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 지질기행> 25 공동체를 배려하지 않은 관광 사업, 재앙이다

지난 9월 8일(토), 제주자연유산센터에서는 (사)제주지질연구소(소장 강순석) 주최로 지질관광 활성화 방안을 찾기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필자도 토론자로 초대되어 다른 참가자들과 지질관광에 대한 입장을 교류하였다. 지질과 관광 두 영역 어디에도 전문가 축에 들지 못함에도 관련 전문가들과 자리에 함께 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비양도 케이블카 문제가 다시 도민사회에 논란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필자가 발표했던 내용 가운데 섬과 관련한 내용이 있어서 당시 발표했던 원고의 일부를 수정해서 기사로 올린다. 비양도를 비롯하여 제주도내 섬 관광에 대해 도민사회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 주  

▲ 20세기 초까지 세인트킬다에는 2천 년이나 존속해온 작은 마을 공동체가 있었다. 섬사람들은 가파른 절벽을 타서 바다 새를 잡거나 인근 섬에서 양을 키우며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했다. <세인트킬다 이야기>(바다출판사)에서 발췌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쪽, 대서양 한 가운데 세인트킬다(St. Kilda)라른 이름을 가진 섬의 무리가 있다. 이 군도는 히르타 섬, 던 섬, 소이 섬, 보어레이 섬 등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가파른 바위섬들이다. 유네스코는 1986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의 흔적이 있는 세인트킬다 군도를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했다. 세인트킬다 군도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바위절벽이 있으며, 거기에 퍼핀, 개니트를 비롯한 바다 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세인트킬다는 스코틀랜드 본토에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영국 여왕조차도 이 섬을 보지 못했지만, 20세기 초까지 히르타 섬에는 2천 년이나 존속해온 작은 마을 공동체가 있었다. 섬사람들은 가파른 절벽을 타서 바다 새를 잡거나 인근 섬에서 양을 키우며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했다. 열악한 환경 하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주민들 사이에 강한 유대감은 필수적이었다. 주민들은 세상에 세인트킬다가 아닌 또 다른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으며, 폭풍우와 무서운 질병이 섬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웃음과 활력을 유지하며 살았다.

절해고도에서 2천 년 간 이어온 마을

섬에서 가장 위협을 주는 것은 거센 바람이었다. 주민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두께가 무려 2m에 이르렀다.  집 안에는 돌을 쌓아 공간을 분리해서 한쪽에는 사람이, 다른 한 쪽에는 소나 닭 같은 가축이 살게 했는데, 가축들의 체온으로 인해 집 안은 겨울에도 온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덕에 농작물을 수확할 만한 땅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바람을 막기 위해 돌로 울타리부터 만들었다.

▲ 주민들이 거주했던 돌집이다. 세찬 바람을 피하는 수단으로 돌을 많이 이용하 것이 제주도의 전통 문화와 비슷하다. <세인트킬다 이야기>(바다출판사)에서 발췌
섬사람들은 의식주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스스로 만들었는데, 그 물품들은 모두 소박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쳤다. 그래서 이 섬을 방문한 영국인 학자는 섬사람들을 보고 '영국에서 가장 소박하고 평화로운 생활의 본보기'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영국이 점차 잃어가고 있던 것-물질에 휘둘리지 않는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지혜-을 세인트킬다 주민들은 일상에 간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세인트킬다 주민들이 매일매일 먹을 식량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던 시절에,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시절에 세인트킬다의 존재가 영국 전역에 화제가 되었다. '영국 끝에 있는 지상낙원'이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세인트킬다를 향해 정기여객선이 닻을 올렸다. 많은 관광객들이 트럼펫과 드럼을 연주하며 마을로 몰려들자 주민들은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며 가축을 이끌고 언덕에 숨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방문객들과 주민들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섬에 관광객들은 섬 주민들의 소박하고 초라한 생활을 보면서 호의를 베풀었다. 가져온 식량을 나눠주기도 하고, 오래된 잡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지상낙원의 때 묻지 않은 사람을 찾아 몰려온 관광객들

그런데 본토의 화폐가 섬에 통용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섬사람들이 돈의 위력에 매료되면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에게 팁을 요구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유람선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바위를 타며 새를 잡는 것보다 편리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자, 섬사람들은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세인트킬다 주민들이 소박함을 잃어버리자 영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주민들을 향한 호의를 걷어 들였다. '세상의 때 묻지 않은 낙원'을 찾아온 관광객들은 섬사람들의 탐욕스러운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인트킬다 유행이 한물 지났다. 더 이상 섬으로 관광객들이 몰려오지 않았고, 세인트킬다 특산품을 팔릴 길이 없었다. 섬의 공동체도 붕괴되어 이웃 간 혹은 가족 간 다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돈과 새로운 물건을 손에 넣으면서 섬을 지탱해온 검약 정신은 탐욕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섬의 사정이 나빠지자 섬의 식량위기 사정이 영국 뉴스에 오르내렸다. 그러자 대규모 원조단이 신문기자들과 함께 섬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1차 대전이 발발했다. 섬 주민들이 바깥 세상에 눈이 어두운 사이에 섬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었고, 영국 해군이 섬에 계속해서 상륙했다. 전쟁 와중에 난파된 배들이 늘어나면서 섬 주변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떠돌아다녔다. 섬이 독일군 잠수함이 발사한 포탄에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해군이 철수하자 섬에는 다시 고요해졌다. 1920년에 73명이었던 히르타섬의 인구는 1928년이 되면서 37명으로 감소했다. 식량위기는 섬이 스스로 해결해야할 숙제로 남았다. 이 무렵 섬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가져온 다양한 질병이 섬을 덮쳤다. 교회는 병원이 되었고, 학교는 부엌으로 이용되었다. 섬은 더 이상 예전의 생존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결국 세인트킬다 주민들은 영국황실에 청원서를 보내고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다. 대부분 섬사람들에게는 스코틀랜드 서쪽 끝에 있는 아가일 지역에 새로운 거주지가 제공되었다.

해체된 공동체, 섬과 이별하는 주민들

섬사람들을 이주시켰던 영국 해군소속 헤어벨 호의 포프렛 소령은 섬을 떠나던 주민들에 대해 남긴 기록이다.

'섬사람들은 매우 피곤하기는 했으나 시종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섬과 이별을 고할 때가 되자, 남자와 여자, 아이들까지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제주도의 입장에서 보면 세인트킬다는 지구의 건너편에 있는 생소한 섬이다. 그럼에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 거친 바람, 돌담으로 된 집 등에서 제주섬과 비슷한 풍광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해군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세계대전의 상처가 남아 있는 등 문화역사적인 면에서도 제주와 비슷하다. 게다가 제주도보다 조금 앞서서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니......,

세인트킬다 공동체 해체되던 20세기 초 영국의 상황이 지금 제주도가 처한 여건과 같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주사회 일부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관광객 숫자 늘리기에만 열중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세인트킬다의 비극이 제주섬 곳곳에서 재현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 비양도 캐이블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근 비양도에 케이블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민들은 "비양도 케이블카 사업이 지역을 살리는 중요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그분들은 케이블카를 통한 관광 사업에서 자신들이 얻을 것과 더불어 잃을 것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분석하였는지 되묻고 싶다.

관광이 제주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관광이 지역에 돈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파괴할 수 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미 세간에 화제가 된 마라도의 사례는, 무분별한 관광 사업이 주민공동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나? 섬 관광의 지속가능성은 주민 공동체의 안정에 대해 세심하게 고민하고, 이를 위해 섬세하게 배려할 때에만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장태욱

 

 
   
장태욱 시민기자는 1969년 남원읍 위미리에서 출생했다. 서귀고등학교를 거쳐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입학해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42년 후배가 됐다.  1992년 졸업 후 항해사 생활을 참 재미나게 했다. 인도네시아 낙후된 섬에서 의사 흉내를 내며 원주민들 치료해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제주대학교 의예과 입학해 수료했다. 의지가 박약한 탓에 의사되기는 포기했다.  그 후 입시학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씨름하다 2005년에 <오마이뉴스>와 <제주의소리>에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에 바람이 부는 망장포로 귀촌해 귤을 재배하며 지내다 갑자기 제주도 지질에 꽂혀 지질기행을 기획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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