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릴레이칼럼(4)] 선배님! 다수당의 추악한 그림자에 숨어 현실을 방조하지 마십시오.

원희룡 선배님. 지방 일간지에서 짧은 기자생활을 경험했던 제가 의원님을 선배라고 부르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선배님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도 아니고 더더구나 서울대 근처에는 가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한 평범한 고향 후배입니다.

선배님은 한때 고향 후배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셨습니다. 학력고사 수석합격과 그리고 뒤늦은 사법시험 합격. 선배님의 학력고사 수석합격은 후배들에게 공부에 대한 열의를 일깨우는 자극제였습니다. 제 또래 가운데 공부 꽤나 한다는 친구들은 한두번 쯤 '제2의 원희룡'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그러셨죠. "야, 원희룡을 봐라, 너희들도 할 수 있어."라고요.
그런 선배님이였기에 선배님이 젊은 청춘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나라당을 선택했을 때에도 후배들은 선배님의 선택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선배님은 저희들에는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한나라당 소장파의 핵심주자로 당내 개혁에 앞장설 때만 하더라도 후배들은 선배님의 선택을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 고뇌에 찬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민들의 여망인 정치개혁을 위해 원내에 입성한 선배님의 뜻을 그나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배님. 지금 후배들은 3월 12일 국회에서 가결된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보며 하나 둘 선배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습니다.

탄핵안이 처음 논의됐을 때만 해도 후배들은 한나라당 소장파의 선두주자인 선배님께서 현명한 선택을 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임기를 불과 한달 남긴 16대 국회가 의회에서 행한 12일의 폭거. 그날 저는 하루 종일 쓴 소주잔을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발의를 할 때만 하더라도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은 이날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시던 선배님을 보면서 마음 한켠이 씁쓸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할 요구(김경재 의원님이신가요, 대통령이 사과를 하려면 사회 원로 등 취임식과 유사한 공개석상에서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하셔야 한다고요)를 내걸어놓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할 때만 해도 저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국민적 상식을 외면하지 않는 의원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배님에 대한 기대는 3월 12일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한나라당 개혁을 줄기차게 외쳤던 소장파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소장파들이 5·6공 세력 퇴진을 요구하며 '건전한 보수'를 외칠 때의 기대가 일말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12일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의원회관에서 4년 가까이 얼굴을 맞대었던 동료의원들을 의장석에서 강제로 끌어내릴 때, 그리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눈물로 울부짖을 때 선배님을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선배님이 주장하시던 '건전보수'의 길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까. 토론과 절차가 무시된 탄핵안 처리가 과연 선배님이 외치시던 의회민주주의였습니까.

한 때 저는 선배님의 지역구인 양천구에서 밥벌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목교 역에서 내려 선배님의 지역구 사무실을 볼 때마다 '그래, 제주인으로서 서울, 중앙 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의원이 여기 있구나'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 원희룡 의원이 제주출신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그 때 저를 만난 사람들에게 한 그 '상찬'의 말을 거둬드리려 합니다.

입법 기관인 의원의 개인적 주관보다 당리 당략을 따르는 한 초선의원의 행태를 보며 저는 선배님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이제는 접으려 합니다.

"선배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당당히 의견을 밝히십시오"

선배님, 지금의 사태를 불러온 한나라당 소속 의원으로서, 그리고 당내 개혁을 줄기차게 제기했던 소장파 선두주자로서 12일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당당히 의견을 밝히셔야 합니다.

"나의 정치적 소신은 이렇다"고 말입니다. 탄핵안에 찬성하셨는지 반대하셨는지. 탄핵안에 찬성하셨다면, 그리고 12일 국회 탄핵안 처리가 평소 정치적 소신이라면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배님은 다수당의 그림자에 숨은 채 현재의 혼란을 방조하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선배님의 정치적 소신인 '건전한 보수'는 물리적 힘을 내세운 다수당의 횡포 아래서는 자랄 수 없음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만약 계속해서 다수당의 그림자에 숨어서 '건전한 보수'라는 레토릭만을 남발하시다면 제주의 후배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 수사학의 거짓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배들은 선배님을 이렇게 기억할 것입니다. "한 때 수재였으나 이제 현실정치의 어두운 그림자에 숨어 배회하는 젊음을 가장한 노쇠하고 추레한 정치인"이라고. [김동현/인터넷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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