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가 청보리 물결로 넘실거린다.
가파도는 가오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안내 표지판에서 촬영)
가파도 해안의 너럭바위인데, 강정마을 구럼비해안에 널려있는 바이들과 모양과 화학조성이 비슷하다.
바위들이 다채로운 색깔을 띠는데도 불구하고 가파도의 암석은 화학적으로 동일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해안도로 절개지에서 가파도의 토양아래 덮여있는 기반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토양의 영향인지 붉은 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가파초등학교 남쪽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널려 있다. 최근 당국이 조사를 벌였지만 이 바위들이 고인돌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가파도의 기반암이 강정동의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무에 이 일대 토양도 강정동의 논 처럼 찰진 황색을 띤다. 가파도가 짧은 기간동안 큰 마을로 발전하게 된 것도 이 비옥한 토양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바다너머 보이는 섬은 마라도이다.
가파도 가운데에서 서면 바다너머 산방산과 송악산, 모슬봉 등이 병풍 속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섬의 서북부 해안길에 늘어선 있는 돌담이다. 이 돌들은 제주도 본섬에 널려 있는 것들과 매우 다르다. 모양이 둥굴둥글하고 표면이 매끄러운 핵석이다.

<장태욱의 지질기행> 12 가파도, 거대 화산체 구루터기만 남은 섬

▲ 가파도가 청보리 물결로 넘실거린다.

▲ 가파도는 가오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안내 표지판에서 촬영)

여름의 길목, 가파도가 온통 푸른 물결로 넘친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바람에 한들거리는 보리가 어우러진 섬의 정경은 한가로움 그 자체다. 그 푸른 평화를 찾아 진주와 함께 도항선에 몸을 실었다.

 가파도는 서귀포시 대정읍에 속한 섬으로, 하모리에서 약 2.1km 떨어진 화산섬이다. 섬은 가오리와 같은 형상을 띠며, 둘레는 약 4㎞이고, 총면적은 0.84㎢에 이른다.

<증보 탐라지>에 따르면 이 섬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1751년(영조 27)의 일이다. 당시 제주목사였던 정언유가 섬에 검은 소를 키우는 목장을 설치하여 소 50마리를 방목한 것이 정착의 시초가 된다.

이 섬에 소를 키우게 되자, 1840년(헌종 6년)에는 영국 함선 한 척이 섬에 정박하고 소를 약탈해가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영국 선박은 대포를 발사하며 조선인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1842년(헌종 8년)에 이르러 제주목사 이원조가 나라의 목축을 이 섬에 놓아기르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섬에 들어와 밭을 일구고 세금을 내게 했더니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마침내 큰 마을을 이뤘다. 그 후 주민들은 고구마 농사를 짓거나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삶을 영위했다. 

한편, 가파초등학교 남쪽 경작지에 고인돌로 보이는 암석들이 다량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가파도 관광지도에도 이 일대를 고인돌 분포지로 표시해놓고 있다.

▲ 가파초등학교 남쪽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널려 있다. 최근 당국이 조사를 벌였지만 이 바위들이 고인돌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가파도의 기반암이 강정동의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무에 이 일대 토양도 강정동의 논 처럼 찰진 황색을 띤다. 가파도가 짧은 기간동안 큰 마을로 발전하게 된 것도 이 비옥한 토양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바다너머 보이는 섬은 마라도이다.

가파도를 방문하기 전에는 필자는 이 섬에 분포하는 바위들이 고인돌이 아닐 것으로 판단했다. 고인돌이 분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섬에서 부족단위의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기에는 섬의 크기가 너무 작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섬을 방문하고는 생각이 약간 바꿨다. 섬의 토질이 매우 비옥하기 때문에 농경에 익숙한 이들이었다면 집단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당국이 이 일대에 대해 발굴조사를 펼쳤는데, 이들이 고인돌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가파도 현장에서 만난 주민과 서귀포시 담당 공문원이 모두 비슷한 증언을 했다.

▲ 가파도 가운데에서 서면 바다너머 산방산과 송악산, 모슬봉 등이 병풍 속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섬이 방석처럼 납작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 서면 섬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산방산, 송악산, 모슬봉 등이 병풍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에 한들거리는 보리 이삭이 운치를 더해 마치 한편의 풍경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가파도 해안을 이루는 암석은 제주도 해안에 널리 분포하는 검은색 다공질 현무암과는 매우 다른 것들이다. 암석이 회백색이고, 바닥이 판판하여 강정마을 구럼비해안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기반암이 강정동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토질도 강정마을의 논처럼 찰진 황색이다. 예전에 학자들은 가파도의 기반암이 강정동의 것과 비슷하여 가파도의 암석을 강정동현무암질조면안산암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암석의 나이를 조사해본 결과, 가파도의 나이는 대략 80만년 안팎으로 나타났다. 제주도내 단일 화산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산방산과 비슷한 연령으로, 제주도 초기 화산활동의 결과 생긴 화산체다. 반면에 강정동해안 암석의 경우는 그 연령이 약 40만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 가파도 해안의 너럭바위인데, 강정마을 구럼비해안에 널려있는 바이들과 모양과 화학조성이 비슷하다.

▲ 바위들이 다채로운 색깔을 띠는데도 불구하고 가파도의 암석은 화학적으로 동일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가파도 해안의 암석을 보면 매우 다채로운 문양과 색깔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섬이 태어날 때, 다양한 마그마의 분출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지만, 조사결과 섬의 화학조성이 단일한 현무암질 조면안산암인 것으로 밝혀졌다. 단일한 마그마가 분출환경에 따라 다채로운 외형과 색깔을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파도 주변의 해저지형을 조사한 결과 주변이 원래 육상 환경에 있었고, 섬은 산방산과 모양이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규모가 더 큰 용암돔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다가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어 섬이 여러 차례 해수에 잠겼다가 노출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파도의 침식을 심하게 받아 섬은 바닥만 남기고 남작한 모양으로 남게 되었다.

큰 나무를 잘라내고 남은 그루터기만 보고서 원래나무의 크기와 연령을 알 수 있듯이, 가파도의 경우도 물속에 잠긴 바닥만 보고서 원래 거대한 화산체였음을 짐작하는 것이다.

▲ 해안도로 절개지에서 가파도의 토양아래 덮여있는 기반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토양의 영향인지 붉은 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 섬의 서북부 해안길에 늘어선 있는 돌담이다. 이 돌들은 제주도 본섬에 널려 있는 것들과 매우 다르다. 모양이 둥굴둥글하고 표면이 매끄러운 핵석이다.

 

가파도 해안을 따라 사책로가 조성되었는데, 해안도로 중간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지층을 깎아놓은 절개기가 길게 이어진다. 마라도의 토양에 덮인 기반암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인데, 기반암이 매우 매끄럽고 붉은 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섬의 서북부 해안도로에는 주민들이 바람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돌담이 길게 이어지는데, 돌담의 제주도 본섬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 돌들은 표면이 매끄럽고 매우 둥글둥글한 게 특징이다. 기반암이 바람과 해수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모양이 구형으로 된 것들인데, 이를 핵석(core stone)이라 한다. /장태욱

 
   
장태욱 시민기자는 1969년 남원읍 위미리에서 출생했다. 서귀고등학교를 거쳐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입학해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42년 후배가 됐다.  1992년 졸업 후 항해사 생활을 참 재미나게 했다. 인도네시아 낙후된 섬에서 의사 흉내를 내며 원주민들 치료해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제주대학교 의예과 입학해 수료했다. 의지가 박약한 탓에 의사되기는 포기했다.  그 후 입시학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씨름하다 2005년에 <오마이뉴스>와 <제주의소리>에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에 바람이 부는 망장포로 귀촌해 귤을 재배하며 지내다 갑자기 제주도 지질에 꽂혀 지질기행을 기획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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