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재일동포 고향 친목회

1960년대 70년대에 제주도를 산 사람들은, 일본 재일교포에게서 도움을 않받은 사람이 있을까? 라고 자문자답해 본다. 친척이 일본 동포로 살고 있으면, 직접적으로 돈과 물건을 받아서 좋아했을 것이며, 친척이 없더라도 간접적으로 어떤 형태이든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필자는 일본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없다. 그러나 간접적인 도움은 받았다. 필자는 제주북초등학교 출신이다. 나보다 37년 선배, 재일동포 김영수(제주 북초등학교, 21회)께서, 김영수 도서관을 지어서 제주북초등학교에 기증했다. 그 기증식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 운동장에 집합을 해서, 기증식을 지켜보았다. 그 김영수님을 일본에서 뵙게 되었고, 처음 뵌지 몇 년이 지난 후, 90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 김영수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기에 간접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다.

필자의 이모님이 재일동포였다. 그런데 우리 이모님은 조총련 소속으로 있어서, 고향을 등지고, 형제들과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가끔 동내 누구네 집에 일본에서 재일동포 친척이 와서 돈도 물건도 주고 하는 것을 보곤 했다. 우리 어머님은 꽤나 부러워 했다.

만약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가 오사까에서 왔다면, 우리 어머님은 꼭 그 사람을 만나서, 우리 언니 아느냐고 묻고서, 제발 민단으로 전향해서 고향에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기별을 하곤 했다.

형제간의 정으로 만나고 보고 싶기에 간절한 기별을 하기도 했지만, 그 기별 속에는 제발 돈도 선물도 많이 가지고 와 주기를 바라는 기분이 더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별만으로 민단으로 전향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조총련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후에 이모님은 결국은 민단으로 전향한 후, 한국에 몇 번을 왕래 하신 후 돌아가셨다.

한국에 오실 때는 우리 어머님 선물이 제일 작았거나 아예 없었다. 아들이 일본에 있기에 아들에게서 좋은 선물 많이 받고 있을 거라고, 우리 어머니 선물은 아예 제외 시켜버려서, 우리 어머님을 노발대발하게 만들곤 했다.

일본에서 제주도를 도와준 다른 형태로 마을 친목회가 있다. 제주도 200∼250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자연 부락의 마을 친목회가 일본에는 약 100여개가 존재 했다.

일제시대 때부터 일본으로 가게 된 경로도 마을과 관계가 깊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친척이 혹은 선배가 일본에 가서 성공을 하게 되면, 그 인연으로 배를 탄다. 또 일본에서 성공한 선배는 후에 온 후배가 혼자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봐주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다.

일도 성공한 선배의 공장에 들어가거나 그 선배의 소개로 일을 하게 된다. 선배와 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고향의 친척 혹은 선후배가 일본에서 와서는 일의 선후배가 되며, 자연스럽게 상하 좌우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일도 제주도 마을 단위로 되는 경우가 있다. 애월읍 고내리 출신들은 東京에서 가방 일을 많이 했다.

서귀포 법환리 출신들은 오사카에서 고무 일을 많이 했다. 고내리 출신 가방, 법환리 출신 고무, 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고향 마을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관계 속에 나이도 들고, 성공해서 재력도 갖춘 어른이 '다들 모여라' 라는 명령 하나에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며, 이 모임이 곧 동내 친목회가 되며, 일본에 약 100여개가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70년대 한국은 못 살았다. 당시 일본은 천국처럼 보였고 우주처럼 보였다. 일본에서 온 교포들의 얼굴은 금빛으로 빛났고, 천국에서 왔는지 우주에서 왔는지, 또 가지고 온 돈과 일제 선물에 우리들은 그 앞에서 맥을 못 추었다. 그런 금빛 교포 한번 해보려고 목숨 건 밀항을 하다 중간에서 죽기도 했고, 걸려서 오무라 수용소도 갔으며, 몇몇은 성공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에 온 사람을 1세대라고 한다. 1세대에서 태어난 사람은 2세대가 된다. 지금은 4세대, 5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1세대의 고향은 한국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태어난 2세대부터 그 다음 세대의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이 일본이라, 일본이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1세들, 특징이 있다.

일본말 다 배워서 일본 배 탄 사람 없다. 일본 와서 일본 말 배우지만 서툰 일본말만 쓰다가 죽는다. 돈 가지고 온 사람 한사람도 없다. 무일푼으로 맨몸 하나로 맨땅에 헤딩하면서, 돈도 벌고, 자식 공부도 잘 시켜 의사도 만들고, 돈 잘 벌어 사장도 된다.

처음에 일본 갈 때는 영원히 일본 살리라고 생각한 사람, 한사람도 없다.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 한국에 돌아와서 부자로 잘 살리라고 생각하면서 일본 배 타지만, 돌아온 사람 거의 없다. 밀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걸리는 날에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국으로 와야 된다.

마음은 항상 제주도 고향 마을에 가 있다. 눈 감으면 고향마을 바다가 보이며, 어머님 생각에 형제들 생각에,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노라면 눈물이 먼저 앞을 가려, 노래는 엉망이 되고 만다.

고향 마을에 무엇인가 큰 것 하나 만들어 놓고 싶다. 큰 재산도 만들어 놓고 싶고, 마을에도 큰 것 하나 기부해, 고향동네에 기여하고 싶다. 이렇게 큰것 하나 만들어 기부하면, 본인은 말 할 필요도 없지만, 고향에 있는 부모나 형제들이 더 목이 힘이 들어가게 된다. 오히려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들이 더 강요 할는지 모른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돈이 필요로 할 때는, 고향 마을 이장은 제일 먼저 일본에 있는 마을 친목회 회장에게 우는 소리를 보낸다. 회장의 솔선수범, 큰돈을 먼저 내 놓고 다들 모이라고 호령 하나에 아주 자연스럽게 모여, 고향으로 보내지게 된다.

이쯤되면 마을사람들이 일본 회장님의 집 앞을 건너 갈려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되며, 새해 첫 인사로 읍면장이 제일 먼저 일본 회장님의 부모님에게 새배를 가야 된다.

1960년대 70년대, 마을에 수도가 들어갈때 전기가 들어갈때, 각 주민의 개인 분담금도 또 마을 분담금도 있었다. 또 70년대 새마을운동 때도 마을 길 확장및 포장에 정부의 보조도 있었지만, 마을 분담금도 있어야 공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마을 분담금을 일본 마을 친목회가 보내주는 마을은, 다른 마을보다 먼저 수도가 들어가고 전기가 들어가며, 밤길 걷기 좋은 포장도로가 먼저 들어서게 된다. 일본에 마을 친목회가 있는 마을과 친목회가 없는 여기서 차이가 나게 되며, 마을 친목회가 없는 마을은 우리 마을 출신은 교포도 없네, 라며 한숨을 지게 된다.

그것 뿐 인가? 자기가 졸업한 모교에도 후배들이 공부 잘 하도록 부족한 물품 하나 보내줄려고, 눈여겨보게 된다. /신재경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세이비(成美)대학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