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권력에 해학과 풍자로 맞서면서 독자들에게 짜릿한 통괘감을 안겨주는 시사만회. 제주언론의 대명사인 '황우럭'이 30일자로 1만회를 돌파하는 기록을 달성했다. 그 주인공 양병윤 화백(68)을 만났다. ⓒ 제주의소리
[이재홍이 만난사람] 시사만화 '황우럭' 1만회 돌파-44년 시대정신 껴안은 양병윤 화백

70~80년대, 아니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언론사 편집국은 늘 뽀얀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방문객들이 “아이쿠!”할 정도로 편집국, 기자 옆에는 늘 담배가 따라다녔다. 그 중에서도 편집국 한편에서 벙거지 모자를 쓴 화백은 연신 담배연기를 빨아들인 후 다시 하얀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반복한다. 마감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그 동작은 더 민첩해진다.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후배기자들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저럴까”라고 중얼거린다.

언론사의 꽃이 기자라면, 기자들이 만들어 내는 신문의 백미는 단연 ‘시사만화’다. 그날의 뉴스를 압축한 엑기스를 독자들에게 가장 빠르고 쉽게, 그리고 해학과 풍자를 담아 그려낸 게 네컷 만화와 만평이다. 언론탄압과 검열이 극심했던 일제시대와 70~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검열관의 눈을 피해 국민들에게 해학과 풍자를 가져다 준 게 시사만화였다. 특유의 과장과 풍자를 곁들인 저항정신으로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독자들에게는 짜릿한 통쾌감을 가져다줬다.

누구나 다 쓰는, 때론 안 써도 때론 붓을 조금 휘어도 누가 뭐라하지 않는 기사와 달리, 그 넓은 지면에 딱 하나 밖에 없는 시사만화는 싫어도 절대권력에 맞서야 한다. ‘똑같은 기사’는 논조와 컬러가 다른 신문이라도 매일같이 실리지만, 시사만화는 365일 단 한 번도 같은 게 있을 수 없다. 운명이다. 절대권력에 맞서면서도 그 누구와도 어께동무도 할 수 없는 시사만화엔 그래서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제주 시사만화의 대명사이자 독자.서민들의 절친한 벗인 ‘황우럭’이 30일자로 1만회를 돌파했다. 1968년 5월10일자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사회면 상단에 4컷만화로 독자들에게 첫 인사를 한 양병윤(68.한라일보) 화백의 시사만화 황우럭이 44년 영욕의 세월을 제주인의 삶과 함께 하면서 제주언론사에 큰 족적을 새겼다.

황우럭 1만회 돌파는 우리나라 시사만화에서  ‘고바우영감(김성환, 1만4139회)에 이은 두 번째 장수기록이다. 국민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왈순아지매(정운경, 8829회), ‘나대로선생(이홍우, 8499회)을 훌쩍 넘었다. 특히 넷 컷과 만평을 함께 연재한 화백은 처음이란 점에서 한국언론사-시사만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기자는 지난 2007년 10월 9천회를 넘은 양병윤 화백을 단독 인터뷰 했다. 그 때 “1만회때 다시 한 번 인터뷰 할 기회를 꼭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5년이 흐른 29일 제주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언론계 선배인 양 화백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인터뷰 할 수 있었다.

“황우럭, 비록 40대 소시민 가장이지만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언제나 할 말 하는 싸나이”

- 1만회 놀랍기만 하다. 만평(漫評)-1만(萬)회, 가득찰 만(滿)처럼 인생의 무엇을 가득채운 느낌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1만 회까지 그려야지 하는 것보다 매일 독자들과 약속을 지켜야지 생각했다. 불특정다수에게 나 혼자의 약속을 지키는 거다. 매일 그림으로써 독자들이 보고 거기서 비판도 하고 잘못된 것은 질책도 하는 그런 걸 매일 느낀다. 잘 그렸다 성원도 해주고, 오늘 그림은 안됐다는 것도 말해준다. ‘가득찰만(滿)’이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비어있어야 거기서 배우는 거다. 만화 자체를 조금 비우는 심정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야 독자들이 빈공간은 채워 넣기도 한다. 너무  꽉 채워버리면 그림 설명밖엔 안 된다. 공감을 가지려면 ‘이런 뜻 이구나’ 비어있어야 서로 공유할 수 있다.”

- 시사만화인생 44년, 황우럭 나이도 이제 불혹(不惑)을  훌쩍 넘어섰다.

“황우럭을 통해서 내 삶과 인생을 돌이켜봤다. 황우럭은 40대 중반 남성이고 가족 구성은 자녀 둘~셋,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가스 값 때문에 고민도 하는 아주 착한 소시민이다. 노인문제를 다룰 땐 아버지가 등장하고, 어린이들이 나와 교육 문제도 다룬다. 40년전도 그랬지만, 지금도 왕성한 활력을 하면서도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이 많은 그런 평범한 샐러리맨이 황우럭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문제나 환경문제를  접하다보니 작가 입장에선 마음을 비워야 했다. 황우럭이나 저나 유한적이다. 살이 잇는 동안 작품은 계속 그리고, 황우럭을 통해 날카롭게 비판을 하지만, 작가입장에선 항상 부드럽고 사람들을 칭찬할 때도 아끼지 않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었다. 황우럭은 아주 소시민이민서도 부정부패가 있을 때 뛰어드는 데, 저는 누군가 저를 비난할 때도 이젠 웃으며 넘기게 된다. 나이 들어가니 그런 것 같다.”

- 황우럭은 직장, 부모,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소시민이면서도 불의를 보면 못 참고 한 마디 내뱉는 캐릭터다. 가공이라고 하지만 체험하지 않으면 나타내기 어려운데. 

“요즘 문학은 ‘참여 작가’가 대세라고 하는데 작가는 작품으로 참여를 한다. 나보고 ‘왜 한마디 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나는 작품으로서 이야기 한다. 잘못했다 잡혀가서 감옥에서 낄낄 웃어도 결국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거다. 주변에선 나 보고 분기탱천(憤氣撐天)이라고 하는데 분노를 드러내기 보다는 작품으로 터트린다. 그게 작가다.”

▲ "솔직히 1만회까지 오리라곤 생각지 않았다"고 말하는 양병윤 화백. 시사만화 '황우럭'의 1만회 돌파는 그와 독자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 제주의소리
- 40여년 전으로 돌아가면 어렸을 적하고 싶은 건 뭐였나.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초등학교 때 교실 환경미화를 하는데 뒷 환경미화판은 내 그림으로 매달마다 바꾸면서 걸었다. 골목에서 자치기를 하다가도 막대기로 땅에 그림을 그릴 정도였다. 중학교때 월간지 ‘학원’이 있었다. 문충성 교수, 소설가 현기영, 현경대 전 국회의원이 그 때 여기에 시나 산문을 썼었는데, 김용환 화백의 ‘코주부 삼국지‘를 보면서 그림연습을 했다. 중학교 때문 활동사진도 직접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미대를 원했는데, 아버지가 보내주질 않아 서울에 잇는 ’아리랑‘이란 잡지에 지금으로 독자투고 형식으로 만화를 그리면서 제주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주신문 김선희 사장과 최현식 편집국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 기자겸 화백으로 발령을 받았다.”
“양병윤 보다 황우럭이 더 유명, 오죽하면 양씨 문중에서 횟집으로 호적 파가라고 할까”

- 시사만화 캐릭터 황우럭은 아주 독특하다. 양병윤보다 황우럭이 더 유명하다. 어떻게 나오게 됐나.

“그때만 해도 우럭이 아주 풍성할 때였다. 동네에서 ‘우럭 몇 마리 낚아오라’고 했으니 말이다. 제주도민에게 친한 생선이다. 고등어나 갈치랑 달리 제사상에도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가시가 있다. 부정과 비리를 쏘아붙일 수도 있고, 서민들의 가려운 곳도 긁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우럭에도 검은우럭 돌우럭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붉은색을 띠는 황우럭으로 했다. 워나 오래되다 보니 ‘황 선생님’ ‘우럭이 형’이라고 부른다. 이름과 캐릭터를 헷갈려 양·우럭, 황·병윤이라고도 했다. 오죽했으면 양씨 문중의 친한 분들이 ‘양씨 호적 파서 횟집으로 가 버리라’는 농담을 했을 정도다.”

- 굳이 꼭 그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시대정신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왕왕 있을 것 같은데.

“제주신문에서 편집국장 할 적에 외사촌형이 택시회사 사장이었는데 가짜 개인택시면허 사건으로 구속됐다. 10년 무사고여야 개인택시자격을 주는데 7년밖에 안되는 직원의 부탁을 받고는 ‘열심히 일한 직원’이라서 아무런 대가 없이 자격을 줘버린 것이다. 사회면 4단으로 크게 편집이 됐는데, 담당기자에게 ‘외사촌형이어서 고민’이라고 했더니 ”뺄까요“ 물었다. 빼고도 싶었지만 이니셜만 N회사, 김모 대표로 그대로 나갔다.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데 외가에서 엄청나게 욕을 해 한 동안 다닐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직업이기 때문에, 내가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 지난 후에야 외사촌형이 ‘친척들이 너를 욕해도 나는 아니다. 너가 우리보단 더 속이 아팠겠다’고 오히려 위로하더라.”

- 제주는 좁다보니 하나 건너 친척들이고 선후배들이다. 어떨 때 참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때론 기자란- 화백이란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때도 많았을 것 같은데.

“평소 나와 잘 알고 지내는 도청 3급 고위공직자가 뇌물 비리에 연루돼 구속됐다. 소로 호감을 갖는 사이였지만, 공익을 위해 그 이야기를 그렸다. 당연히 형(刑)을 살고 나온 후에도 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려놓고도 인간적으로 미안했다. 사라봉에서 운동갔다가 만났지만 그분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후에야 막걸리 한잔 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풀었다. 그리고 그 이후엔 다시 친해졌다.”

▲ 독자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반면, 다른 한편에겐 욕을 들어야 했던 시사만회. 양병윤 화백은 군사독재시절 겪은 고초를 이야기 하면 아직도 분이 떨린다. ⓒ 제주의소리
“중앙정보부에서 조사 받다가 멱살 잡고 싸운 이유? 시인하면 졸지에 간첩되는데...”

- 반면, 권력으로부터 탄압받고 모진 고초를 겪었던 일들도 한두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70년대 아주 살벌한 때였다. 그땐 간첩을 신고하면 1천만원을 줬는데, 조천 주민이 같은 마을에 2년쯤 살던 고정간첩을 신고했다. 중앙방송에 날 정도로 거물로 보상금 1천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엔 간첩이 소지한 돈도 신고한 사람에게 주게 돼 있다. 그 간첩이 소지한 돈이 500만원이었는데 그걸 받지 못했다가 1년쯤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고 중앙정보부에 가서 돈을 주라고 했다. 이분은 중앙정보부를 동네 파출소쯤으로 알았던 거다. 세 차례나 찾아가서 돌려달라고 하니 나중엔 욕만 듣고 돌아왔다. 하도 억울해서 신문사에 그 사연을 털어놨고, 먼저 1970년 10월17일자에 김규필(작고) 기자가 사회면 2단기사를 썼고, 그리고 내가 네컷 만화를 그렸다. 만화는 간첩신고를 후 보로금을 기다리면서 중앙정보부를 향해 목이 기다랗게 나온 것을 그리고는 ‘목이 닷발은 빠지겠네(학수고대)’라고 썼다. 중앙정보부가 발칵 뒤집혀 다음날 최현식(작고) 편집국장과 김규필 기자, 그리고 나를 불렀다.
조사를 받는데 두꺼운 파일을 꺼내 놓고는, 어릴 적 한번 정도 본 기억이 있을까 말까하는 조총련계 고모부가 있는데 ‘고모부와 내통해 만화를 그린 게 아니냐’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졸지에 간첩이 되는 거다. 처음에 조용히 이야기 하다가 자신들 뜻대로 안되니 나중엔 윽박지르고, 악질이라며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냐’며 쌍욕을 해댔다. 나도 기죽지 않고 ‘죽어서 어떻게 정신을 차리냐’고 대들고 나중에 서로 멱살잡고 싸움을 벌어졌다. 숙직실에 있던 안기부 직원에 달려와서 겨우 말리고, 나중에 제주지부장이던 박재만씨와 만나서 서로 화해하는 난리를 겪었었다.”

- 전두환 신군부시절 언론탄압이 아주 극심했던 것으로 안다. 보도검열로 군인의 허가를 받아야 신문을 발행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참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보안사 상사가 제주신문 담당을 맡아 편집국장 옆에 앉아 상주했다. 편집하기 직전 최종 편집된 신문을 갖고 도청에 있는 검열단에 가서 검열을 받은 후에야 인쇄할 수 있었다. 황우럭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너무 리얼하게 그리면 통과되지 않기 때문에 비유하고 은유법을 써야했다. 그래도 의식있는 독자들은 메시지를 알고 ‘좋았다’고 전화가 온다. 한번은 김정남 검열관(대위)있었는데, 전날 그대로 나간 만화 때문에 계엄소 소장(중령)으로부터 엄청나게 혼이나 다음날 만화내용을 바꿀 것을 요구해, ‘백지로 나가면 나갔지 못 고친다’고 버텼다. 내심 한번 백지로 나갔으면 했다. 그런데 백지로 나가면 더 큰일이기 때문에 결국 그대로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 내가 편집국장할 때 전화가 왔는데, ‘존경한다’고 하더라. 미국에서 목사가 됐더라.”

▲ 양병윤 화백이 말하는 언론정신? 그는 언론이 권력과 자본에 야합하는 건 범죄라고 단연코 말한다. ⓒ 제주의소리
- 정말 힘든 과정을 이야기했는데 시대를 관통하는 화백으로서 언론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언론에 몸담은 지 40여년 됐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우리가 어릴 때 ‘하지 말라. 하라’고 하는 게 있다. 언론이 철저하게 하지 말아야 될 일은 ‘야합’이다. 권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민중에 의해 크는 게 권력이기에 좋은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특정인을 위해 움직이고 언론이 거기에 춤추는 건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그런 일이 부지기수다. 그런 것을 경계할 수 있는 내재된 저력이 언론엔 있어야 한다. 요즘보면 제일 슬픈 게 메이저언론이 오히려 권력과의 야합에 앞장선다. 방송인 김미화씨가 무슨 죄가 있나,  김제동은 또 무슨 죈가. 노무현 대통령 노제 사회를 봤다고 방송 출연도 안 시키고 아직도 멀었다. 그런데 기자들이 앞장서 버린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야합에 앞장서는 건 범죄다. 공범이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야합 유혹을 받더라도 참아야 한다. 언론이 힘은 계도하는 건데, 요즘은 언론보다 시민사회단체가 그 역할을 더 충실히 하고 있다. 구닥다리 같은 이야기지만 ‘어느 기자 젠틀하다. 신사다’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젠틀하다, 신라란 말에는 야합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김미화.김제동이 무슨 죄졌냐. 언론이 권력과 야합해서 춤추는 건 심각한 범죄다”

- 예전엔 언론이라 존경을 받았고, 집안에 기자가 있으면 자랑이기도 했는데, 이젠 평범한 직장중 하나일 뿐이고, 언론인들도 샐러리맨이 돼 버리고 있다. 왜 이렇다고 보나.

“언론사 자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다 보니 행정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어쩌란 말입니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아니로소이다‘라고 해야 한다. 출입처에 가면 편한 마음 가지면 안 된다. 기자는 늘 고민하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기자라는 자긍심과 더불어 어떻게 좋은 기사를 쓸까라고 항상 고민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때론 가정에 등한시 할 때도 있지만 이해 시켜야 한다. 돈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돈이 있어 거들먹거리기 보다는 생활에는 쪼들리지만 그래도 당당히 사는 모습을 가족들은 더 원한다. 우리 집사람은 저보고 ’당신 언제 철들 거냐‘고 묻는다. 집사람이 보기엔 아직도 철이 없어 보이는 거다. 그런데 ’철든다‘게 뭔가. 언론인이 철든다는 건 시대와 타협해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철‘이 들어버렸다면 그 많은 유혹 어떻게 넘기겠나. 그리고 나중에 자식들 얼굴을 어떻게 보나. 그렇게 보면 철안은 게 결국은 철 든 거다.”

인터뷰 도중 1만회 돌파를 축하하는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양 화백. 30일 저녁에 뭐할거냐고 물었다.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저녁먹고 성당에가서 기도드리려고 한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 제주의소리
- 후배 언론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부탁드린다.

“다변화된 의식이 필요하다. 권력과 자본에 대해선 항상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지니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기자는 특수한 직업이다. 내가 쓰는 기사가 사회를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고 항상 신중하고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폭력배들이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을 나쁘다고 하는데 더 나쁜 게 ‘말(言語)’이다. 그런데 폭력 중에서 가장 나쁜 폭력은 ‘오보(誤報)’라는 활자폭력이다. 언론인들이 오보에 대해 대충 넘어가려 하는데, 오보는 스스로 가슴 아파해야 한다. 사과하는 정정 기사도 크게 내 줘야 한다. 상대방의 인권문제를 생각하고 자기 잘못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1시간30분에 걸친 인터뷰 막바지에 이르러 양 화백에게 언제까지 그림을 그릴 거냐고 물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즐거우니 계속 그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이 70을 앞두고 젊은이들과 소통하려고 젊은기자도 만나고,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지만, 내 스스로 아이디어가 진부하다고 느껴지면 그때 그만 둘 것”이라고 말했다. 1만회 전혀 다른 1만 작품을 한결같이 그려왔던 것처럼 ‘항상 처음처럼’ 임하고 싶다는 원로 화백의 소망이었다.

1만회를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는 없다. 내년 3월 그들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두 권의 책을 발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몸담고 있는 한라일보에서 30일 기념축하연을 열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많은 이들이 1만회를 맞았다고 축하전화도 오고 그러는데,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다. 내일(30일)은 퇴근하면 그동안 나와 함께 해준 가족들과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함께 성당에서 기도드리며 그렇게 쉬고 싶다. 그렇게 하고 싶다.”  <제주의소리>

<이재홍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