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이도 사랑을 지키는 방법, 자청비는 알았다
상처 없이도 사랑을 지키는 방법, 자청비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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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소와 튀르포 감독의 쥴 앤 짐(네이버 영화 포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하여 현실의 질서라는 주도면밀한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를,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영화였을까.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타인의 취향(씨네21). 누가 타자를 지옥이라 했나. 불과 이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취향에도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면 우스꽝스런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김정숙의 제주신화> 29 자청비 여신 원형 ⑨

자청비의 여신 원형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이면서 확보하는 여신 원형이다.   


문도령은 이야기 내내 아이 같다. 자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늘 무엇엔가 끌려 다닌다. 자기 욕망에 부합되는 일엔 뛸 듯이 좋아하며 기분과 맞지 않으면 조그만 일에도 토라지고 징징댄다. 문도령 앞에 타자는 없다.


자청비는 어른 같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아픔을 겪으며 관계를 아우르는 결정을 하고, 사는 과정 중에 얻은 가치들을 삶 속에 실현시켜 가는 어른으로의 성숙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정함은 그녀의 사랑에도 미친다.


그녀는 자신의 그토록 노력해 얻은 사랑하는 남편 문도령을 서천꽃밭의 막내딸에게 보낸다.
서천꽃밭의 막내딸은 남장을 한 자청비가 문도령을 찾아가는 와중에 결혼한 여자다(속여 결혼을 한 것이지만 여자와 여자의 결혼이다).


자청비가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보낸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의 상황은 공정하지도 않고, 도리도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자청비는 놀랍게도 일주일씩도 아니고, 일년씩도 아니고, 여성의 생리 주기인 한 달의 반, 보름씩을  두 여자에게서 가서 나눠 살라고 문도령에게 얘기한다.


질투를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간 문도령이 새 각시에 홀랑 빠져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보름을 넘기자, 보름을 넘기고 있다며 쪽지를 보내고 허둥지둥 돌아오는 문도령을, 흩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맞이한다. 금쪽같은 서방을 그렇게 보내놓고, 시샘도 하고 화도 낸다.


아니, 아무리 자기들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지만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다니, 현실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라 말할지 모른다. 일부일처의 질서, 지배적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니 말이다.

▲ 프랑소와 튀르포 감독의 쥴 앤 짐(네이버 영화 포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하여 현실의 질서라는 주도면밀한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를,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영화였을까.

자신으로 인하여 상처를 안고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그러고 있는 걸 안다 하더라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면서까지 그 상대의 행복을 위해 애쓰기란 어렵다. 고작해야 남아도는 것을 덜어줄 뿐이다. 더구나 문도령이 누군가? 목숨을 걸만큼 사랑하는 남자 아닌가. 그런데 그 문도령을 자청비는 다른 여자에게 보내다니.


자청비가 문도령의 사랑에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상식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천꽃밭의 막내딸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진 상처와 차단의 벽을 허물어 주는 것도 당연히 상식적인 일이다.


이 충돌에서 자청비는 자신의 사랑에 들어와 앉은 비수, 타자를 받아들인다. 서천꽃밭 막내딸과 같이 가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문도령이라는 타자만으로도 수도 없이 비수가 꽂힐 텐데, 서천꽃밭의 막내딸이라는 또 한명의 여자까지 내 삶까지 새겨야 한다는 것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타인의 취향(씨네21). 누가 타자를 지옥이라 했나. 불과 이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취향에도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면 우스꽝스런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사랑은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비로소 낱낱이 보고 눈여겨본다는 지옥 같고 기적 같은 경험일 것이다.
그 사랑의 와중에 자신만을 끝끝내 고집하는 사랑을 한다 하여 꼭 사랑의 실패라 말할 수는 없다. 또 자신을 덜어내는 아픔을 감내하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한다 하여 꼭 성공한 사랑이라 말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랑을 하는가는 일종의 취향 같은,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녔던 동네의 길,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던 노래를 다시 보고, 다시 듣게 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아픈 아이들, 혼자 걸어가는 노인들도 진심으로 눈여겨보게 된다.


자청비는 사랑을 경험한 여자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막막히 기다리는 서천꽃밭 막내딸의 사랑이 얼마나 힘들지를 안다. 더구나 서천꽃밭 막내딸은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서 한 결혼이었다. 자청비는 서천꽃밭막내딸의 사랑을 눈여겨본다.


자청비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택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청비는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자유로움은 타자가 정당하게 요구하는 부분에 대해 ‘사유해 왔던 것’을 넘겨주며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그녀는 그녀의 ‘사유’에 대해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지게 된다. 아무도 자청비가 문도령의 반만을 가졌다고 여기지 않으며, 문도령은 자청비의 일거수일투족에 더욱 허둥댄다. 


그녀는 남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녀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는 여신 원형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동시에 아주 사회적인 초자아로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런 선택은 타자를 받아들이고 나를 덜어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겨우 가능해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김정숙(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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