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44 ‘지 까짓게, 요 정도쯤이야’

차별화의 지배구조는 남녀의 활동, 신체나 성행위의 인식을 구조화하는 표상들, 언어 행위에도 곧바로 나타난다.

여성들의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감추고 닫아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성행위는 윗부분은 움직이며 땅에 고정되어 부동적인 하체를 지니는 맷돌과 비교되거나 또는 왔다갔다하는 빗자루와 집과의 연관에 비교된다. 위의 맷돌은 부지런히 돌면서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움직임, 생산성의 원초로서 에너지의 상징이고, 능동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여성 즉 아래 맷돌은 움직이지 않으며, 비어 있고, 주는 것을 마시는, 수동적인 이미지다. 빗자루 역시 움직임의 상징이며, 집은 빗자루가 왔다 갔다 하는 고정된 공간이다.

켈트와 게르만의 신화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는 영화에서도 그 신나는 빗자루를 타는 것은 남자 아이의 몫이다. 여자가 빗자루를 타면 ‘마녀가 탄 빗자루’, 마녀가 되었다.

몸가짐의 구조도 남성지배의 원칙에 따라 정해져 왔기는 마찬가지이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에는 약하게 움츠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여성답다고 훈련된다. 낮추고 내려다보며 고분고분 하도록 요구된다. 치마를 입는 게 여성답다 해왔고, 치마를 입는 것만으로 다소곳해졌다.

그러나 가믄장아기는 아버지에다 대고 고개를 내리깔지 않고 치켜들었다. 조근조근 대답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으며 능동적으로 행동했다. 높음과 낮음의 일방적인 구분에서 그녀는 낮음의 자세에 머무르지 않았다. 힘이 약하고, 아직은 어린 여성의 육체 상황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힘센 남자들만 드글거리는, 기득권이 지배하는 밖으로 당당히 나갔다. 어른 여성, 어머니가 ‘식은 밥이라도 물에 먹고 가라며’ 그녀의 출가를 몇 번이나 방해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밖으로 나섰다. 동료 여성, 귀여움을 받았던 가믄장을 시기했던 언니들은 청지네와 버섯으로 만들어 버린다. 배꼽아래 선그믓 덕으로도 행동하기도 한다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을 시기하는 것, 그것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청지네와 버섯처럼 기어 다니고, 음지에서 자라고, 숨어 사는 꼴이라는 따끔한 일침이었으리라.


힘없는 여성이라는 신체를 가졌기 때문에 무거운 것은 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남성 원칙들이 만들어 놓은, ‘난 못해’의 자세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난 잘 못하겠다’-모른척 함, 못하는 체함, 약해 보임, 움츠러듦, 소극, 숨김, 양보, 포기, 조신함과 연결되는 자세보다는 ‘흥, 이 정도쯤이야’하는-해 보려 함, 덤빔, 드셈, 극복, 도전, 적극, 용감 등과 연결되는 자세를 선택한다. 시선을 내리깔고 안으로 숨어들면서, ‘난 잘 모르겠다’는 자세로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밖이라는 공중으로 나와 ‘지 까짓게, 요 정도쯤이야’라면서 정면으로 돌파하고 부딪치는 자세를 취한다.

 

▲ 해녀 사진(출처/ 제주의소리).

가믄장아기 여신 원형은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데 있어서도, 고정된 시선에 종속되지 않고 훨씬 단순하고 직접적인 판단과 표현을 한다. 가믄장아기는 ‘이렇게 말하면 부모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거두고 자신의 상태와 생각에 대한 정직한 표현을 했다.

그녀는, 어쩌면 남성지배가 유포한 것일 수 있는 애매모호하고 단순하며 종잡을 수 없는 여성적 언어 표현보다는, 직접적이며 시원시원한 표현을 즐긴다. 내쫓김을 자초한 그녀의 언어는 여성이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심성과 태도로서의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저항의 언어였다.

저항적이고 도전적인 그녀는 남편(남성)이 없어도 스스로 완벽하다. 남편의 존재여부가 그녀의 존재에 타격을 주지 않는다. 있어도 있으나마나다.
인간으로서 그 누구에게 종속되는 것이 싫고 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는 남성지배의 세상이 원하는 바의 여성적 매력을 갖추려 애쓰지 않는다. 못하는 척, 모자라는 척 하면서 뒤로 물러서거나, 남성에 대해 여성적 애교를 떠는 모습은 그녀들 생전에 찾아보기 어렵다. 행동도 투박하며 부드러움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생활력 강하고 독립적인 그녀들은 점점 힘도 장사가 된 듯하고, 목소리도 크고 걸음걸이도 크다.

 
허구헌날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산만 겨우 해왔던 밭을 새로 일구고 부자로 만들어낸 가믄장 여신은 남성들보다 더 용감하게 쟁기로 밭을 갈고, 머리를 짜내며 살림 시간을 관리하고, 저승과도 같이 까마득한 바다로 자맥질하면서 바당밭을 개척해 내었던 도전적인 제주의 해녀들, 집안의 장롱을 옮기거나 전구를 갈아 끼우거나 하는 일을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혼자 후딱 처리해내는 투박한 제주 여성들의 원형이다. / 김정숙.

*참고 
피에르 브르디외, 「남성지배」, 김용숙 주경미 옮김.
FORESEEN 연구소, 「여성적 가치의 선택」, 문신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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