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성곽을 따라 침체된 도시들을 보면서 제주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길 바랍니다”
5일 오후 1시 ‘기억의 현장에서 도시의 미래를 보다’는 이름으로 제주시 원도심 탐방이 펼쳐졌다. 달마다 제주씨네클럽을 진행하고 있는 문화기획PAN(대표 고영림)이 마련한 자리다.
제주대학교가 현재 사대부고 자리에 있던 시절(1980년대)에는 남문로, 중앙로, 칠성로 등 이른바 ‘원도심’지역은 대학로와 다름없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쇼핑하러 가는 곳'일 뿐이지만 40대 이상에게는 골목골목이 추억창고다.
김석윤 김건축 대표가 이날 탐방 길잡이에 나섰다. 탐라도서관, 한라도서관, 현대미술관 등 지역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건축물이 그의 작품이다. 제주도 문화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날 코스는 칠성통부터 관덕정, 성내교회, 현대극장 등을 훑은 후 제주성곽, 오현단, 동문시장, 산지천까지 짜였다. 오후 내내 원도심 한 바퀴를 돈 뒤 저녁에는 제주영화예술문화센터에서 ‘사랑해, 파리’를 함께 관람하며 마무리 짓는 일정이다.
평일인데다 비까지 내렸지만 마침 방학이어서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들었다. 30여명 되는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대학생들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김 대표가 ‘칠성통’에 대해 설명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동문로터리 분수대 옆 골목길부터 중앙우체국까지 이르는 길을 기준으로 북쪽에 형성된 상가지역을 가리킨다.
김 대표에 따르면 산지항이 개항하면서 일제강점기부터 제주시 최고 중심 상가로 발전했다. 칠성로를 따라 제주도청, 제주경찰서, 법원, 제주세무서, 금융기관 등 주요 기관들이 모여 있는데다 지역의 유지들이 거주하는 덕분에 상권이 발달할 수 있었다.
김 대표는 “1950년대 들어서 양장점과 양복점들이 들어섰고 미용실도 있어 당대의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거리를 누비곤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골목만 걸으면 보고 싶던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김 대표는“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개발로 신제주와 일도지구 상권이 발전하고, 2000년대 이후에는 제주시청 대학로 주변 상권이 떠오르면서 이제는 텅 비어버렸다”고 설명을 보탰다.
김 대표는 목관아 역시 ‘문화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무인들의 연병장이자 관청 업무를 보던 곳이었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각종행사가 이뤄졌던 공간이다. 제주의 아픈 역사인 4·3의 시발점이면서 이재수의 난 시신을 수습했던 곳으로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곳”이라고 설명했다.
목관아에서 남문에 이르는 길인 ‘한짓골’과 ‘이앗골’은 조선시대부터 성안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해 늘 인파가 붐비는 곳이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덕분에 자연스레 크고 작은 문화·예술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지만 1980년대까지 제주의 중심으로 꼽히던 곳이다.
제주대학교 창업보육센터로 새로 짓기 위해 철거에 들어간 옛 제주대학교 병원 건물은 1910년 일제시대 자혜의원에서 출발해 1946년부터 도립병원으로 운영되다 1983년 제주의료원으로 전환된 역사적인 건물이다.
김 대표는 “최근에 원도심을 되살리려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접근 없이는 안 하느니 못하다. 지난 2011년에 구도심재정비촉진사업이 무산되면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려던 계획이 백지화됐다. 하마터면 이곳이 싹 사라질 뻔 했다”고 말했다.
이번 탐방 프로그램은 고영림 문화기획PAN 대표와 원도심에 위치한 대동호텔 아트센터 비아아트 박은희 관장, 게스트하우스 비엔비판의 신창범 대표가 의기투합하며 만들어졌다.
셋 모두 이곳에서 나고 자라 원도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뭍으로 나가 지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 이따금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어떻게 하면 원도심을 되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이번 탐방을 진행하게 된 것.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정기적인 프로그램로 키워갈 계획이다.
고영림 대표는 “이번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직장인들이 항의(?) 전화를 걸어왔다. 평일이어서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말에 한 차례 더 진행해볼 계획이다. 프로그램이 구체화되면 다양한 테마로 나눠 정기적으로 진행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