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의 숨, 쉼] 때로는 필요한 싸움도 있다

나는 싸움을 할 줄 모른다. 학교 다닐 때 가정통신문에 늘 소심하다는 표현이 따라 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싸우겠는가.

나는 큰 딸이고 동생이 세 명이나 있다. 형제들은 보통 싸우며 큰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동생들과도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 못했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나는 100전 100패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러니까 동생들이 나를 얕잡아 본다고 엄마는 무지 속상해하셨다.)

사춘기, 엄마보다 키가 부쩍 커지기 시작하면서 남들 다 한번 씩 해 본다는 반항조차 해 보지 못했다. 억울하면 벌써 눈물이 앞을 가려서.

결혼을 했다. 대한민국 남자 가운데서도 유명한 제주도 남자가 아닌가? 남편하고도 싸워보지 못했다. 물론 억울하기로는 말로 다 못하지만 그래, 네 말이 맞다. 짝짝짝 박수를 쳐 준다. 못 믿겠으면 확인을 해 보셔도 좋다.

이 소심한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흔하디흔한 형제간 싸움은 물론 부부싸움 한번 시원하게 못해 보았는데……. 그럼 가족을 제외한 모르는 사람들과는 싸울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제주도에 산다. 한 다리 거쳐 두 다리만 거치면 결국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되는 사이로 밝혀지는 곳에서 소심한 내가 또 어찌 싸운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싸움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 보인다.

그런 내가 얼마 전 국제적인 싸움을 해 버렸다. 내가 속해있는 여성단체에서 5박 6일간 대만에 갔었는데 카드로 결제한 호텔비가 과다 승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주거래 은행 신용카드 담당자의 말인즉 친구와 나눠서 결제했던 호텔 비 전액이 내 카드로 승인이 되었다고 했다. 친구한테 물어보니 친구 카드로 또 다시 절반이 승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씸한 생각에 화가 났지만 어찌어찌 집으로 달려와서 방문을 닫아걸고 대만 호텔로 국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가정통신문에 선생님이 써 주신대로 아주 소심하게.

 “저어~ 제가요....... 혹시 호텔 비를 잘못 결제하신 거 아닌가요?”

방 번호 날짜 이름 다 묻고 확인한 그 쪽의 대답은 “매이 여우(아니다)”였다. 나는 바로 기가 죽어서 그럼 다시 확인해 보고 전화하겠다며 물러났다.

그 다음 날 다시 은행에 갔다. 또 다시 기가 죽어서  “저어,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한데요, 이거 승인내역대로 그러니까 이 금액 그대로 다음 달 카드비로 청구되는 게 맞는 건가요?”
“그렇죠!”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직원의 말을 들으니 빨리 해결해야겠다싶었다. 순간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당당하게 대만으로 전화를 돌렸다. 호텔 직원이 실수로 내 카드로 전액을 결제하고 또 친구 카드로 반액을 결제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차저차 해서 우리가 호텔 비를 반씩 나눠서 결제하기로 했는데 왜 내 카드로 다 결제를 했느냐 당당하게 항의를 했다.

그런데도 그쪽에서는 더 당당하게 “매이 여우(아니다)”로 일관한다. 오히려 나더러 다시 한 번 잘 확인을 해 보란다. 자기네 쪽에는 아무 문제없단다.

나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내가 지금 은행창구 앞에 있는데 무슨 소리냐? 당신들 정말 이러기냐. 빨리 하나는 취소해라. 그렇지 않으면 부정사용으로 항의하겠다” 등 언성을 높였다. 은행 측에서는 잘 설득해서 그 쪽에서 두 번 결제한 것을 취소해주는 것이 가장 덜 골치 아프고 빠르다고 내게 권유를 해 주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심호흡을 하고 또 전화를 걸었다. 은행에서 받아온 카드 승인 내역을 펼쳐놓고 여차저차 다시 설명하였지만 호텔 측의 대답은 역시 “매이 여우!”다. 세 번째 “매이 여우!”에서 나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들이 일관되게 예의바르고 친절하다는 점, 꼼꼼히 확인해보고는 내 이메일로 결제 내역을 보내주겠다고 까지 하는 자신감, 이런 단서들 그것이다.

나는 이메일로 내역을 받았고 그들의 말대로 매이 여우! 아무 이상이 없었다. 맥이 다 빠져서는 은행 카드 담당이 아닌 신용카드 회사로 전화를 걸어 상담요청을 하고 확인한 결과 승인내역과 청구내역은 다를 수 있고 나의 경우가 바로 그 경우라는 확답을 받았다.

아, 이게 무엇인가 별로 유창하지 않은 중국어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은행 창구에서 국제적인 싸움을 해 놓고 이 모든 일이 은행 카드담당직원의 업무미숙으로 생긴 일이라니……
이 뭐꼬!

인생이란 절대적인 답은 없어도 수없는 물음표를 던져 우리에게 다양한 의미를 건져 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필연적으로 져야할 싸움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내 입장에서 보면 싸워야할 때가 분명했다. 그래야만 알 수 있는 지식이었으니. 나는 싸움에서 졌고 망신도 당했다. 대만 호텔 측에 죽게 사죄하는 이메일을 띄웠으며, 다시 대만을 방문하면 당신네 호텔을 이용하겠다는 서약도 했다. 망신살을 통해 나름의 소득을 얻었다. 내게는 절대 남에게 실수하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이 알게 모르게 있었는데 살다보면 나도 싸울 수도 있고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니 막혔던 숨구멍이 뚫린 셈이다.

게다가 보너스로 작은 물질도 얻었다. 은행 측에서 죽게 사과하며 우리 집에 놓고 간 쌀 한 부대, 이 쌀을 다 먹을 때까지 웃음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 산길(김희정). ⓒ제주의소리

무엇보다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세상에 절대 그럴 리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은행직원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으므로)이다. 혹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절대라는 자를 내밀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일은 없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절대에도 작은 숨구멍 하나쯤 뚫어놓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내 마음 자리 어디에 숨구멍이 안 뚫렸는지 점검해 보는 소중한 싸움이었다. /산길(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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