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도 이제부터는 은행을 보면서 해라. 예금자보호라는 관행은 옛말이다. 불량은행들이 예금자 보호를 믿고 찾아 오는 고객들 덕에 연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좋은 말이다. 장기적으로 은행의 건전화를 위해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변화를 처음 당하는 경우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지중해 동쪽 끝의 인구 100만 미만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공화국(국명은 현지어, 은행명은 영어발음에 따름)이 제물이 되고 있다.

형체가 드러나고 있는 100억유로의 키프로스 구제금융의 조건은 대형은행 한곳을 문 닫게 하고 거액 예금주들이 손실을 감수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은행을 살리기 위한 정부의 자금투입은 없다. 아일랜드나 스페인의 부실은행 문제를 다룰 때만 해도 예금에 손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구제금융의 상당부분이 예금자 보호를 위해 은행에 투입되었다.

뱅크 오브 사이프러스(Bank of Cyprus)와 사이프러스 포퓰러 뱅크(Cyprus Popular Bank)는 키프로스에서 가장 큰 두 은행이다. 폐쇄되는 사이프러스 포퓰러 뱅크의 10만유로 미만의 예금은 뱅크 오브 사이프러스로 이관된다. 그 이상의 예금은 배드 뱅크(bad bank)로 떠넘겨진다. 살아남는 뱅크 오브 사이프러스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친다. 소액예금은 보호되지만 거액예금은 일부 주식으로 전환되며 나머지도 헤어 컷(hair cut, 채무탕감) 된다.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9% 목표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작다는 이유로 키프로스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특정국의 예금주들에게 피해가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키프로스 은행 예금 전체의 1/3, 거액예금의 1/2이 러시아 자금인 것으로 신용조사기관 무디스는 추정하고 있다.

예금 부채의 헤어 컷은 처음 있는 일

러시아에 들어오는 외국인투자 규모는 키프로스가 세번째로 크다. 러시아인이 키프로스에 회사를 설립하고 이들이 다시 본국에 투자함으로써 절세를 하는 것이다. 키프로스 은행들의 외국인 우대정책도 한몫을 했다. 뱅크 오브 사이프러스의 예금 안내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외국인 정기예금은 1년 만기 7%, 5년 만기 연 11%의 이자를 준다.

둘째, 키프로스의 은행들이 부실화 된 것은 그리스가 몰락하면서부터였다. 그리스 국채에 과도한 투자를 했다가 원금의 70%을 날린 것이다. 이에 따라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 것이 작년 6월이었는데 문제는 지난 9개월 동안 사전경고에 해당하는 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직 유럽 은행감독을 위한 통합 시스템이 부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중앙은행은 90억 유로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이들 은행에 긴급유동성자금으로 지원해 오고 있었으므로 감독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었다. 유럽대륙에서는 유로화 정기예금 금리가 1%대를 넘지 않는다. 7%의 금리를 지불하면서 정기예금 고객을 유인하는 행위는 건전한 은행의 상궤를 넘는 것이었으나 이런 상황이 오래 방치되었다.

뒤늦게 키프로스에 던져진 구제금융의 조건들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좋은 처방도 갑자기 들이대면 비수가 되는 법이다. 키프로스 주민들은 독한 처방전의 배후에 독일이 있다며 독일을 원한에 찬 눈으로 바라 보고 있다.

셋째, 금융 문제를 졸속하게 다루기에는 키프로스는 지정학적으로 너무 중요한 위치다. 키프로스 섬 남쪽은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키프로스공화국이, 북쪽에는 합법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북사이프러스터키공화국이 대치하고 있다. 영국은 키프로스를 독립시키면서 두개의 항구도시를 확보하고 섬의 동서 양쪽 요충지에 영국군 2000명을 주둔시켰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11년 시리아 분쟁 때 이곳의 공군기지가 활용됐다. 2012년 1월에는 러시아 선박이 키프로스의 항구를 거쳐 시리아에 무기 공급을 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곳은 유럽과 러시아, 크게는 동과 서가 대치하는 곳이다.

졸속하게 다루면 위험해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키프로스 입장에선 구제금융을 제공한다면서 예금자 보호를 거액예금을 헐어서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매우 마뜩찮은 일일 것이다.

키프로스 출신의 201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리스토퍼 피싸리데스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씁슬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네가 힘들 때, 주위의 도움이 꼭 너의 입맛에 맞기를 바라지 마라. 키프로스의 먼 장래를 위해 유로존에 계속 남아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때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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