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간 오이를 꾸려가는 전혁준 행정팀장(28.왼쪽)과 오현수 기획팀장(32.오른쪽).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동생인 혁준 씨가
세 남자중 가장 어린 막내 혁준 씨. 현수 씨는
제주시 삼도2동 동사무소 맞은편에 위치한 예술공간 오이.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예술공간 오이의 개관 기념 공연 '관리인'의 한 장면(사진출처=예술공간 오이 공식사이트 art52.net)

중앙로에 문 연 예술공간 '오이', "'경계없음' 무기로 제주 대표 공간이 꿈"

▲ 제주시 삼도2동 동사무소 맞은편에 위치한 예술공간 오이.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여자 셋이 모이면’이라는 문장의 시작에는 ‘접시를 깬다’가 따라붙는다. 반대로 ‘남자 셋이 모이면’이라고 운을 떼니 “술판이 벌어지죠”라는 답이 돌아온다.

▲ 예술공간 오이를 꾸려가는 전혁준 행정팀장(28.왼쪽)과 오현수 기획팀장(32.오른쪽).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과연 술판만 벌일까. 제주지역 문화판에 새싹을 틔운 세 남자가 있다. 구도심 중앙로에 ‘예술공간 오이’라는 이름을 내건 소극장을 연 오상운 대표(38)와 오현수 기획팀장(32), 전혁준 행정팀장(28)이 주인공이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몇몇 사건이 그렇듯, 거사는 ‘술자리’에서 비롯됐다. 오상운 대표가 “소극장 비슷한 걸 해볼까 하는데…, 같이 해보겠냐”고 묻자 오현수 팀장은 흔쾌히 “좋다”고 대답하고선 진담 반 농담 반쯤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농담 아니니 장소 찾아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중앙로 구도심에 빈 건물이 많다는 소식을 접해들은 현수 씨가 주변을 기웃대다 삼도2동 동사무소 바로 맞은편 건물 지하1층 빈 공간을 발견했다. 지금은 시청으로 옮겨간 뮤직 바 , 도어즈(Doors) 옛 자리다. 방대한 레코드 보유량 덕에 그 어떤 노래도 들을 수 있는 데다  때로는 소규모 공연이 열려 마른 목을 적셔주며 1990년대~2000년대 제주의 대표 음악공간이었다. 술값까지 저렴해 지갑 얇은 대학생들이 왁자지껄 모여들던 곳이다. “자주 들락대느라 많은 추억이 얽힌 곳이기도 하고 규모도 딱 적당해서 낙점하게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공간 오이’는 오 씨 성을 가진 두 청년이 모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둘을 뜻하는 이(二)가 아니라 다를 이(異)다. “본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라고 현수 씨가 농담처럼 답한다. 얼핏 듣기엔 ‘얼렁뚱땅’ 대충 지은 이름 같지만 세 청년들의 자세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 동생인 혁준 씨가 "현수 형은 말수도 없고 과묵한 편"이라고 하자 현수 씨가 "드러나게 일 하는 타입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킬 줄도 잘 몰라 문제에요"라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연극동아리 출신이긴 하지만 앞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건 단지 연극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공간을 ‘극단’이 아닌 ‘예술공간’이라 칭한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오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고 나서야 합류하게 된 막내 혁준 씨. 학교를 쉬고서 공부 한다며 서울 올라가 방황하다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려고 제주에 내려와 있던 참에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세 남자가 모이게 됐다.

이들의 첫 만남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준 씨는 통신공학과 새내기였고, 현수 씨는 막 제대한 복학생이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큰형님 상운 씨가 동생들에게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건 작품 준비하느라 학교 후문에서 자취하던 오 대표의 집에서 한 달간 합숙하면서다.

▲ 세 남자중 가장 어린 막내 혁준 씨. 현수 씨는 "뒤끝 없고 털털한 동생"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형·동생 한지가 8년이다 보니 서로 훤히 꿰다시피 너무 잘 알아서 부딪힐 일은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편하다. 형들이 봐줄 때도 많다”고 막내 혁준 씨가 넉살스레 대답했다.

터울 많은 이들을 한데로 묶은 건 ‘연극’이라는 교집합 덕분이다. 셋 다 연극인을 꿈꿨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대에 오게 됐다. 학교에 연기를 가르치는 수업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제 갈 길은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했다. 동아리가 이들에겐 빛줄기와도 같았다.

1984년 창단된 극예술연구회는 웃고 떠들다 마는 시시한 대학 동아리가 아닌 나름 ‘고퀄리티’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동아리는 어디까지나 동아리,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게다가 문화불모지라 불리는 이곳 제주에서 ‘연극’의 길을 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숱한 선택지 앞에서 결국 이 길을 택하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운 씨는 대학원 다니면서도 쭉 동아리 활동에 관심을 쏟고 있었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연극에 미련을 못 버려 이 공간을 꾸리게 됐다. 혁준 씨도 수년의 방황 끝에 통신공학이라는 전공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극작가를 꿈꾸며 현재 사이버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다.

반대로 현수 씨는 전공(사학과) 보다 늘 ‘동아리’가 먼저였던 케이스다. 학교를 쉬고 서울 대학로에서 2년 간 연극에만 매달리기도 했다. 때로는 방송국 단역으로도 활동하며 꾸준히 ‘연기’의 길을 걸었다. 

술과 음악으로 청춘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지역밴드들의 연습실로 쓰였던 이 공간은 세 남자의 손을 거쳐 예술공간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소만 죽어라 하다’ 지난해 12월에 문을 열었다. 30석 남짓한 작은 규모지만 관객과 소통하기엔 더없이 알맞다.

▲ 예술공간 오이의 개관 기념 공연 '관리인'의 한 장면(사진출처=예술공간 오이 공식사이트 art52.net)

4개월 부지런히 개관 기념 공연을 준비해 4월 7일부터 5월 27일까지 8주간 매 주말 이틀씩 헤롤드 핀터의 2인극 ‘관리인’을 무대에 올렸다. 첫 공연엔 4명의 관객이 앉았지만 마지막 공연엔 객석이 가득 들어찼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혁준 씨와 현수 씨는 ‘기분 좋은’ 시도였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이 내세우는 정체성은 ‘경계없음(Borderless)’이다. 예술공간 오이는 세 남자뿐만 아니라 40여명의 단원들이 함께 한다. 2인극 외에도 다양한 포맷을 내놓으며 재미있는 구상을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순수하게 연극만 한다면 오히려 발목 잡히거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무대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기에 공연할 곳 없는 고등학교 밴드 공연을 기획해주거나 사진 그림 연극 음악을 버무려낸 퍼포먼스도 선보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앞으로 꿈을 물었다. “택시 타고 ‘예술공간 오이’에 가달라고 하면 알아서 가주는 그런 날이 오는 게 꿈이에요”라고 혁준 씨가 답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서 너나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공간, 지역과 밀착해 나가고 싶어요”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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