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농경의 신 자청비. 제주그림책연구회 초록주멩기 일부

<김정숙의 제주신회> 20 자청비이야기 ④

며느리되기 심사

부모님은 수수께끼의 뜻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며 서수왕따님과 자청비를 불려들여 무서운 과제를 내 걸었다. 쉰 자 구덩이를 파 놓고, 숯 쉰 섬에 불을 피워 작도를 걸어 놓고 작도를 타 나가고 타 들어와야 며느릿감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서수왕막내딸이 와들와들 떨며 뒤로 물러났다. 자청비는 작도 위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칼날 위로 걸어 나갔다. 작도 끝에 다다라 한 발을 땅에 내리려는 순간 발뒤꿈치가 슬쩍 끊어졌다. 붉은 피가 불끈 솟았다. 자청비는 속치맛자락으로 얼른 싹 쓸었다.
그 법으로 여자 아이 열다섯 살이 넘어가면 다달이 몸에 생리 오는 법을 마련했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문도령의 부모님이 달려들어 며느릿감이 분명하다며 얼싸 안았다.
칼선다리를 건너지 못한 서수왕따님은 그날부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물 한 모금, 쌀 한 톨 먹지 않더니 시름시름 기어이 죽고 말았다.
그 죽은 몸에서 새가 날아올랐다. 머리로는 두통새, 눈으로는 흘긋새, 코로는 악숨새, 입으로는 헤말림새가 나와서 서수왕따님애기는 원한을 지닌 채 이곳저곳 다니며 흉험을 주고 얻어먹는 새가 되었다.

그 때의 일로 오늘날도, 이 새가 들어서 다정한 부부간의 살림을 분산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혼인할 때 신부상을 받으면 먼저 음식을 조금씩 떠서 상 밑으로 놓는 법이 생겼다. 이는 서수왕따님애기에 대한 대접인 것이다.


자청비와 문도령의 신혼생활

자청비와 문도령은 백년가례를 올렸다.
그들은 자청비의 소원대로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세상에 내려와서 살았다. 홀딱 빠져 서로 죽어라 사랑하며 사는 그들을 모두 부러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잔치에 나간 문도령이, 시샘에 빠진 동네 청년이 준 독술을 받아 마시고 싸늘하게 죽어 말 등에 실려 왔다.

자청비는 황급히 다시 남장을 하여 서천꽃밭으로 찾아갔다.
꽃감관막내딸은 과거보러 간 자기의 남편, 자청비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자청비가 돌아와 기뻐하는 꽃감관막내딸의 눈물 배웅을 뒤로 하고, ‘이제는 나 같은 놈 믿지도 말고 기다리지도 말라’며 또 소매에 꽃을 감추고 자청비는 부랴부랴 문도령에게 돌아왔다.

서천꽃밭에 다녀오는 동안 문도령의 살은 모두 녹아버리고 하얀 뼈만 살그랑하였다.
자청비는 뼈를 제자리에 맞추어놓고 서천꽃밭에서 가져온 살오를꽃, 피가도는꽃, 숨을쉬는꽃을 올려 놓았다. 문도령이 일어났다.


서천꽃밭막내딸에게 사랑하는 문도령을 보내다

자청비는 사랑하는 문도령의 생명을 살린 서천꽃밭과 서천꽃밭막내딸 얘기를 해 주었다.

“그러니 당신은 이제부터는 한 달에 보름동안은 여기서 나와 살고 나머지 보름동안은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서천꽃밭의 따님께 가서 사십시오. 사랑하는 당신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는 건 고통이지만, 그 따님 덕분에 사랑하는 당신을 살릴 수 있었으니,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문도령은 자청비가 주는 반쪽 얼레빗을 가지고 서천꽃밭을 찾아갔다.
서천꽃밭 막내딸과의 새살림은 너무나 달콤해서, 보름만 살고 오겠다던 문도령은 한 달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 중에 몸과 마음이 가장 바쁠 때를 말하다

이 날이나 올까 저 날이나 올까 기다리던 자청비는 편지 한 장을 까마귀 날개에 끼워 보냈다.
문도령은 급한 김에 모자를 쓴다는 게 발목에 감는 행전을 머리에 둘러쓰고, 두루마기는 한 어깨에만 걸친 채 돌아 왔다.
문도령 돌아오는 소리에 자청비 역시 바쁜 김에 풀어헤친 머리를 옆에 있던 짚으로 얼른 묶어 마중을 내달았다.

“낭군님아, 이거 우리 차림새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 기회에 법지법法之法이나 마련하십시다.”
이 때 난 법으로, 사람의 일생 중에 가장 경황이 없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때는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이니, 초상이 나서 성복하기 전에는 남자 상주는 통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는 한쪽 어깨에만 걸치는 법을 마련하였다.

통두건이란 윗부분을 꿰매지 않은 두건으로 문도령이 급한 김에 썼던 행전의 모양이다. 여자 상주는 자청비가 했던 것처럼 머리를 짚으로 묶어매는 법을 마련하였다. 지금도 여자 상주들은 머리에 하얀 무명천으로 머리창을 한다. 


자청비, 하늘의 난을 평정하다

이때 하늘 옥황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 난을 평정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영토를 나눠주겠다는 방이 붙었다. 자청비는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서천꽃밭에서 가져온 싸움꽃을 뿌리니 지들끼리 싸우고, 수레멸망악심꽃을 뿌리니 수만 병사가 쓰러지며 죽어갔다.
난은 평정되었다.


난을 평정한 대가로 땅과 물을 내려주었으나 거절하고, 오곡의 씨앗을 받다

하늘에서는 난을 평정한 대가로 땅 한 조각 물 한 조각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자청비는 사양하고 꼭 상을 내리시려면 땅과 물 대신 오곡의 씨앗을 내려주라 했다.

오곡의 씨앗을 받고 자청비는 문도령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그런데 씨앗 하나가 모자랐다.
도로 올라가 메밀 씨를 받았는데 담을 그릇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속에 입었던 소중이를 벗어 거기에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런 법으로 메밀은 다른 씨앗보다 늦게 뿌리거나 거친 땅에 뿌려도 수확을 하는 강한 곡식이 되었다. 또 여름 장마나 태풍에 농사를 망치게 되면, 그 대신에 뿌려 흉년에도 먹을 수 있게 짧은 기간에 열매를 맺는 곡식이 되었다.

▲ 사랑과 농경의 신 자청비. 제주그림책연구회 초록주멩기 일부

자청비, 농경신이 되다

자청비가 세경 너른 땅에 가보니 정수남이가 배가 고파 휘청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자청비를 만나자 밥을 달라고 사정하였다.
자청비는 저기, 아홉이나 되는 머슴과 소 아홉을 거느리고 밭가는 부농에게 가서 얻어먹어라 하였다. 그 부자는 우리 머슴들 밥도 모자란 판에 너 줄 게 어디 있냐며 욕만 바가지로 해댔다. 보고 있던 자청비는 고약하다 하여 이들에게 흉년을 불러 주었다.

그 곳을 벗어나 좀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가난한 두 늙은이가 사이좋게 호미로 밭을 갈고 있었다. 정수남이가 밥을 달라고 하니 두 늙은이는 자신들은 조금만 먹는다며 밥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밥 먹은 값을 하려고 정수남이는 밭을 씽씽 갈고 자청비는 씨앗을 뿌렸다.
할망이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끼어들었다.
“나도 심심하니 잡초 씨라도 하나 내려 주오. 심심하니 소일이나 하게”
그 때 난 법으로, 농사지을 때는 밭에 잡초가 생기게 된 것이다. 잡초를 매는 것도 농사다.

자청비는 두 가난한 노인들에게, 비록 호미농사를 지어도 대풍년이 되게 해 주었다.
할망이 다시 끼어들었다.
“아니 그렇게 많을 걸 어찌 다 먹습니까? 암쇠에 싣거든 등이 조금 오그라질 만큼이면 됩니다.”
그 때 난 법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데도 겨우 먹을 만큼의 소출만 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문도령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 정수남이는 가축을 돌보는 하세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상세경 문도령은 사계절의 운행과 풍수재해 등의 자연현상을 관장한다. 중세경 자청비는 인간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오곡의 씨앗과 생명력의 대지를 관장한다. <끝>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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