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바다. (Korea ︳Documentary, Animation ︳2012 ︳5 mins 23 secs. Director 강희진, 한아렴). 오는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열리는 제13회 제주여성영화제에서 <Toilet>과 함께 개막작으로 예정되어 있다. 
제주의 할망바당은 자청비 여성들의 큰 힘을 보여주는 곳이다. 개별성, 개인, 개성을 존중하는 제주의 문화는 그러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보살핌과 배려, 연대의 가치를 그 못지않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사진제공, 2012년 제13회 제주여성영화제, 제주여민회)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멘튼 감독. 
여자는 사랑하는 아들과 같이 있고 싶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 아들을 찾아주는 것이다.(네이버 영화 포토).

<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34 자청비 여성 3

가족이란 철옹성을 변형시키는 이단자

대부분의 문도령은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현실의 문도령들은 낙원을 원한다. 문도령의 낙원은 책임이 없는 아이 같은 상태로 있는 곳이지 책임을 지는 곳이 아니다. 그는 아내가 꽃처럼 있어주기를 원한다. 전기밥솥이 되었다가 세탁기가 되었다가 청소기로 커피포트로 정물처럼, 사물처럼 있기를 원하지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부관계가 의식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둘 사이에 또 한 사람이 있을 경우 소리치다가, 울다가, 절대 그 사람에게 보낼 수는 없다 해야 하는데, 가라니?, 그것도 꼭 반반씩 나눠서. 15일 씩을 나눠 살라니!, 이건 뭔 복잡한 일인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결혼을 서 너 번 하는 것보다는 들키지 않고 몰래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좋다.


남성들은 자청비 아내의 이런 자의식이 너무 두렵다.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종도 아닌데다가, 세상의 모든 지배논리는 지배적인 논리라 했던가?, 그 지배적인 논리, 대세도 아니어서 당황스럽다.


남자들의 두통거리, 자청비 아내

그래서 자청비 아내는 남자들의 두통거리다. 부모님, 어른들, 사회의 두통거리다. 다른 여자들의 두통거리이기도 하다.
다른 여자와 눈이 맞은 남편에게는 정작 아무 말 못하고, 상대 여성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데 동참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가족집단 정서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이 여성들은 가족이라는 철옹성을 변형시키는 이단자이고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본능과 욕망을 초월하는 자아와 의식 확장의 과정은 혼란과 험난한 모험으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 숭고한 여정이며 그 결실은 그녀에게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그녀들에게, 사회 전체에게 돌아간다. 그런 큰 힘을 자청비 여성들은 보여준다.
미토스와 로고스의 조화를 꿈꾸는 자청비의 모습은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정해주는 신부와 결혼을 하라는 문도령의 부모님은 너무나도 견고한 힘이었다. 모두에게 내면화된 그 무시무시한 사회의 규칙과 시스템의 위력 앞에서 그녀는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투쟁가를 외치지는 않는다. 자신을 남성의 완력으로 겁탈하려 했던 정수남도 우선은 살살 달랬었다. 눈물겹게 기다린 문도령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자청비는 두 팔 들고  반갑게 맞이하기 전에 우선 짜증을 냈었다.    

할망바다. (Korea ︳Documentary, Animation ︳2012 ︳5 mins 23 secs. Director 강희진, 한아렴). 오는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열리는 제13회 제주여성영화제에서 과 함께 개막작으로 예정되어 있다. 제주의 할망바당은 자청비 여성들의 큰 힘을 보여주는 곳이다. 개별성, 개인, 개성을 존중하는 제주의 문화는 그러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보살핌과 배려, 연대의 가치를 그 못지않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사진제공, 2012년 제13회 제주여성영화제, 제주여민회)

치열한 자청비 처녀들의 선물


자청비 처녀들이 그랬던 것은 아직 단단해지기 전인 그녀들이 사회구조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여자로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였을 것 같다. 그녀는 힘에 부쳐서 돌아서 가야했고 느리게 가야 했지만 끈질기게 우리 곁을 지켜온 미토스처럼 자연과 인간관계와 사랑이 가지는 기본 뜻을 가지고 조금씩 사회와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랑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멘튼 감독. 여자는 사랑하는 아들과 같이 있고 싶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 아들을 찾아주는 것이다.(네이버 영화 포토).

이런 자청비 처녀들은 점점 단단해지면서, 관계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면서 그 관계에 몰두할 수 있는 유형으로 커 나간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관계를 구성한다. 사랑을 얻기 위하여 거리를 두거나 자신 속으로 움츠러드는 대신 문도령의 세계 안으로 성큼 들어간 자청비 여신처럼 자청비 처녀들은 때에 따라서는 남성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힌다. 이럴 경우 많은 여성들은 남성의 영향 속으로 매몰되어 버리기 쉽지만 자청비 처녀들은 자신의 ‘여성’을 잃지 않고 동시에 ‘남성’을 분리시키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사랑하며, 그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태도를 취해 나간다. 그녀는 그를 억압하지도 그녀의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치열하게 사랑을 이루고 유지시켜 나간다.


그녀들은 남성과의 위기나 갈등의 와중에도 감정에 빠져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지혜로운 노력을 한다.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이런 그녀의 노력들은 결국은 상대 역시 상대를 잃지 않게 하는 것과 이어진다.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에 늘 말을 거는, 사랑스럽기도 하거니와 치열한 자청비 처녀들에 의해 늘 새로운 관계가 인식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이 여자의 가장 매혹적인 부분이 된다. 세상은 이런 치열한 여성들이 던져놓은 보자기를 열고 자신을 반추한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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