이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화장기없이 우수 어린 그녀의 표정과 후줄근하고 빛바랜 황토색 외투, 그리고 안개에 젖은 시애틀이 자아내는 애수 속에서 나는 쓸쓸한 늦은 가을을 느꼈다.

시아오펑을 돌아보며 물었다.
“니 즈다오 탕웨이마(탕웨이를 아니)?”
“부즈다오(不知道, 몰라요).”
그녀는 한국배우 현빈은 알아도 중국배우 탕웨이는 모르고 있었다.

▲ 여산 기슭 절벽에 새겨진‘蔣介石藏身處 ⓒ양기혁

걸어서 내려오며, 곳곳에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는 나무그늘과 쉼터를 지나오다 보니, 산기슭 한 절벽 암석에 ‘(장제스 몸을 숨긴 곳)’라고 쓰여 있는 곳이 나왔다. 바로 중국 현대사의 물길을 뒤바꾸어놓은 ‘서안사변(西安事變)’의 현장이었다.

국민당 정부군의 계속적인 포위공격에 중국 공산당은 루이진(瑞金)의 쟝시(江西)소비에트를 포기하고 1934년 10월 대장정을 시작하여 국민당군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산시성 북부에 둥지를 틀기까지 1년여에 걸쳐서 협곡과 설산과 대습지를 통과하여 2만 5천 리(1만km)를 이동해 갔다.

당시 산시성 서안 지역 국민당 정부군의 지휘자는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후청(楊虎城)이었는데 장쉐량은 만주봉천군벌로,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장쭤린(張作霖)의 아들이며, 양후청 또한 서북 군벌이며 항일군을 일으켰던 펑위샹(馮玉祥, 풍옥상)의 부하였던 탓에 항일투쟁에 미온적이었던 장제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공산당의 내전 중지, 거국일치 항일전선에 동조하여 비밀리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에 타협적일 뿐만 아니라 항일 투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을 탄압하기까지 했으니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반일, 반국민당 여론이 비등하였고, 공산당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여산 기슭에 새겨진 제2차 국공합작을 보여주는 부조 ⓒ양기혁

이러한 시점에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토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서안을 방문하였다가 오히려 장쉐량의 군대에 그 자신이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녘 그가 머물렀던 숙소인 화청지에 장쉐량의 군대가 들이닥쳐 장제스의 수행원 삼십여 명을 사살하자 장제스는 황급히 뒷산으로 피신했다가 붙잡혔다고 하는데, 여산의 이곳 암벽 사이에 숨어 있다가 잡힌 것으로 보인다.

“민첩한 총통은 맨발에 잠옷바람으로 달아났으며-틀니까지 남겨둔 상태였다.-담을 뛰어넘으면서 등을 다친 채 가까운 산에 이르렀다.고통과 분노를 느끼면서 (산기슭의 바위) 균열 사이에 쭈그리고 있던 그를 장쉐량 휘하의 장교 하나가 발견했다.”(*로스 테릴,《 마오쩌둥 평전》에서)

이 일로 인하여 여산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으로 재편되었다.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로 궁지에 몰려 있던 공산당은 한숨을 돌리고 그들의 세력을 키워갈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이후 일본군과 유격전으로 대일투쟁을 하는 한편, 농촌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그들의 세력을 키워갔다. 일본패망 후 벌어진 내전에서 마침내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대만섬으로 패퇴시키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는 그 단초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 시안의 화청지와 여산인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 탓인지 그곳에서부터 산을 내려가는 길목 곳곳에는 국공합작을 보여주는 부조들과 역사기록들로 채워지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들이 사용하였던 대포와 전투기 같은 무기들도 산기슭 곳곳에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곳 상인들도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제복을 입고 사진촬영하게 하는 시설을 갖추고 관광객들을 불러모았다.

▲ 여산 아래에서 투어 일행과 기념사진, 앞줄의 두 소녀가 시아오펑과 시아오핑이다. ⓒ양기혁

산을 내려와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코스로 향했는데, 투어의 필수코스인 기념품 가게였다. 다른 일행들은 거의쇼핑을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안에 왔으니 병마용 모형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싶어서 조금 비싼 감은 있었지만 하나 샀다.

다음 코스로 향하여 차가 도착한 곳은 세계 8대 불가사의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했는데, 일종의 사설 관광지로 보였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모형을 한 건물과 주차장 한쪽에는 정체 모를 서양의 고대 인물 전신상이 서 있었는데, 피라미드 모형은 낡아서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겉포장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관람을 원치않는 곳은 안 봐도 된다고 해서, 가이드에게 관람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일행들과 떨어져나와 그늘진 구석에 앉아서 쉬었다.

오랜 세월 고대 중국의 수도로서 많은 유적지와 볼거리가 있는 시안에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또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관광지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쉬는 동안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대소변 보는 곳이 양쪽 벽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소변보는 곳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변 봐야 할 곳이 달랑 밑에 구멍만 뚫려 있는 것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데 칸막이도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서 일을 처리하라니. 시안은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중국의 악명 높은 화장실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불쾌하고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중국의 실제 모습은 통계수치가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화장실, 거리의 무질서한 차량과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들은 짧은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하여 버스에 올라 예정된 식당으로 향했다. 일행 모두가 점심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이미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가이드에게 시원한 맥주 한 병만 주문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나에게로 온 가이드는 식사를 안 하는 사람은 식당에 있으면 안 된다면서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맥주는 줄 생각도 않고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니,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밖에 나가서 보니 바로 근처에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캔맥주 하나 사서 흙먼지 날리는 식당 앞 계단 그늘진 곳에 앉아 식사 마치기를 기다렸다. 식사를 끝내고 이제는 병마용으로 가나 했는데, 또 기념품 가게를 한 군데 더 들르고 나서야 병마용으로 향한다. 그런데 도중에 차를 세우더니 나이 드신 여자 세 분이 차에서 내린다. 관광을 하지 않겠다고 한 모양이다. 불필요한 기념품 가게만 돌다 정작 투어의 핵심인 병마용을 보기 전에 그들은 관광을 포기한 것이다. 일행은 더욱 단출해졌다.

병마용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입구에서부터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가이드는 입장권을 건네주고, 관람을 마치고 나서 다시 만나야 할 장소와 시간을 가르쳐주고는 사라져버렸다.

진시황(秦始皇, BC. 259~210)은 성이 영, 이름이 정(政)이다. 기원전 246년 13세의 나이로 진왕(秦王)에 오른 그는 10여 년간 아버지장양왕 이인의 오랜 친구이자 대상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의 섭정에 가려져 있었으나 23세가 되는 기원전 237년 여불위를 내쫓고, 법가 학자인 이사(李斯)를 승상으로 기용하여 통일을 향한 그의 야망을 드러내었다.(진왕 정은 여불위가 장양왕에게 보낸 희첩이 낳은 아들로서 실제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설도 있다.)

7웅이 정립한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30년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조(趙), 연(燕), 위(魏), 초(楚)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마지막으로 제(齊)나라가 스스로 항복함으로써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진나라는 통일제국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진나라는 주(周)나라에서 실시하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縣)을 두는 군현제를 실시하여 관리를 파견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제는 한(漢)나라로 계승되어 이후 2000여 년간 중국의 기본적인 통치체제가 되었다.

쉰 살이 되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제국을 순시하던 중에 죽음을 맞게 되는데, 간질이나 수은 중독과 같은 지병에 의하여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적장자(嫡長子)인 부소(扶蘇)를 제거하고 2세 황제에 오르는 서자(庶子) 호해(胡亥)나 환관 조고(趙高)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진실을 확인할 도리는 없다.

▲ 진시황의 병마용 ⓒ양기혁

진시황이 죽은 뒤 진나라는 음모와 정변의 혼돈 속에서 결국 4년 만에 멸망의 길을 가는데 대일통의 제국을 만든 지 불과 15년 만이다. 여산 북쪽기슭에 있는 진시황릉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병마용갱은 1974년 3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면서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6000개에 이르는 실물 크기의 병마용들이 당시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전투태세를 취하여 죽은 황제를 결사보위하는 모습이 살아서 불로장생을 꿈꾸고 죽어서도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절대권력자의 허망한 꿈을 보여주고 있었다.

1호갱에 이어 1976년 2호갱과 3호갱이 발견되면서 일대의 발굴현장은 대형철골구조에 둥근 지붕을 씌워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여느 관광지가 그러하듯이 비슷비슷한 모양의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서 관광객들을 호객한다. 거리에서도 아주머니, 할머니 행상들이 옥팔찌와 조각품들을 손과 팔에 걸친 채 관광객들에게 접근하여 물건을 내밀고, 사람들은 손을 내저으며 저마다 한마디씩 외친다.

“부용, 부용(不用).”
나에게로 다가온 할머니에게 나도 한마디 했다.
“부용, 부용.”
멀어져 가는 할머니가 넋두리처럼 내뱉는 한마디가 들려온다.
“또우숴화부용러(모두가 소용없다 하는구나).”

▲ 진시황의 병마용 ⓒ양기혁

투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도로공사로 차선이 다 막혀서 차는 비포장 길로, 인도로,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간다. 거리에 나붙은 광고판을 보니 세계원예박람회가 얼마후 시안에서 열리는데, 개막이 열흘 남짓 남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도로포장도 새로 하고 거리의 집들도 페인트칠을 하고 아예 도로 양쪽으로 벽을 세워버리는 곳도 있었다.

처음 출발했던 시안역 앞 사거리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려고 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들과 작별해야 했다. 시아오펑은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 수첩에 적어준 전화번호를 얘기하며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귀에다 갖다대고 연락하라고 하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예약한 치시엔 유스호스텔은 베이신졔(北新街)에 위치해 있고, 가이드북의 시안시내 약도를 보니 시안역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좀 떨어진 꺼밍꽁위엔옆 에 그 길이 보였다. 역 앞 상가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꺼밍꽁위엔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등에 진 배낭 때문에 어깨가 저려오기 시작하고, 이마와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공원 정문에 이르러 정문 옆에 불을 밝힌 가게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길을 물어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베이신졔’를 찾아나섰다. 다시 몇 번을 사람들에게 물어가며‘베이신졔’에 이르자, 예약한‘치시엔주앙’을 곧 찾을 수 있었다.

단층 기와집이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길모퉁에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닫힌 문에 달린 벨을 누르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인기척이 없고 깜깜한 밖과 달리 안에 들어서자 데스크 건너편으로 노천카페인 듯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고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예약
을 해서 접수하는 여자는 예약과 여권을 확인하고 숙박요금과 보증금을 받고 방 열쇠를 건네주더니 앞장서 나간다.

방에 들어서서 침대에 짐을 내려놓았다.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땀을 흘리기도 했고, 며칠간 샤워를 못하기도 해서 우선 세면장에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화장실문에 좌변기에는 한자로 쓴‘줘스(坐式)’밑에 Western style, 쪼그려 앉는‘뚠스’밑에는 China style이라고 쓰여 있어서 좀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쪼그려 앉아서 용변을 보는 일이 차이나 스타일만은 아닐텐데.

샤워를 마치고 나서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여행객들의 열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는 노천카페에 나가 구석진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마시니 갈증과 여행의 피로는 사라지고,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느껴진다.

한쪽 구석에 아름드리 고목이 어둠이 가득한 하늘로 솟아올라 검은 기와지붕 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그 옆으로 낮에 병마용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고대 인물 전신상이 서서 지그시 앞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마치 내가 춘추전국시대의 한 주막집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2천 년 전 춘추전국시대의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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