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희(바람섬)

<바람섬의 숨, 쉼> 우리집 기달왕자

우리 집 춘기(사춘기 자식을 둔 부모님들은 다 안다. 이 말의 뜻을)님은 중학생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는 엄마의 말에 강하게 반발하다 약간의 거래로 해결보고 시작은 하는데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그냥 중학생이라고만 하겠다. 그 다음은 더 캐지 마시라.

다시 우리 집 춘기님은 중학생인데 최근의 별칭은 기달 왕자님이시다.
물론 내가 지었고 당사자는 반발한다. 왜 기달 왕자인가를 아래 한 컷의 상황으로 설명해보겠다.

(초여름 장맛비가 계속 되던 지난 달 초.. 비도 오고 시험도 코 앞이라 특별히 학교까지 차를 태워 달랜다. 아침엔 무척 바쁘지만 마음 좋은 엄마가 특별히 아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했다.
학교에 8시까지 가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항상 10여분은 훌쩍 넘기는 기달왕자님. 7시부터 애타게 왕자님을 깨우지만 반응은 한결 같다.
“ 기달! ”
겨우 깨워 아침 식사를 마치시고 다시 침대위로 널브러지는 아들에게 어쩔 수 없이 잔소리를 날리지만 이번 역시 한마디 대답.
“ 기달! ”
겨우 일으켜 세워 빨리 가자고 하고 성질 급한 엄마가 먼저 현관을 나섰는데 뒤가 허하다. 고개 돌려 보니 그제야 양말 신고 있다. 자 여기서 엄마의 이성 마비. 이런 폭풍전야의 상황에서도 아들의 반응은 일관성 있는 한마디.
“기달!”


자,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기달의 의미를 짐작했을 것이다.
기달은 아들의 주장으로는 “ 기다려주세요(공손한 어조로)” 이지만 내게는 “기다려!(강한 어조로)”로 들린다.
만약 누군가 우리 집의 일상을 초고속 카메라로 돌려본다면 “빨리 빨리”와 “기달”만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기달왕자님이 예외적으로 최근 빠름에 강하게 반응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스마트한 시대에 걸맞은 스마트한 기기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논쟁 끝에 다시 협상 전개.
방학기간 주 5회 요가와 열심히 공부할 것을  내걸고 할 수없이 스마트폰을 사고야 말았다. (나도 학습법에 나오는 엄마처럼 잘못된 협상대신 지혜로 아들을 교화시키고 싶었으나 항상 지혜는 멀고 상황은 코앞이다)

구입 직전 , 아들 키우기 선배님인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문자로 고했더니 이런 답을 내려주셨다.
“ 스마트폰! 안 사주면 아들과의 전쟁, 사주면 스마트폰과의 전쟁”
그래서 다시 지혜를 구했다. 어느 전쟁을 택 하는게 낫냐고.
“덜 괴로운 쪽 . 그런 것 없다. 가혹한 운명이여  흑흑”
이쯤에서 난 예견했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앞날을.
예견은 사실이 됐고 지금까지 압수와 정지 협박을 반복하며 아들의 빠른 스마트폰에 대응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주 토요일 우리 사랑스런 기달왕자가 아주 오랜만에 엄마와 활짝 웃는 일이 생겼다. 지난 3월부터 매주 토요일 한라도서관에서 진행되어온 씨네마 원정대 마지막 작품 발표회에서 기달왕자의 ‘충직한 빵셔틀이’ 큰 표 차이로 작품상을 의미하는 관객상을 받은 것이다.
우정을 주제로 쭉 수업을 받아 오다가 지지난주엔 한라도서관에서 1박2일 캠프를 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한 단편 영화 퍼레이드.
기달왕자님이 쓴 시나리오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떤 학교의 일진이 빵셔틀에게 빵을 사오라고 시킨다. 그런데 조금 있다 돌아온 빵셔틀의 다리가 이상하다. 왜 그러냐 했더니 급하게 오다 다쳤다는 것이다. 여기에 감동한 일진, 빵셔틀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었다.
지난주 이 내용을 들었을 때 난 당연히 빈정거리는 어조로 그랬다.
“ 그렇게 간단하게 갈등 해결을 하면 안 되지. 한마디로 유치함! ”

그랬는데.. 그 유치한 시나리오로 쓴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에 대한 아들의 설명은 살짝 감동적이었다.
“ 마감 20분전까지 정말 고민하다 한 순간에 썼어요. 새벽 세시가 넘어서 쓰기 시작했죠.. 아주 짧은 순간만 보여주고도 상황이 이해가 가게 해야 했으니까요. 또 캐스팅에 신경을 썼죠. 또 무엇 보다 나의 뜻이 잘 전달되도록 했어요. ”
순간 우리 기달왕자님의 주변으로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가....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기달왕자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개봉됐었다. 괴물을 사랑한 기달왕자는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영화 음악을 듣고... 괴물 동화를 보고.. 괴물 각색 소설을 보고.... 하더니 어느날 뜻밖의 모습으로 가족 앞에 나타났다. 소풍 배낭을 한쪽 어깨에 둘러맸는데 그 배낭에서 삐죽 솟아나온 것은 휴지를 막 구겨 넣은 삼다수 물병. 말하자면 괴물에 나오는 박해일을 코스프레 한 것이었고.. 그 추억의 화염병 앞에서 난 잠시 망연자실 했다는 것. 그런데 기달왕자의 괴물 사랑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 방학때 견문을 넓히려고 서울에 갔는데  창경원 교보문고 미술관을 반은 졸며 따라다니던 애가 정색을 하고 요구한 것은 원효대교를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괴물이 매달려있던 원효대교. 그래서 우리는 깊어가는 여름밤 쌩쌩 달리는 차들을 뒤로하며 하릴없이 원효대교를 왔다 갔다 했었다.
왜 그렇게 괴물을 좋아하냐 했더니 두 가지 이유라고 답변. “가족 사랑 , 그리고 불쌍한 괴물”

그랬던 아들도 고학년이 되고 중학교 가면서 학교 성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난 많이 속상했고 아마 본인도 그랬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의 작품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장 좋은 엄마는 기달왕자를 기다려주는 기달엄마가 되야되는게 아닐까 하고.

아들의 주장으로는 내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엄마고,
나의 입장에서는 너무 아들을 방임해 땅 치고 후회하는 엄마인데..
그 간극의 정점에는 믿음이 있다. 내가 조급하지 않고 한결 같은 믿음으로 잘 기다려주면 혹시 어느 날 그 간극이 마술처럼 메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넘어지고 부딪히며 자신의 길을 가는 기달왕자를 응원은 하되 지나친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것을 실천하려면 하산해도 되는 도인의 경지가 되어야 함을 안다. 아,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뜨거운 여름 날이 계속되고 있다. 기달 왕자의 기달도 계속된다.
“기달 왕자, 기달 엄마가 되려고 노력할게.. 그런데 뭐 결심을 하든가 깨달을 일 있으면 가능한 빨리 해줘”
아, 또 빨리 빨리가 되고 말았다. /바람섬

           
▲ 홍경희(바람섬). ⓒ제주의소리

글쓴이 바람섬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바라건대 청춘 이후의 내 삶은 독서와 요가로 채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아들 딸의 강력한 사춘기 에너지를 갱년기 에너지로 힘겹게 맞서며 하루하루살아가고 있다. 좋은 부모 만나 서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10년 언론사에서 일했다. 그 후 이제까지 제주교재사를 운영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행복한 교육으로 가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재 교구를 판매하고 있다”

고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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