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산 사막의 끝자락 단애를 파낸 막고굴의 석굴들. ⓒ양기혁
막고굴 북대불전(北大佛殿), 제96호 굴 ⓒ양기혁
막고굴 앞의 인공 수로 ⓒ양기혁
막고굴 앞의 인공 수로 ⓒ양기혁
막고굴 인근의 사막에서 바라본 풍경 ⓒ양기혁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9 천년의 원형 보존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엿보다

아침 9시가 되어서 둔황에 도착했다. 인적 없는 사막 한가운데 덩그맣게 지어진 둔황역은 지은 지 오래지 않은 깨끗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역은 시내와 많이 떨어져 있어서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역을 나서자 광장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고, 호객꾼들이 몰려들어 관광객들을 맞는다.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내일 가야 할 우루무치 기차표를 알아보기 위해서 표 파는 곳으로 가는데 한 청년이 졸졸 뒤를 따라오면서 말을 건다. 창구 여직원은 여기선 우루무치 가는 기차가 없고 류위안이라는 곳을 가야 하는데, 둔황에서 두어 시간을 버스 타고 나가야 한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 돌아서는 나에게 뒤따라오던 청년이 택시를 불러준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 어차피 타야 해서 다가온 택시에 올랐다. 택시기사 외에도, 옆자리와 뒷좌석에 중년 여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족이거나 일행으로 보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기사는 검정색 일색이었다. 검정색 점퍼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어서 언뜻 험상궂게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는흰 이를 드러내 보이는 웃음을 웃으며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 쓰여 있는 이름은 ‘뤄더홍’, 한국 발음으로는 나덕홍(羅德紅)이다.

우선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 택시를 탔는데, 뒷자리 내 옆에 앉은 여인이 계속하여 둔황을 일일 투어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좀 얼떨결에 받아들이고 말았다. 투어요금 150원. 관광객이 많지 않은 비수기인 점을 감안하면 흥정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그 택시로 투어하기로 하고, 기사에게 내일 가야 할 우루무치 기차표를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오늘 머물 숙소를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호텔 두 곳 중 어느 곳이 나을지 물어봤다.

뤄더홍이 둔황 시내의 기차표 파는 곳에 택시를 세워서 우루무치 가는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모레 새벽 한 시 류위엔을 출발하는 기차다. 새벽 한 시에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게 좀 난감하기도 하고, 떨떠름한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표가 그것밖에 없다는데.

그리고 기사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호텔 중 하나인 훼이티엔빈관으로 가서 나를 내려주었다. 투어를 한 시간 뒤 11시에 시작하기로 하고 블랙 뤄더홍은 차를 돌려 가버렸다.

▲ 막고굴 앞의 인공 수로 ⓒ양기혁

 

▲ 막고굴 앞의 인공 수로 ⓒ양기혁

별 세 개가 그려진 호텔 테스크의 여직원에게 도미토리 빈방을 줄 수 있는지 묻자 하나 남아 있는 방을 내주었다. 여직원은 나에게 6인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방은 달랑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는 2인실이었다.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방과 따로 떨어져있는 불편은 있지만, 깔끔한 트윈 베드가 놓여 있는 호텔방이라니, 오랜 만에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 안쪽 침대 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밖으로 나가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들어왔는데 그사이 비어 있던 남은 침대 하나에 짐이 놓여 있었고, 곧 한 사람이 세면장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방으로 들어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장발에 키가 훌쩍 큰 그는 일본인이었는데, 매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반면 중국어는 거의 할 줄 몰랐다. 대화는 영어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 그의 이름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한자를 잘 못 쓴다고 하면서 서툴게‘鈴木大輔’라고 쓰고, 내가 히라가나를 읽을 수 있다고 하자 그 밑에‘すずきたいすげ(스즈끼 다이스께)’라고 썼다. 나도 그가 내민 수첩에 한자로 내 이름을 쓰고, 영어로 한글 발음을 써줬다. 내가 시안에서 기차를 타고 조금 전 여기 도착했다고 말하자 자기는 베이징에서 출발해 시안에서 기차를 갈아탔다면서 우리가 같은 기차를 타고 온 것 같다고 말한다.

곧 택시로 일일 투어를 나가야 하는데 같이 가자고 권했다. 어쩌면 그는 공짜로 돈황 투어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기차여행이 몹시 힘들었고 피곤하다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워버린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보니 택시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아침의 그 남자가 아니라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는 곧 택시를 출발시켜 막고굴(莫高窟)로 향하였다.

▲ 명사산 사막의 끝자락 단애를 파낸 막고굴의 석굴들. ⓒ양기혁

금세 시내를 벗어나 주위가 온통 황량한 사막 속에 외롭게 뻗어 있는 아스팔트 길을 한참을 달려가니 택시의 오른쪽 창으로 석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운전하고 있는 여자에게 잠시 차를 세우고 멀리 보이는 석굴을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고 했더니 여기는 관람이 금지된 곳 이라 안 된다고 한다. 차를 계속 몰고 가서 나무들과 푸른 숲이 가꾸어지고 현대식 건물들이 지어진 곳에 이르러 차를 세운 여자는 나를 내려주고, 두 시간쯤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고는 차를 돌려 가버린다.

막고굴 입장료는 80원인데, 외국어 해설료를 20원 더 내야 했다. 찾아온 관광객은 모두 중 국사람들이라 중국어 해설자와 함께 들어갔지만 나는 혼자서 한국어 해설자가 올 때까지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얼마 후 나타난 해설자는 미모의 중국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소개하면서 중국인이 고 북경에서 한국어를 배웠는데, 좀 서툴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였다.

▲ 막고굴 북대불전(北大佛殿), 제96호 굴 ⓒ양기혁

그녀를 따라 들어가 몇 개의 굴을 보면서 한국말로 하는 해설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말이 서툰 정도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처음엔 내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확인하기 휘해서 중국어로 그녀와 대화를 시도하였는데, 그녀는 중국어로 대화하기를 거부하였고 내게 중국어를 하지 말라고 제지하기까지 했다.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가기만 하였다. 사실 이곳 1000여 개의 석굴로 이루어졌다 해서 천불동(天佛洞)이라 불리는 막고굴과 그중의 한 석굴인‘장경동(藏經洞, 17호 석굴)’에서 발견된 방대한 양의 경전과 문서들을 해설하는 일은 고대 역사와 불교경전에 대한 많은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말을 알아들었다 해도 배경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워보였다. 20세기 초에 발견된 장경동 경전과 문서로 인해서 고대 역사와 언어, 고대의 여러 종교와 미술사, 고고학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새로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성립된 ‘돈황학’에 대해 서 나중에 별도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관람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 막고굴 인근의 사막에서 바라본 풍경 ⓒ양기혁

막고굴 앞은 원래 강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명사산(鳴沙山)과 삼위산(三危山) 사이를 흐르던‘대천하(大泉河)’라고 하는 하천이다. 돈황의 천불동, 즉 막고굴은 대천하의 좌측에 있는 명사산 사막의 동쪽 끝 단애인 절벽을 따라 파들어간 석굴군으로, 길이 약 1.6km에 이르며, 1000여 개의 석굴이 있었으나 현재는 492개의 석굴이 남아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관람이 허용되는 것은 고작 10여 개 정도이며, 석굴 내부의 촬영은 일체 금지되었다.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천년이 넘는 동안 원형을 유지해온 석굴들이 빠르게 훼손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일반인에 대한 개방을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강은 말라붙어서, 인공 수로에 의해서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주변은 바닷속에 떠있는 섬처럼 사막 속의 푸른 숲을 가꾸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며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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