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국내언론, 식민지 근성 벗어나야...막대한 비용 든 7대경관도 단세포적 시도

▲ 허영섭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제주의소리

서울이 세계 10대 미녀 도시 가운데 아홉 번째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것도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뽑혔다는 것이다. 지난 며칠 사이 인터넷에서 대부분의 언론사 뉴스 사이트마다 빠짐없이 소개됐던 기사다. 홍콩에 본부를 둔 인터넷 여행잡지 ‘트래블러스 다이제스트’가 그렇게 선정했고, 영국의 ‘데일리 메일’이 다시 인용 보도한 내용이다.

한국 미녀의 사례로는 아이돌 그룹인 원더걸스와 티아라가 거명되었고 서울이 아시아의 문화 트렌드를 상징하는 패션과 음악의 최전선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미녀들 때문에 서울이 덩달아 빛난 셈이다. 도쿄나 상하이, 홍콩, 방콕 등 아시아에서 나름대로 국제적인 분위기를 자랑한다는 도시들조차 아예 거명되지 않았으니, 서울로서는 가히 독무대였다 할 만하다.

사실, 서울의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여자들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10대 미인 도시’에 들 만큼 평가받을 줄이야 미처 몰랐던 게 사실이다. 미인을 바라보는 내 개인적인 안목이 기준 미달인 탓일 것이다. 어쨌거나, 미녀들이 활보하는 도시에 끼어서 같은 공기로 숨쉬고 산다는 자체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보도를 처음부터 되짚어보면 우리 언론들이 몇줄씩이라도 걸치고 넘어간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물론 지나가는 호기심 정도의 비중으로 다룬 기사들이기는 하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마치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적 인증이라도 받은 것처럼 비쳐지기까지 한다. 우리 언론들의 구태의연하면서도 한심스러운 일면이다.

데일리 메일의 보도를 살펴보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다. 다른 도시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자세히 열거하다가 기사를 끝내는 맨 마지막줄에서야 “서울은 아홉 번째로, 몬트리올은 열 번째로 선정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줄로, 그것도 마지막 순위인 몬트리올까지 묶어서 처리하고 있는데도 우리에게는 그나마 감지덕지하다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밖에는 순위표가 곁들여 있을 뿐 서울을 소개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가 않다. 다른 나라의 미녀들은 사진까지 곁들여 소개하면서도 서울은 단순히 9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전부다. 국내의 인터넷 보도에서 소개된 대로 원더걸스의 이름이 거명되고 서울이 아시아의 문화 트렌드를 상징한다는 내용은 트래블러스 다이제스트에 등장하는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트래블러스 다이제스트가 그 리스트를 발표한 시점이 지난 2월 중순께였다는 점에서도 그 기사를 받아쓴 우리 언론의 무신경이 확인된다. 이미 발표된지 넉달이 지났다면 뉴스 가치는 이미 흐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데일리 메일이 인용한 것을 계기로 다시 뉴스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동기는 빈약하다. 우리 언론의 ‘변방 기질’을 말해준다고 밖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실은, 트래블러스 다이제스트의 기사조차도 여행작가의 단순한 인상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권위있는 평가위원회가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기준을 들이대고 면밀한 토론과 심사를 거쳐 뽑아낸 결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성형외과의 솜씨좋은 쌍꺼풀 수술 덕택에 서울에 미인들이 넘친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순위 매김에는 아무래도 얼굴이 간지럽다.

더구나 시점이 지나버린 기사를 데일리 메일이 다시 환기시킨 것도 현재 진행중인 유로2012 축구 챔피언전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 문장부터가 “유로 챔피언전에서의 탈락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아직 아름다운 여성들에 대해 자랑할 것이 남아 있다”고 쓰고 있을 정도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가 트래블러스 다이제스트의 ‘10대 미인 도시’에서 1등으로 소개됐다는 점에 착안한 것임은 물론이다.

우크라이나와 잉글랜드의 유로2012 조별 예선전이 열린 곳이 우크라이나의 남동부 도시인 도네츠크였다. 그곳 돈바스 경기장에서 열린 리그전에서 잉글랜드가 스트라이커인 웨인 루니를 앞세워 우크라이나에 승리를 거둔 것이 지난 19일(현지시간)의 일이다. 영국 축구팬들의 관심이 온통 거기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데일리 메일로는 절묘한 기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데일리 메일이 헐리우드에서 활동중인 우크라이나 태생의 여배우 밀라 쿠니스와 올해 미스 우크라이나에 선발된 카리나 지론키나의 사진과 함께 잉글랜드와의 경기를 관람하는 여성 축구팬의 사진까지 곁들인 데서도 편집 의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여름철을 맞아 “휴가지로는 어디가 좋을까?”라는 제목을 달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사의 양념일 뿐이다.

이렇게 자기 계산에 의해 생산된 외국 언론의 기사들이 별다른 여과절차도 없이 국내 언론에 무분별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외국에서 평가를 받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과정과 배경에 관계없이 손톱만큼이라도 놓쳐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압박감이 작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스로 외국의 ‘언론 제국주의’에 종속되고자 하는 식민지 근성의 몸부림이다.

외국 언론의 미세한 지적에도 화들짝거리는 소아병적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언론이 국제적으로 대접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저쪽은 뉴스를 생산하는 입장인 반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쓰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계에서 경제 규모가 10위권에 들었고, 미녀 도시에서도 이름을 올렸다지만 언론의 위상은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 분야에서의 고질적인 증세다. 클래식 연주회나 뮤지컬 공연, 출판 등의 분야에서 거의 마찬가지다. 외국에서 초청했다는 자체로 오케스트라와 공연단이 흥행을 일으키곤 한다. 막대한 국제전화 비용을 무릅쓰면서도 외국 재단에 제주도의 자연경관을 등재시키려 했던 단세포적인 시도도 그러한 추세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의 평가와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 의연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외국에서 좋은 평가를 얻는 것이 나쁠 수야 없겠으나 너무 거기에 집착하는 것도 좋은 현상은 아니다. 우리 언론이 스스로 권위를 지니려면 외국의 자잘한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습성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 이번 ‘세계 10대 미녀 도시’ 기사에서부터 뼈저린 반성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 /허영섭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 필자 허영섭은? 경향신문에서 기자, 외신부장 등을 거쳐 2007년까지 논설위원으로 재직했습니다. 신문사 재직 기간에 제주도, 특히 한라산 등 자연에 관한 기사와 논설을 자주 썼습니다. 이같은 제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제주의소리> 칼럼진으로 합류하게된 배경입니다. 한때 전경련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며, 현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분과 특별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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