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  The Witches. 엘리자베스 홉스, 영국, 2002, 7분, 애니메이션
남성권력의 마녀 선별법과 사냥에 대한 풍자와 위트가 넘쳐나는 환상적인 애니메이션. 
(제공. 제주여민회,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
100개의 다른 코 Flawed. 안드레아 도르프만, 캐나다, 2010, 10분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면서 주인공 안드레아는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외모과 자존감 둘 모두를 가져가기를! (제공. 제주여민회,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
박지성의 발.(네이버카페 AS6060) 그의 발은 존경과 신뢰다. 예쁘고 매력적인 ‘코’다.
출산공포 Birth. 시그네 바우먼, 미국, 2009, 12분, 애니메이션(제공. 제주여민회,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

[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37 예쁜 자청비 여성들은…

예쁜 자청비 여성들의 경우, 이 여성은 억울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여성들에게조차 위험스러운 여성으로 인식되기 쉽다. 아직까지도 여성적인 성적 매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분위기에서 종종 자청비 여성은 그녀가 가진 여성적인 매력들로 인하여 많은 남성들에게는 물론 여성들에게도 원치 않는 시달림을 받을 수 있다.

그 흉흉한 16세기 마녀사냥의 시절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화장이란 신의 창조 위업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여인들의 화장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증대시키는 게 아니라 내부의 병, 음란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기호다.”라고 말했다. 예쁘게 화장하는 여성들은 마녀라는  것이다.

 

▲ 마녀들  The Witches. 엘리자베스 홉스, 영국, 2002, 7분, 애니메이션남성권력의 마녀 선별법과 사냥에 대한 풍자와 위트가 넘쳐나는 환상적인 애니메이션. (제공. 제주여민회,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

의도적인 반여성주의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순결함’ 또는 ‘죽음과도 같은 유혹’, ‘뇌쇄적인 유혹’ 등의 말들로 극단적인 뉘앙스를 풍기면서 우리 문화의 밑바닥에서 배회하고 있다. 여성 숭배와 여성에 대한 혐오가 동시에 여성 차별을 위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자칫 예쁜 자청비 여성들은 비본질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죄악으로 이끄는 원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그녀의 예쁜 코 자체는 그녀에게도 또 남에게도 좋다. 흔히들 말하는 남성스럽다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파워가 되듯 예쁘다는 것, 여성스럽다는 것은 여성이 가지는 중요한 삶의 파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예쁜 코’ 혹은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는 코’는 허욕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그녀를 쉽게 비난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예쁜 코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이지 그것 자체가 비난의 계기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지난한 노력을 해왔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그게 외모이든, 능력이든, 노력, 성실, 성격, 엉뚱함이든 ‘확장된’ 예쁜 코가 한두 개쯤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 100개의 다른 코 Flawed. 안드레아 도르프만, 캐나다, 2010, 10분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성형외과 의사를 만나면서 주인공 안드레아는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외모과 자존감 둘 모두를 가져가기를! (제공. 제주여민회,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

 

 

▲ 박지성의 발.(네이버카페 AS6060) 그의 발은 존경과 신뢰다. 예쁘고 매력적인 ‘코’다.

물론 통제되지 못하는 과잉 자청비 여성의 경우 성적이고 관능적인 매력만으로 남성들을 유혹하여 남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파괴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 과잉 자청비 여성들은 외모의 성적 매력만을 유일한 그녀의 것으로 삼기 때문에 그녀의 나머지 인격들을 모두 파묻고 만다. 이런 과잉 자청비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단장한 예쁜 매력을 인간적인 관계들 속의 매력으로 가져가는 자존감이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 매력을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사물로, 상품으로 쓴다하더라도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녀 혼자만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으며, 선택은 순전히 그녀 자신의 몫이다. 다만 여신 자청비처럼 ‘자신으로 가는 길’ ‘타자와 함께’라는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드 보봐르는 ‘타자’로서의 여성의 정체성, 그리고 여성이 당하는 근본적인 소외가 부분적으로는 여성의 몸, 특히 출산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래서일까?, 자청비에게는 아이가 없다. 바라보기에는 그지없이 완벽한데도 자청비 여신은, 지금까지도 자신을 지키지가 어려웠는데 출산으로 인한 소외까지 극복하고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 것이라 생각했을까?

▲ 출산공포 Birth. 시그네 바우먼, 미국, 2009, 12분, 애니메이션(제공. 제주여민회,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

결혼은 여성의 차별과 소외를 무수히 제조해내는 현실의 엄연함으로 존재한다. 살고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가 날이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보편적 결혼제도 속하지 못하거나, 그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자청비 여성들이 여러 형태로 늘어만 간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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