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머리띠를 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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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45 가믄장아기 원형4

가믄장아기 원형은 여성해방의, 인간해방의 선구자다. 자청비와 달리 그녀는 머리띠를 두른 모습이다.
머리띠를 두른 그녀는 체제유지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삼종지도의 가치관 맹목적인 효도주의 가족주의 장유유서의 질서와 같은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한다.


자청비의 여성해방, 인간해방에 대한 동기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가 불평등한 성차별을 느끼게 된 계기는 자신의 사랑을 성취해 나가는 대 남성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 한 인간 안에 여성차별을 비롯한 사회의 모순이 사랑의 와중에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을 통해 적나라하게 갈등과 모순을 겪어내야 하는 일은 더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고통도 감내하게 하는 사랑이란 것이 있었다.


가믄장아기의 여성해방, 인간해방에 대한 동기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존 사회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다.
가믄장아기는 ‘내 배꼽 아래 선그믓(음부, 자궁) 덕으로 먹고 산다’고 아버지에게 저항한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에게, 이어서는 남편에게, 또 늙어서는 아들에게 꼼짝없이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는 해당 사회의 문화, 삼종지도의 여성 정체성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지배관념에 저항하며 밖으로 나온다. 밖은 아버지가 집단적으로 구현되고 통째로 구조화된 사회다. 그녀는 그 견고한 세상으로 나오면서 ‘물에 말아 식은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윗세대 어머니의, 세대를 따라 전해져온 두려움과 걱정을 이겨내야 했다.
적들은 가까이 있었다. 가믄장아기가 떠나버리면, 남은 자신들의 지위가 좀 더 확고해질 것이라는 떡고물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면서 동생을 집밖으로 떠미는 언니들의 속물근성에도 한 방 가해야 했다.

 

▲ 피를 나눈 적(모르 요게브, 이스라엘, 2010, 20분) 스틸사진.오빠에 의한 성추행과 원한 속에서도 가족, 여성으로서의 굴레를 쉬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루스.(출처/ 제12회 제주여성영화제)

가믄장아기는 머리띠를 두른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에 저항하고, 그 질서의 현현인 가족관계를 잘라내고, 반대되는 동료들에 대해 일갈한다. 그 속에서 따뜻함, 동정심, 조화와 안정, 배려와 양보 같은 심성을 단호하게 버린 것 같은 가믄장아기의 페미니즘은 가깝게, 멀게 여러 측면에서 비난받기 쉽다. 댓가도 없이 전 생애에 걸쳐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자청비의 페미니즘은 사랑이라도 얻었지만, 가믄장아기가 겪는 어려움은 신화에도 나오듯 ‘이 재 넘고 저 재 넘고 신산만산 굴미굴산을 넘는’,  ‘달빛도 없이 미여지벵뒤 만여지벵뒤(허허 벌판)’를 걸어가는 고난인 것이다.


힘든 길을 선택한 그녀의 정체성에는 전도된 가치들을 완강히 거부하는 진보적인 모습이 있다. 무기력과 타성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악습이 되어가는 차별적 규범과 제도들에 대해 저항하고 그 저항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불이익과 고통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차별이 가해진다면, 그게 억울하다면  저항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방해가 되는 것들은 밀쳐내고, 같이 못 간다면 혼자서라도 가야하는 길이었다.

대가나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 그녀의 미래는 불안하다. 아무도 가지 않는 깜깜하고 울퉁불퉁한 샛길로 들어서서 그녀는 막히고 되돌아가야 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가믄장과 같은 샛길족들에 의해 무수한 길들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그 길들을 가고 있고, 큰길이 되어가고 있다. 샛길족 가믄장에게, 힘들고 불안하다 하여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보인다.   

 

▲ 2011년 말에 공연된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스틸사진 (출처/네이버블로그vjshot).

자신을 불안하고 위험하게 만들면서 행하는 이 위반과 저항은 결국 그 사회와 그 사회의 관계들을 개안, 개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믄장의 부모는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가난한 가믄장과 막내마퉁이는 부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부를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살피고 나눈다. 그런 진보의 핵심에 가믄장아기 원형들이 있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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