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철 칼럼] 청산되지 않은 유신잔재...'부마민주항쟁'33주년 유감
 
1979년 10월17일 오후6시 항도 부산의 중심지인 광복동 일대 극장가.
 
일단의 군중속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일절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을 뚫고 터진 함성, "유신철폐,독재타도..."

그야말로 그 누구도 말하지 않던, 아니 당시로서는 도무지 입밖에 꺼낼 수 없는 말들이 함성으로 쏟아져 나왔다. 7년에 걸친 유신치하에서 가래가 끌어도 감히 뱉지 못하던 말들이었다.
 
함성과 함께 동시다발로 인근상가에서 일제히 셔터를 끌어내리는 소리도 요란졌다. 그러나 상가셔터 대부분은 완전히 내려지지는 않았다. 진압경찰에 몰린 시위대들이 몸을 굴려서 피신할 정도의 공간을 남겨두고서 였다.
 
그랬다.인근 국제시장 상인들을 비롯한 부산시민들은 이들 시위대의 거사를 대강은 눈치채고, 또 공감하고 있었다. 전날 유신선포 7주년을 전후해 시내일원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었기 때문이다. 부산대생을 필두로 동아대 재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이들 시위대들은 이날 사전 내통을 하고 17일 이곳에 집결, 대규모시위를 벌이기로 했었다. 그리고 그날 외친 '유신철폐'등의  구호는 10월유신이후 집단시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시위대들은 진압경찰에 몰리면 상인들이 틈새를 남겨놓은 셔터문 안으로, 또는 뒷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골목을 다시 빠져 나올때 쯤이면 시민들이 벌떼처럼 가세했다. 마치 모택동군대가 장개석군대에 밀려 도망칠때마다 그 세력이 2배 3배로 늘어나듯 했다.
 
유신철폐를 외치는 함성은 시내일원으로 확산되어갔다. 진압경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시위는 밤새 이어졌다.
 
18일새벽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서는 시청앞을 중심으로 시위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일대 간선도로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그래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진압경찰은 이미 구경꾼이 되어 있었다.그리고 이때쯤해서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함성은 "4.19혁명"의 성지인 마산으로도 크게 번졌다.
 
그날 오후가 되면서 상황이 다시 반전됐다.

장갑차를 앞세운 일단의 공수부대가 시청앞으로 밀고 들어오면서였다. 총검술을 하듯, 착검한 총을 좌우로 흔들어 대자 시민들이 밀려 나갔다.그리고 무장한 군인들이 간선도로변에 쫙 깔렸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는 것도 두려울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계엄군들은 대학캠퍼스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눌러 앉으면서 시내 일원이 살벌해졌다.

부산에 이어 마산지역에는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시위의 함성이 잦아 들었다.(여기까지가 그날 필자의 현장 목격담이다.)
 
항도 부산과 마산의 그날의 함성은 수도 서울로 메아리지면서 큰 일을 내고 말았다.

부마항쟁이 있고 일주일 뒤 이른바 '10.26 사태'가 벌어지면서다.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측근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것으로 유신체제는 벼랑끝으로 밀리는 듯 했다.
 
김재규  그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했다. 마치 로마시대 부르터스가 공화정회복을 위해 친구인 시저의 심장을 찔렀음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정말 '서울의 봄'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로마의 공화정회복도, 유신체제 청산도 그들의 말처럼되지는 않았다. 유신의 심장은 사라졌어도 그 체제는 이어졌다. 유신체제를 발판으로한 제5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였다.
 
전두환의 5공체제는 그야말로 유신2기 체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부마민중항쟁이 무력에 무력함을 간파했던 것일까.
 
부마항쟁 7개월후에 이어진 광주민중항쟁마저 피로써 진압했다. 그러고는 '전반기 10월유신 7년'에 이어 후반기 5공철권통치 7년을 이어갔다.
 
암울했던 시대가 마감되는 듯 했다. 6.10민중항쟁과 6.29항복선언이 이어지면서다. '5공청산,광주청문회'등이 열리면서다.

그러나 이땅에 유신체제의 종말의 단초를 제공한 부마민주항쟁은 여전히 역사속에 파묻혀 가고 있다. 그 흔한 청문회 한번 열리지 않고서다. 그건 아마도 6.29선언이후 달라진 선거지리학, 정치지리학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고려시대 무신막부통치가 무너지듯 유신체제'는 무너지고 국민주권시대가 열리기는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민주항쟁의 열매는 항복한 당사자들의 몫이 됐다. 거기에 3당합당으로 정치지형이 사뭇 달라지면서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뒤이은 광주민주화 운동마저 빛이 바래지고 있다.

유신잔재와 그 동조세력이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다. 청산되지 못한 유신잔재가 그날의 함성을 잠재우고 있다는 말에 다름아닐터.
 
때가 때여서인가.엊그제 '유신의 심장'과 지근거리에 있던 여당후보가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33주년을 맞이하는 부마항쟁 현지 기념식에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참석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대변인을 통해서는 부마항쟁의 숭고한 뜻에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주최측의 반발로 기념식 참석은 없었던 일로 됐다. 대신 참석을 검토하던 여당후보가  한말씀 더 올렸다.

"위로의 말씀과 함께 부마민주항쟁의 진상규명 노력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고홍철 <제주의소리> 대표이사.

유신의 중심에 함께 있었던 장본인으로서는 다소 외람된 말이다.

공식사과라면 모를까, 위로라니 그 자격이 되는가. 진정성 여하야 어찌됐든 그들의 말대로 부마민주항쟁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는 사람들의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훈련장의 조교처럼 허리춤에 손을 얹히고 '통합 앞으로'로는 그 뜻을 이루기가 어렵다. 본시 지도자의 길은 '여유를 덜어 부족을 메꿔주는 것'이라고 하지않는가.

어찌 부족한 마음들을 빼앗아 여유를 보태려 하는가. 정말 여유가 없어서인가. / 고홍철 <제주의소리> 대표이사

<고홍철 대표이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