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강정문제를 미국, 전 세계에 알리는 파이프라인을 한 고길천 작가. 지난 4~5월 미국에서 두 차례 개인 전시회를 마치고 온 그를 만나 저항의 미술, 강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 제주의소리
<이재홍이 만난 사람> 미국에 강정을 물들인 고길천 작가

강정에 들어설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해군기지가 종국에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고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점을 든다.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태평양전략 전초기지로 강정이 있어,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제주가 전혀 예상치 못한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염려한다.

물론 정부는 이 시나리오에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정작 이런 우려를 뒷받침 하는 건 놀랍게도 미국에서 나온다. 미국 언론으로부터 ‘미국의 지성이자 얌심’으로 불리는 노암 촘스키 MIT 명예교수는 강정이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새우가 될 수 있음을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경고한다.

지난해 9월 노암 촘스키가 강정을 언급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좁게는 제주, 커봐야 대한민국내 진보와 보수세력간 이슈에 불과했던 강정 문제가 글로벌이슈로 부각됐다. 미 언론이 강정을 보도하고 국제적인 평화활동가들이 연대와 지지를 보내는 국제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엔 지독히 제주를 사랑했고, 부당한 현실을 작품으로 고발해 온 저항작가 고길천 화백의 노력이 지대했다. 아니 노암 촘스키 관심사에 강정, 제주를 붙들어 매게 한 건 순전히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탐라미술인협회 회원인 그는 20년 가까이 4·3을 그리면서 꾸준히 부당한 사회 현실을 고발해 왔다. 그런 고 작가에게 강정이 눈에 들어온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제주사람으로서 부당한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10여년전 4.3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우연히 책에서 본 노암 촘스키를 떠올렸고 그 때부터 촘스키에게 영문으로 된 4.3자료를 계속 보냈다. 그렇게 3년여가 흘렀을까 “4.3의 백그라운드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촘스키의 예상치 못한 답장이 왔다. 그렇게 촘스키와의 인연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강정 문제가 터지고 이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키고, 국제적 연대가 필요해지자 그는 다시금 촘스키에게 강정을 이야기했고 촘스키는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사를 확실히 밝혀왔다.

지난해 9월과 올 5월 그는 두 차례나 미국으로 건너가 노암 촘스키를 직접 만나 강정에 관한 매주 중요하고도 든든한 국제네트워크를 쌓기 시작했다. 첫번째 만남이던 지난 9월 갑작스런 만남이었지만 그는  미국 대학 네 군데를 돌며 자신의 작품세계 ‘저항의 미술’을 이야기하며 강정문제를 미국 사회 이슈로 밀어 넣었다. 차분한 설득이었지만 사실은 제주에 자신의 군사기지를 건설하려는 패권국가 미국에 대한 우렁찬 고발이었다.

미 ‘Occupy Wall Street’와 대추리에서 현장 행동예술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고 작가는 지난해엔 전국의 예술인들을 강정으로 불러 모아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예술행동 프로젝트 ‘동행2’를 조직하며 '붓'하나로 거대 국가권력에 맞섰다. 지난해엔 한겨레신문으로부터 ‘올해 주목받는 화가 12인’에 선정됐다.  “작품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라며 못내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는 자신을 행동에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는 “개인적으론 내 자신을 배반할 수 없다. 나한테 솔직해야 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내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미국 화랑 초청으로 시애틀과 샌타로사서 개인전시회를 위해 4~5월 미국에 머물면서도 그의 관심은 강정이었고 고 작가 머리를 가득채운 건 구럼비였다.  전시회를 하는 와중에도 강정에서 벌이지는 일들을 미국에 알렸고, 국제적 지지 연대 움직임을 강정으로 전해왔다.  2개월 미국 전시를 마친 지난 1일 고향에 온 그를 6일 <제주의소리>가 만났다.

▲ 지난해 전국의 예술인들을 강정으로 불러 모아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예술행동 프로젝트 ‘동행2’를 조직한 당시 만든 고길천 작가의 작품.
- 4~5월 2개월동안 시애틀과 샌타로사에서 두 차례 초대 전시회를 열었다. 'bird series'. 새를 주제로 한 작품인데, 언제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다. 새만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는 별로 없어 보이는데.

“2001년부터 새를 가지고 제주도 습지 기행을 다녔다. 그때부터 생태 쪽 작업을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하도리 철새도래지에서 작업을 했다. 말하자면 ‘비주얼리포트’ 즉 시각보고서 같은 개념이다. 정기적으로 가서 답사하고, 철새 깃털이 있으면 수집하고 깃털로 꼴라주도한다. 2001년만 그때만 해도 하도리가 꽤 크고 새도 많이 왔는데 갈 때 마다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건물이 들어서면 그만큼 서식지가 줄어드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다. 철새들의 자유의지가 박탈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예술인, 또는 그 작품을 보면 대부분 자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세상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자기 나름대로 자유의 의지와 권리가 있는데, 일방적으로 인간만이 그 의지를 갖고 다른 동물들은 그 권리를 박탈당한다. 그것에 대한 작업이다.”

- 이번 초대 전시회 말고도 예전에도 한 두 차례 미국에서 전시회를 연 것으로 아는데.

“시애틀 근방 차로 한 시간 거리에 포타운젠 도시가 있는데 특히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 2003년과 2009년에 레시던시 프로그램으로 두 차례 다녀왔는데, 2009년에 갔을 때 그곳 화랑에서 내 작품을 보고 개인 전시회를 하자고 해서 이번에 이뤄지게 됐다."

- 고 작가 작품세계에 대한 현지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시애틀에선 8점, 산타로사에선 9점 전시했다. 시애틀에선 나 혼자 일찍 하려고 계획됐었는데 4월에 ‘earth day’가 있다고 해서 그 주제와 비슷한 작가들과 함께 하자고 조정되면서 4월로 늦춰지고 3명이 함께 하게 됐다. 그곳 사람들은 환경이나 자연 이런 주제에 굉장히 예민해 한다. 서로 다른 문화권이긴 하지만 서로가 공감한다.”

“내가 강정에 꽃힌 이유는!  제주사람으로 부당함에 부당하다고 말할 뿐”

- 작가라고 하면 작품, 작품세계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최근엔 무게 중심이 강정을  옮겨졌다. ‘붓 하나로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펼치는 작가’라고 말한다. 강정, 강정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작가로 더 많이 인식되고 있다. 작가로서 이런 시각이 부담스러울 때는 없나.

“너무 멋있는 말을 써줬다. 내가 무슨 검객이나 사무라이같이...나는 단지 심부름한 것뿐이다. 거기서 작업했던 작가들이 다 같이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 나한테만 붙여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 한편으론 (저항 작가라는 게) 부담스럽다.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가 규정짓는 게 많다보니 그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난 작업만 하면 된다. 주위에서 평화활동가라고 붙이는데 거기에 대해선 실감나진 않다. 그냥 제주사람으로서 부당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다.”

-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강정에 꽃혔다고 해야 하나? 고 작가가 강정에 꽃히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그렇다. 강정에 꽃혔다. 내가 탐라미술인협회 회원이고, 94년부터 20년 가까이 해마다 4.3미술제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도 알고 작품도 발표해 왔다. 강정에 대해 당연히 관심 가질 수밖에 없다. 부당함에 대해 당연히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 고길천 작가는 '저항작가'란 표현에 다소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그저 제주사람으로서 부당한 현실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 제주의소리
- 지난해에는 강정에서 탐미협이 중심이 돼 전국의 작가들과 함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예술행동 프로젝트 ‘동행2’를 기획했는데 어떻게 그런 기획을 하게 됐나.
 
“2007년도 평택 대추리에 딱 하루 24시간 갔다 온 적이 있다. 4.3 미술제 준비를 하는데 대추리를 담고 싶었다. 대추리는 미군의 문제인데, 4.3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24시간 머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예술작품이 서있고, 폐가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시도 써 있고 다양한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아! 현장 미술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그 상황, 공감 모든 것을 작가가 인식해서 작업하는 것을 느꼈다. 이걸 강정에서도 하자, 전국 작가들을 끌어 모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전국 미술인들 예술가들이 다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작가는 대나무 작품을 하는데 재료비만도 수백만원이 들었다. 그런데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 문화란 게 참 중요한 것 같다. 강정이야기를 하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데 그럴 때 문화.예술은 참여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

“문화예술은 굉장한 힘을 갖고 있다. 글로 된 것은 정보전달의 의미가 있지만 그림은 시각적인 전달 매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가슴을 움직인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노암 촘스키 박사와 제일 처음 인연을 맺은 것도 4.3 미술이었다. 전혀 응답이 없다가 4.3 자료 보내주니 연락이 왔다. 예술의 힘이 대단하단 걸 느꼈다.”

- 인간 본연의 심성이기도 하지만, 작가들의 작품세계란 게 세상의 불의에 맞서려는 인간 본연의 뭐가 있나.

“어떻게 보면 예술의 본질이다. 예술이란 게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가는 것이다. 내가 그리고 만들어갈 대상이 무엇인가,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존재의식을 확인하거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예술을 하는데, 그 근본은 대상에 대한 진실을 끊임없이 찾는 것이다. 그래야 상상력이 나온다. 강정도 마찬가지다. 과연 강정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시작된 것이다.”

4.3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암 촘스키에게 10년전 자료 보낸게 인연 

- 강정에서 고 작가가 소중한 역할 했다. 강정문제는 지금까지 제주, 아무리 커봐야 한반도 반쪽 남한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를 미국,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파이프 역할을 고 작가가 했다. 특히 세계적 석학인 미 MIT 명예교수 노암 촘스키와의 만남이 아주 결정적이었다. 그와 어떤 인연이 있나.

“10년 전 제주 4.3으로 서로 알게 됐다. 그가 쓴 책 중에 미국이 제3세계에서 자행한 테러에 관한 책이 있는데 거기에 4.3에 대해 한 줄 언급한 부분이 있다. ‘한반도 남부 섬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서 ‘제주도’라고 표현이 됐다. 노암 촘스키가 미국의 테러로 4.3이 일어났다는 걸 처음으로 알렸다. 미국인의 입으로...그 책을 읽고 나서 ‘4.3에 대해 우리나라도 잘 모르는데 세계는 당연히 모를 것이다. 이를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암 촘스키가 이야기 해 주는 거다’란 생각에 1998년부터 그 분에게 4.3관련 영문자료를 보냈다.”

▲ 노암 촘스키는 지난 5월 두번째로 고길천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강정 구럼비의 상징인 노란 셔츠를 입고 피킷을 들어 우근민 제주지사에게 해군기지 공사중지 명령을 내길 것을 요구했다.
- 그럼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된 것인가. 결국은 4.3이 서로를 연결시켜준 셈이 됐는데. 

“처음부터 답변이 온 건 아니다. 답변을 원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다 탐미협에서 4.3 50주년 미술제를 하면서 작품집을 보냈는데 그 때 처음 반응이 왔다. ‘나는 4.3의 백그라운드를 알고 있다. 4.3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 제주에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국제정세 카테고리로만 해석 한다. 미국이 제3세계에서 어떻게 테러를 했는지 큰 테두리에서 보지만, 구체적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모른다. (내가 보내준 작품을) 보면서 제주도에 관심이 생겼을 거라 생각한다. 그 때부터 인연은 됐고 1년에 한번 자료를 모아 연말에 한번 보내면 답변이 올 때도, 안 올 때도 있다. 그러다가 재작년에 강정에 대해 보냈다. 그런데 메시지가 왔다. ‘연대하고 지지한다’고.”

- 고 작가와 노암 촘스키와가 나누는 주제가 4.3에서 재작년부턴 강정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는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그만큼 강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것이다. 제주에 왔던 미국 평화활동가가 있는데 집이 보스턴이라고 해서 무심코 ‘촘스키와 내가 메일을 주고받는다. (미국에) 가서 촘스키한테 제주도로 오라 그래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넸는데, 이 친구가 귀국해 한 달 정도 되니 ‘촘스키를 만날 스케줄 잡았다’고 연락이 왔다. 불과 2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가야하나? 가서 무슨 얘기를 할까?’ 막막했다. 촘스키에게 보여줄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도 필요했다.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강정주민들과 활동가, 최성희 작가 등이 용기를 북돋아 줘 미국으로 건너갔다.”


- 노암 촘스키가 생각하는 강정, 어느 정도 강정 문제를 알고 있나.

“작년 처음으로 촘스키 교수를 만났을 땐 강정에 대해 잘 모르니 소개하는 정도로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만났을 땐 상황이 굉장히 달라져서 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지’, ‘뭘 하면 되냐’고 묻더라. 인터뷰 시간도 길게 주고, 내가 요구하는 걸 다 들어줬다. ‘도지사에게 말 좀 해 달라’고 하니까 편지를 써주겠다고 하고, 강정에 대해 기고도 하고, 노란색 티셔츠 입고 사진도 찍어주고 인터뷰도 응해줬다.”

 “미국민들은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폭력과 인권유린 현실을 놀라워했다”
 
- 세계적인 석학이자 양심적 지식인이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고 작가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고 많은 이들이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내 작품 전시하러 갔으니 거기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뭘 한다고는 생각도 안했다. 그런데 한 군데서 거의 한 달씩 전시를 하다 보니 시간이 남았다. 그 때부터 다시 강정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강정에선 집회금지가 내려지고 강동균 마을회장은 해군기지 철회를 위해 전 세계에 호소하고, 인터넷으로 강정 소식을 보면서 가만히 있질 못하겠다. 뭐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지난해엔 미국 대학에서 4차례나 강연을 했다. 강정을 이야기 했을 때 미국 현지 반응은 어땠는가.

“내가 촘스키를 만난다는 게 소문이 나서 그 때부터 미국대학이 붙기 시작했다. 한국학 관련된 교수들, 대부분 한국계 미국인들인데 이들은 나에 대해 전혀 몰랐었는데 촘스키 만날 스케줄이 잡히니 갑자기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진짜 촘스키가 대단하단 걸 실감했다. 제주에서 온 무명작가가 촘스키를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미국대학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거의 모든 이들이 제주도 강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강연 참석자들은 미국인 대학생, 한국계 미국인, 그리고 평화활동가들인데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를 만든다는 자체를 몰랐고 거기서 무수하게 폭행이 이뤄지고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을 아예 몰랐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놀라워했다.” 

▲ 개인 전시회로 미국에 2개월 체류하면서도 그의 머리엔 온 통 강정뿐이었다. 고길천 작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해군기지 반대시위를 조직했다. 사진은 워싱턴 시애틀 한국 영사관 앞에서 벌인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 ⓒ 사진제공=고길천
- 작년 9월 뉴욕대 강연에서 강정을 이야기하다 격한 감정으로 고 작가가 눈물을 흘렸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상황을 “평화유배자 고길천 작가는 그렇게 눈물로 제주를 말했다”고 전했다.

“뉴욕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회와 노둣돌(미주 한인진보청년단체)에서 주최한 행사였다. 처음엔 강정과 관련된 ‘저항의 미술’, 나의 ‘그래피티(graffiti)’ 작품이 알려져서 그걸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것만 이야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저 사람들은 강정에 대해 모를 텐데.’ 그 생각만 났다. 작품이야기는 반으로 끝내고 나머지는 강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런데 강동균 회장이 경찰에 체포됐을 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 때 그게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감정이 격해지고 울컥하게 됐다. 눈물을 참느라고 혼난다.”

- 2011년과 2012년 고길천 작가의 미국 현지 활동으로 미국, 그들이 강정문제에 대한 인식이 좀 됐는지 어떻게 보나.

“이제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 촘스키는 물론이고 내가 만날 수 있는 범위의 분들은 강정을 다 알고 있었다. 교포들도 상세히 알고 있다. 샌타로사는 제주와 자매도시여서 강정문제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외로 몰랐다. 마침 다운타운에서 ‘아큐파이 샌타로사’를 하고 있어서 거기에서 ‘너희 나라가 제주도에 미군기지를 지으려 한다’며 강정 이야기를 했더니 이 사람들이 열 받았다. ‘자매도시 일인데 우리가 몰랐다’고. 한 분은 올 2월 샌타로사 상징물인 스누피 동상을 제주에 갖고 왔는데 ‘내가 우근민 지사도 만났는데 그런 문제가 있는 걸 말하지 않았다. 화가 난다’ 이렇게 말하더라. 흥미로운 건 이들은 우근민 지사가 제주도민 편이 아니라는 걸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왜 그러지? 도지사는 도민이 선출한 거냐, 중앙에서 파견한거냐’고 촘스키도 묻고 다른 이들도 다 물어본다. 당연히 도민들 편에서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중 플레이를 하는 우근민 지사 행태를 이해 못하겠다고 한다.”

미국인의 질문 “제주도지사 도민이 뽑은 게 맞냐?”...“강정은 미군기지. 미안하다"
 
- 강정 해군기지 뒤에는 미국이 있다. 당신 나라가 제주에 해군기지를 짓는다고 할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아주 격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가 미국인이라는 게 너무 창피하다. 미안하다’고 한다. 미군기지가 거기에 들어선다는 걸 자체를 이해 못하고 제주도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너무 창피하고 미안하다는 말들을 했다. 그들은 제주해군기지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건설되고 있다고 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며 굉장히 예민해 하고 반대한다. 또 한국 해군은 ‘강정 해군기지가 한국 것’이라고 하는데 미국인도 안 믿는다. ‘웃기지 말라. 강정은 미군기지’라고 한다. 뻔히 아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편이라는 걸 다 안다. 당연히 미군이 들어가고, MD 정책 때문에 한국과 관련없이 무조건 미군 꺼라 걸 안다. 그러니 더 심각한 것이다."
 

▲ 제주4.3평화공원에 전시돼 있는 고길천 작가의 작품 '죽음의 섬'
-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현장을 직접 보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그 현장에서 뭘 봤고, 무엇을 느꼈나.

“원래는 쌍둥이빌딩 무너진 데 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4.3평화공원에 내 작품(죽음의 섬)이 들어가 있기도 한데 이 친구들은 어떤 작업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고 해서 결국 보질 못하고 나오는 데 근처에 리버티스퀘어(주코티파크) ‘Occupy Wall Street’의 진앙지인데 예술가들이 몰려있었다. 화가들이 바닥에 그림 그리고, 누구는 연설하고...미국이 행한 전쟁으로 전 세계에서 죽은 사망자 그림들도 있고, 아프카니스탄 등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데이터도 나오고, 또 1%와 99%가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 갈수록 재미가 있었다. 그곳에 이틀 있었는데 그 때가 월스트리트로 진입하기 바로 전 단계였다."

- 거기에서 제주, 강정이 오버랩 됐나.

“딱 감이 왔다. ‘Occupy Wall Street’는 강정과 연관이 돼 있다. 월스트리트는 전쟁도 사업으로 생각하고 투자한다. 강정도 미군이 들어와서 MD 정책으로 가장 이득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군산복합체 바로 월스트리트 저들이구나란 생각이 확 왔다.”

-두 달 만에 귀국했다. 강정에 혹시 다녀왔는가. 가보니 어땠나.

'걱정했던 게 미국에서 총선 결과를 보고 ‘기가 다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예전과 똑같았다. 강정이 평택이나 내가 경험한 곳들과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 그 생명력, 평화에 대한 염원, 공동체에 대한 의지가 강인한 게 아닌가.

“강정 문제를 미국 가서 알릴 때 그들이 제일 놀라워 하는 건 ‘5년 동안 국가와 싸우고 있다’고 하면 전부다 놀란다. 국가에 대항해서 조그만 마을이 그것도 ‘비폭력’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라한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한 곳이 없다. 제주사람들 대단하다’고 하는 게 첫 반응이다. 지난 5년도 그렇게 해 왔는데 당연히 총선 결과 관계없이 간다. 총선 하나 가지고 무너질 사람들은 아니다.”

▲ 고길천 작가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생명력, 공동체를 지켜나가려는 생명력에 주목한다. 거대 국가권력에 비폭력으로 5년간 저항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공동체를 지켜려는 생명력이었다고 본다. ⓒ 제주의소리
5년간 비폭력으로 국가권력에 저항...선거 하나로 무너질 강정 아니
 
- 강정이 거대 국가권력과 5년 동안 비폭력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공동체. 제주도가 갖고 있는 문화 뿌리가 공동체다. 역사적으로 아주 단단하다. 그 공동체를 강제로 해체시킨다는 게 말이 안된다. 그걸 지키고자 하는 게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5년간 이끌어온 원동력인 것 같다.”

- 강정주민은 그 공동체를 지키려하지만, 정부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작업들을 쉴 새 없이 한다. 

“1948 4월 3일 제주도 공동체가 대대적으로 해체됐는데, 이번엔 소단위로 해체되고 있다. 강정이라는 역사, 강정이라는 마을의 긴 역사가 사라질 판인데...이 사람들은 단지 공동체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다. 뭘 해달라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쌓아온 공동체 환경을 지키고 싶은 본능이다. 누구나 지키고 싶을 것이다. 민주 의식이 높아서라기보다 지키고 싶은 마음이다. 외국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게 한 마을이 5년 간 비폭력으로 국가의 부당함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 강정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 나갔으면 좋을지.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이 심각하게, 진지하게 다시 한 번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물론 많은 도민들이 지쳐있을 거다. 거기에다 패배의식, 4.3때 여러 가지 트라우마나 기회주의적인 것도 있고 또 토착 자본세력이나, 일부 토건업자들의 이기적 생각들도 큰 문제다. 제주도민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다.”

- 평범한 시민들도 그렇지만 반대운동을 펼치는 분들 중에서도 정말 해군기지 문제를 백지상태로 돌릴 수 있을까 걱정하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그런 생각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회되도록) 해봐야지, 그냥 이렇게 가서 나중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그 패배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해군기지를 보면서 어떻게 수습할 거냐. 영원히 수습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운동은 정당하다. 내 개인적으론 내 자신을 배반할 수 없다. 나한테 솔직해야 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내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 능력이 닿는 데 까지는 해보려고 한다.”

- 앞으로 어떤 작업들을 해 나갈 것인가. 내년엔 미국에서 4.3전시회도 한다고 하는데.

“작업실도 마련을 못한 상태서 미국엘 갔다 왔는데 당분간은 작업실을 구하려고 한다. 시내가 아니더라도 장돌뱅이 신세를 언제면 면할지 걱정이다. 미국에선 계속 작품을 보내달라고해서 그 준비도 하려고 한다. 또 내년 4.3 전시회도 아직은 예정중이지만 탐라미술인협회 작품을 골라서 나갈 예정이다. 말 그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다. 작품으로 말한다면 내 머리 속에는 아직도 구럼비 뿐이다. 구럼비가 각인 됐다. 그 이상이 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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