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6 비단마을 '청뚜(成都)' 그리고 제갈공명의 사당

아침 공기는 좀 서늘하고 상쾌하다. 공항 가는 셔틀버스를 타는 곳은 그리 멀지 않은 호텔 앞이었고, 일찍 챙겨 나온 탓에 여유로웠다. 호텔에서 버스표를 사고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이 가득 들어찬 낡은 미니버스였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든 사람들이 버스 앞으로 달려가는데 좌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통로까지 승객들의 짐으로 꽉 차있어서 올라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한국에서와 같은 번듯한 대형버스를 생각하고 있던 터라 좀 당혹스러웠지만 통로에 있던 가방들을 조금씩 밀어내어 배낭을 멘 채 간신히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방 위에 살짝 엉덩이를 내려놓고 앉았는데, 마치 수호지에 등장하는 노지심같이 대머리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삿대질하며 싸움을 걸 듯이 뭐라고 외쳐댔다. 내가 그 대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팅부동, 팅부동, 워스한궈런.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러자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가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거런 상 추주치처….”
아마도 몇 사람이 함께 택시를 합승하여 타고 가라는 것 같았다. 내가 뭔가 이해한 것을 알아차린 듯이 대머리가 다시 외쳤다.
“얼스콰이, 얼스콰이.”
셔틀버스요금이 10원인데 10원을 보태어 20원에 택시 타고 가라는 것이다.
“OK, 밍바이러.(明白了, 알았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대머리가 내 손에서 버스표를 빼앗듯이 채가더니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10원을 환불받아 왔다.

택시에는 운전석 옆자리에 한 사람이 타고 있었고 나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는 출고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하고 안락했다. 대머리 운전기사는 합승할 사람을 찾아서 바쁘게 알아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셔틀버스가 출발하자 두 사람만 태운 채 버스를 따라 공항으로 출발했다.

상쾌한 아침, 공항 가는 길에 앉을 자리도 없이 짐짝처럼 실려갈 뻔했는데, 택시 뒷좌석에 혼자 넉넉하게 앉아 가는 호사를 누리게 되니 10원을 더 주고도 만족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좋았던 기분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운전기사가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담배연기가 뒤에 앉은 나에게로 덮쳐왔다. 창문을 열어도 밀려오는 담배연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 대머리는 담뱃불이 거의 필터에 이를 때까지 피우고서야 담배를 차창 밖으로 내버린다.

공항에 도착하고 탑승수속을 위해서 배낭을 엑스레이검사기에 집어넣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몸 수색을 받고 나온 나에게 검사요원이 모니터에 나온 내 배낭 속의 물건을 지적하였다. 액체로 된 것은 갖고 타지 못하니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둔황에서 먹다 남긴 바이주 반 병, 한 홉짜리 한라산소주 반 병, 황하 맥주캔 한 병, 아침에 사서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손에 든 생수까지 두고 나와야 했다. 그동안 배나 기차를 탈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이 비행기를 타려 하니 문제가 된 것이다. 어쨌든 배낭은 한결 가벼워졌다.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 있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데, 둘러봐도 커피자판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카페이팅, 커피숍’이라고 쓴 간판이 보여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싶어 들어갔는데 여종업원이 들고 온 메뉴판의 커피 가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커피 한잔이 50원~60원 하니 한국 돈으로 8천 원~1만 원 정도라는 얘기다. 그다지 고급스러워 보이지도 않고 소박하게 꾸민 커피 점은 가게 안의 공간이 비좁으니 아무나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공항에서의 또 다른 호사를 포기하고 커피점에서 나와 대합실에 비치된 정수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 한 컵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청뚜까지의 비행시간은 약 3시간여, 기차를 탄다면 쾌속열차로 49시간이 걸리니, 이틀하고도 한 시간을 더 달려야 하는 거리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가이드북을 보면서 청뚜에서 하루동안 머물 숙소와 효율적인 관광을 위한 계획을 짰다.

청뚜관광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사당이라는 무후사, 두보 초당, 그리고 도교사원인 청양궁을 보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판다공원이나 2000년 전의 수리시설로 알려진 도강언 같은 것을 보려면 별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숙소는 무후사 앞에 있는 유스호스텔을 가보기로 정했다.

청뚜공항에 도착하자 시내로 들어가는 민항셔틀버스를 탔다. 버스가 시내로 들어가면서 차창 밖의 거리에는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고, 자동차와 사람들의 물결이 거대도시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버스가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중심가에 이르자 나도 따라서 내렸다.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지만 청뚜와 충칭은 교통체증이 심한 도시로 악명이 높다고 익히 듣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퇴근 시간이 가까워가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빈 택시에 다가가 지도를 보여주며 무후사로 가자고 하자 택시기사는 “싼스콰이(30원)”라고 하며 요금을 말했다. 좀 비싸다고 하자 기사는 지금 시간은 차가 밀려서 그렇게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도로에는 밀려드는 차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택시는 절묘한 솜씨를뽐내며 틈새를 빠져나가 그다지 정체되지도 않고 무후사 앞에 곧 도착했다. 근처에 불교사찰이 있는지 노란색 상의에 짙은 자줏빛깔의 긴 치마와 같은 하의를 입은 티벳 라마불교의 승려들이 많이 눈에 띄었 다. 청뚜는 칭하이성의 거얼무와 함께 티벳으로 가는 관문으로 여겨지고 있어서 티벳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무후사 길 건너 맞은편은 그들의 집단 거주지로 알려져 있었다.

▲ (꿈의 여행) 유스호스텔 입구. ⓒ양기혁

택시에서 내려 무후사 앞의 ‘꿈의 여행’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유스호스텔을 찾아 들어갔다.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빈방도 거의 없어 보였다. 예약을 하지 않은 탓에 잠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도미토리 4인실의 빈 침대 하나를 겨우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방에 들어가자 톈진에서 왔다는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내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길 건너의 무후사는 관람시간이 지나서 문이 닫혀 있고, 그 옆으로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표지판에 ‘Jin-ri’라고 쓰여 있는 이곳은 고대의 상점거리를 재현해 놓은 곳으로 음식점과 기념품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비단 파는 곳은 없다. 청뚜(成都)는 예부터 비단의 생산지로 이름이 알려져서 ‘금성’ 혹은 ‘금관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비단마을’이라는 ‘진리’는 그 이름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 청뚜의 쇼핑거리인 진리 입구. ⓒ양기혁

 

▲ 청뚜의 쇼핑거리인 진리 입구. ⓒ양기혁

좁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행객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인파에 밀려 떠다니듯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기념품을 구경하고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 진귀한 수목들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한 카페의 길가에 내놓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등을 환히 밝힌 상점가는 넘치는 인파 속에서 삼국지의 촉한(蜀漢)이거나 아니면 당(唐)나라 시절의 옛 정취를 느끼게도 하였다.

숙소에 돌아오니 다른 룸메이트 두 사람이 있어서 인사를 나누었다. 차이원롱과 리양. 그들은 쟝시성(江西省) 남부의 광동성에 가까운 지방 출신이다. 내 이름을 한자로 쓰고, 알파벳으로 한국발음을 표기한 것을 보고 차이원롱은 한국의 한자발음이 광동어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장개석을 장제스라는 병음표기 대신 광동어 발음으로 ‘지앙 카이섹’이라고 쓴 글을 보고 한국의 한자발음이 광동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리양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차이원롱은 녹차를 대접하겠다며 다기세트를 꺼내고, 물을 끓여 조그만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내가 조금씩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데 그는 한번에 원샷으로 마셔버리고 나에게 빨리 마시길 재촉하였다. 그의 재촉으로 할 수 없이 나도 따라서 원샷으로 숭늉 마시듯 녹차를 마셨다. 소주잔 절반 정도의 작은 녹차잔은 그렇게 한번에 차를 마시는 것인지 여러 잔을 마셨다. 그는 녹차뿐 아니라 보이차와 여러 종류의 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늘 차를 가까이하고 자주 마신다고 말했다.

리양과 톈진런이 돌아와 그들의 침대 속으로 들어가자 차이원롱이 다기세트를 정리하고, 그의 침대로 가며 말했다.
“워먼 수이지아오바 (우리 그만 잡시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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