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아라동 입구 고개를 빼꼼 내민 '간드락' 간판.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간드락 소극장.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새작품 공연을 앞두고 손수 홍보 DM을 만들고 있는 자파리 연구소 팀원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간드락 소극장, 그 지난 이야기를 떠올리면 눈물이 먼저 쏟아진다는 오순희 대표.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오순희 대표도 자파리 연구소 팀원들의 작업을 거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동생 돕던 누나에서 여기까지 오게 됐죠" 간드락 소극장 오순희 대표

 

▲ 제주시 아라동 입구 고개를 빼꼼 내민 '간드락' 간판.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 간드락 소극장.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제주시 아라동 입구, 올망졸망 낮게 지어진 건물들 사이 소담한 간판이 고개를 내민다. 너른 마당을 가로지르면 항아리에 가지런히 쓰인 문구가 사람들을 반긴다. 그렇다. 여기는 ‘간’, ‘드’, ‘락’, ‘소’, ‘극’, ‘장’이다.

2004년, 교회 건물을 뜯고 덮고 붙여 만든 이 조그만 극장은 많은 이들에게 상징적인 장소로 꼽힌다. 제주시내에 단 세 곳뿐인 소극장이자, 쉼터이자, 상영관이자, 아카데미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창작극을 봤던 어린이들에겐 ‘애벌레가 사는 곳’이고, 장기하의 공연을 봤던 젊은이들에겐 ‘공연장’이며 오다가다 들러 차 한 잔 마셨던 동네주민에겐 ‘카페’다.

이 공간의 탄생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변방의 섬 제주에서 문화에 목말랐던 친구 셋이 제주도내 문화 테러를 꿈꾸며 ‘Terror J’라는 팀을 꾸리게 된다. 거리의 모든 곳이 무대였다. 때로는 미친 척 머리에 꽃을 꽂고 무작정 걸었다. 아예 ‘공연 노마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섬 안팎을 떠돌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길 5년. 이들은 달이 뜨는 마을에 이르게 됐다. 마음속에서 그렸던 ‘집’이라는 이미지와 꼭 맞아떨어졌다. “여기구나” 드디어 제자릴 찾은 이들은 ‘간드락 소극장’을 열었다. 처음엔 무대와 객석이 전부였다. 공연장비가 없어 주변에서 조명장비와 음향장비를 빌려 공연을 진행했다. 꼬박 2년을 들여 살림을 채워가듯 공간을 꾸려나갔다.

이 공간은 모던하다던가, 세련됐다는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마당엔 낙서가 가득인 평상이 떡 버티고 누워있고, 하다못해 폐품도 여기선 작품이 된다. 두루마리 휴지심에 눈코입 그려 넣고 그럴싸한 장식품으로 변모한다. 어느 것 하나 사람 손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문화 집단 테러J(자파리 연구소)를 이끌며 <뽕똘>, <어이그 저 귓것>, <이어도> 등으로 이름을 알린 오멸 감독(오경헌). 그가 일을 벌일 때 마다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네 살 터울의 누나 오순희(46)씨다. 어릴 적부터 용돈은 물론 오 감독이 하는 일이면 뭐든 뒤에서 돕곤 했던 누나는 2010년, 덜컥 극장 운영까지 맡게 됐다.

▲ 새작품 공연을 앞두고 손수 홍보 DM을 만들고 있는 자파리 연구소 팀원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 오순희 대표도 자파리 연구소 팀원들의 작업을 거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오 대표는 이를 두고 ‘뒤치다꺼리’라고 표현했지만 그녀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었다. 그녀 또래 여성들이 흔히 그렇듯, 두 남동생의 ‘앞날’을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사회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그녀 역시 예술학도를 꿈꾸던 여고생이었다. 딸·누나 노릇, 어린 나이에 결혼해 아내·엄마노릇을 해야 했기에 오 대표는 동생을 통해 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두 동생 중에서도 유달리 오 감독과는 코드가 잘 맞았다고 했다. 감성이나 기질이 비슷한 탓이었다. “경헌이가 대학 다니던 때 퍼포먼스를 한다고 해서 ‘보러간다’ 통고도 않고 몰래 보곤 했다. 그걸 보면서 내가 하지 못했던 걸 대리만족했던 거다. 보면서 많이 울기도 했다. 내가 못한 말들을 얘가 해주고 있어서….”

친구 셋이 모여 테러J를 한다고 했을 때, 동생들이 밥도 못 먹고 있으니 밥이나 먹으라며 챙겨주기 시작했던 게 어쩌면 이 길을 걷게 된 시작이었다. 거리예술제가 해를 거듭하며  규모가 점점 커졌고 조금이라도 경비 줄이려고 밥 하러 나섰다. 공연하러 온 일본 예술가들에게 통역을 해주기도 하고, 그렇게 오 대표 역시 제 역할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남매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도 내 존재는 ‘누나’일뿐이지 그들 사이에선 예술에서는 뭣도 모르는 사람이었을 거다. 필요할 때마다 홍보를 해주기도 하고, 밥을 하기도 하면서 그런 역할을 해왔지만 가족관계가 되다보니 거창한 자리를 맡을 생각은 못했다”던 그녀. 

“예술가들이 갖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라던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에 서투르다. 그래서 이 친구들의 활동을 받쳐줄 매니지먼트가 필요했다” 그렇게 조금씩 깊게 관여하다 보니 이들에겐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제주의 여성들이 그렇듯 그녀도 손놀림이 빠르다. '야무지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말도 거침 없이 쏟는다. 욕도 곧잘 쓰지만 얻어먹어도 전혀 기분나쁘지 않은 욕이다. 그녀의 말 속에 진심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마귀할멈'이라는 별칭도 붙었지만 그녀 역시 개의치 않는다.  

▲ 간드락 소극장, 그 지난 이야기를 떠올리면 눈물이 먼저 쏟아진다는 오순희 대표.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그녀 덕에 간드락 소극장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경계가 허물어졌다. 연극뿐만이 아니라 노래하고 싶은 이들에게 무대를 내어주기도 했고, 창작 활동에 열 올리는 젊은 작가들에겐 ‘전시 공간’으로, 오며가며 만난 이들이 서로 사는 이야길 터놓는 ‘마당’으로, 때론 외부에서 강사를 모셔와 청소년들의 꿈을 틔워주는 ‘교실’도 되었다.

“그 전(오 대표가 극장 운영을 맡기 전) 극장이 폐쇄적이었다. 이걸 깨고 싶었다. 2004~2007년 사이. 작품 하나가 잘 돼서 대박은 일으켰지만 그 공연이 끝나면 다른 발걸음이 별로 없었다.”

특히 오 대표는 ‘청소년’을 위한 역할을 강조했다. 학교가 밀집된 동네이기에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 소극장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감성적인 부분을 키워줄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청소년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찾아보려고 한다. 오 감독도 공감하는 바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침 그녀의 딸, 조은(22)씨가 공연을 마치고 간드락으로 돌아왔다. 조 씨는 자파리 연구소 소속으로 연극 활동을 펼치며 엄마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 애들이 고1, 고3때 자퇴시켰다. 이 때문에 ‘또라이’소리도 많이 들었다. 나는 내가 학교 다닐 적에 지금의 기성 교육제도에 내가 불만이었기에 주저 없이 학교를 그만 두라고 했다. ‘내가 이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너도 따라와라’가 아니라 재능이 있어 보여 시켰고, 잘 따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하진 않다고 하던데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즐겁게 살고 싶은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자파리 연구소의 뭍 나들이가 늘어나면서 간드락 소극장과는 따로 떼어진 개념이 됐지만 그녀에겐 똑같이 ‘자식’과 마찬가지인 존재다. 테러J 때부터 무려 14년 간 지켜봐왔던 그녀다.

“이 애들을 떠올리면 항상 눈물이 난다. 밤새서 손수 만들고 꾸리고 연습하고…. 어린 친구들이 아무리 자기가 좋아서 한다지만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또 지나고 나면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희희덕 웃고. 지금 상황에서 보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안에서 엄청나게 큰 것들이 만들어져 있다 그걸 지켜보는 게 감격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달이 뜨는 마을 ‘간드락’, 누군가의 꿈을 펼칠 무대로 이만한 곳이 있을까. 그러나 간드락에서 다른 곳으로 소극장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문화에 관심 많은 건물주의 배려로 8년 간 터를 지켜왔지만, 제때 집세 건네준 적 없는 이들이 마냥 예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간드락' 소극장이 간드락이 아니면 어딜 간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대로 눌러앉자니 주머니는 텅 비었고, 오 대표의 고민이 깊다.

“이쪽에 문외한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전문인이라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하고 싶고, 펼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간드락을 지켜내고 싶고, 또 지켜낼 거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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