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1) 생전 처음 밭을 일구면서… / 정신지

생전 처음으로 밭을 가꾼다. 씨앗은 뿌려 놓으면 싹이 트는데 몇 주나 걸리고, 그간 밭에는 잡풀이 새싹과 함께 자란다. 그걸 하나씩 뜯고 있자면, 뭐가 새싹이고 뭐가 잡초인지 구분하는데 한 씨름한다.

땡볕에 종일 앉아서 검질(잡초란 뜻의 제주어)을 메고, 돌을 일구어 내어도, 끝나고 나면 티도 하나 안 나는 밭일. ‘에라, 모르겠다!’,하고 한 며칠 가만히 두면, 벌레들이 와서 무심하게 채소들을 뜯어먹기 일쑤다. 벌레 때문에 잎사귀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소들이지만, 내 손으로 키웠다는 성취감으로 즐겁게 수확한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고기 한 점 얹어 먹어버리면 ‘그만’이다. 몇 달 걸려 노심초사하며 키워낸 것들도, 먹으면 한 입에 사라지고 만다.

아무 의식 없이 사다 먹던 채소를 손수 기르고 있자니, 이 ‘티도 안 나는 노동’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동시에 허무하기도 하다. 먹으면 그만이기에. 열심히 땀 흘려 노동했지만, 채소가 그걸 알아주나, 먹는 가족이 알아주나, 나는 그냥 노동했을 뿐이고, 그것은 굳이 내가 아니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하는 아무개의 말처럼, 행동에 대한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런 요망진(야무진이란 뜻의 제주어) 체험만을 반복하고 살아온 나로서는, 농사일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소극적이다.



근 10여 년간 나는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는 조금 생소할지도 모르는 ‘지역연구학’을 전공했다. 한 사람, 한 집단, 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학문적 카테고리에 연연하지 않고, 다중적인 관점과 방편으로 특정 지역사회를 조사해 나가는 것이다.

지도교수님은 언제나, ‘あるく(걷고)、みる(보고)、きく(듣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셨고, 대학 내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학생보다, 학교 밖에서 필드워크(현장조사)를 하는 학생들이 훨씬 우대를 받았다.



일본 민속학계의 거두, 미야모토 쓰네이치(宮本常一·1907∼1981)는 73년의 생애 중 16만 킬로미터, 지구를 4바퀴나 일주하고도 남을 거리를 걸어, 일본열도를 맨몸으로 걷고 보며 기록한 학자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 중 60편의 시리즈로 기록된 ‘잊혀진 일본인’(『忘れられた日本人』,1960)은 패전 후의 일본 사회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경제성장의 무대 뒤편에서 묵묵히 ‘티도 안 나는’ 생업을 꾸려가며 살아온 일본 각지의 ‘보통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 방대한 기록이 훗날 일본 인문학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기록은 일본의 현대사를 뒷받침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



최근 나는 대학원의 지원을 받아, 미국 뉴욕시의 스토리콥스(Story Corps)라는 NGO 단체의 활동을 취재한 적이 있다. 시내 광장 한복판에 7-8평 남짓한 컨테이너 부스를 설치하고, 그 안에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스토리 리코딩을 실시하고 있다. 2명의 참가자가 인터넷으로 인터뷰 신청을 하고, 서로에 관한 질문을 생각해 와서 20여 분간 대화를 나눈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직장동료부터 게이커플에 이르기까지, 나이와 성별. 사회적 지위와 인종을 막론한 참가자들이 나누는 20여 분의 이야기는, 전문 음향기기로 녹음이 되고, 담당 스텝이 그것을 텍스트화한다.

문자화된 자료는 미국 국회도서관에 역사자료로 보관되고, 그들의 웹사이트에서는 참가자들의 음성데이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들은 미국의 국영 라디오에서 온 에어 되기도 한다. 어느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처음 부스 안으로 들어온 참가자들의 서먹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웃는 소리, 우는소리로 바뀌고, 담당 스텝이 하는 일은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향시스템을 점검하는 것뿐, 부스안의 20분은 언제나 마술처럼 후딱 지나간다.



왜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으로 뉴욕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유명 인사들과의 인터뷰 대신에 보통사람들의 이야기에 착목한 것일까? 미야모토 쓰네이치는, 그토록 좋은 머리로 할 수 있는 학문이 많았을 텐데, 왜 발이 닳도록 고생을 해가며 잊혀진 일본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까?
나는 아마도 그 대답을,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땅에서 티 안 나는 밭일을 하며 재발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뿌린 씨앗과 내가 걸러낸 돌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땅이 모양새를 갖췄고, 채소를 사다 먹는 돈과 수고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누군가 한평생을 밭에서 검질을 메다가 소리 없이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게 우리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르고, 서울로 두 딸을 유학 보내고 혼자 살고 계시다는 동네 어느 할머니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이다.



 

▲ 정신지  ⓒ제주의소리

한평생 하다가도 티 하나 안 나는 농부의 밭일 이야기, 셀 수 없는 바닷 속의 물고기를 몇천 마리 잡다 가셨다 한들 그 누구 하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던 어부의 이야기, 몇 십 년 택시를 몰아 자식들 공부시킨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와 동네 욕쟁이 할머니의 잊힌 옛사랑 이야기까지…. 이 모든 무명의 이야기가 제주의 역사이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의 중요성에 이제 우리도 적극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굳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과 인물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무명의 이야기와 기억 속에 우리는 피와 뼈를 묻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기에. 그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걷고, 보고, 듣고’ 쓰는 일을, 이제 막 돌아온 내 고향 제주에서도 시작해보려 한다. 걸으멍(걸으면서), 보멍(보고), 들으멍(들으면서) 말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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