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언만 남은 기념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언만 남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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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4) 양악루와 황학루를 따라 쑨원기념관까지

동팅후(洞庭湖, 동정호)를 중심으로 북쪽이 후베이성(湖北省), 남쪽이 후난성(湖南省)인데 후난성의 성도는 창사이고 후베이성의 성도는 우한이다. 우한은 우한삼진(武漢三鎭)으로 일컬어지던 우창 한커우 그리고 한양의 세 도시를 묶어서 하나의 도시를 만든 것이다.

한커우는 장강(長江)의 북쪽에, 한양은 서쪽에, 우창은 동쪽에 있으며 한커우와 한양 사이에는 한수(漢水)가 흘러서 장강으로 이어진다. 1957년 러시아의 기술지원으로 우창과 한양 사이에 장강대교(長江大橋)가 건설됨으로써 우한삼진은 비로소 하나가 된다.

▲ 악양루에서 바라본 동정호. ⓒ양기혁

버스가 도착한 곳은 한커우 버스터미널이었다. 내가 가보려고 하는 황학루와 신해혁명 기념관은 우창지역에 있어서 택시를 타고 장강대교를 건너가야 했다.

하나의 도시가 되었지만 각 지역은 생활권역이 달라서 택시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버스터미널 앞 도로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 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우창 가는 택시를 탈 수 있었다.

▲ ⓒ양기혁
▲ 우창, 한커우, 한양으로 이루어진 우한삼진(武漢三鎭). ⓒ양기혁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서 장강대교로 들어섰는데 다리를 다 건너갈 즈음 황학루의 웅장한 모습이 위용을 드러냈다. 황학루와 신해혁명기념관은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하여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황학루를 먼저 올라갔다.

들어가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 반드시 짐을 입구 옆에 있는 보관소에 맡기고 가야 한다. 황학루는 6층의 누각으로 걸어서 올라가야 하고 누각 외에도 사산(蛇山) 자락의 상당히 넓은 공간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무거운 짐을 지거나 들고 관람하다가는 금방 녹초 되기가 십상이다.

전설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한 노인이 와서 늘 공짜 술을 먹고 갔다. 어느 날 노인이 보답으로 벽에 학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손님들이 술을 먹고 손뼉을 치면 그림 속의 학이 튀어나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주인은 부자가 되었다.

10년이 지나고 노인이 다시 찾아와서 학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주인은그 자리에 누각을 짓고 황학루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악양루와 마찬가지로 황학루도 후한 말 오나라의 손권이 군사적 목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전란과 재해로 여러 번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는데 지금의 건물은 비교적 최근인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고건축물로는 어울리지 않게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고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 황학루의 전설을 그린 벽화. ⓒ양기혁

황학루 또한 많은 시인들에게 시제로 사용되어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널리 알려진 것 중에 당나라 시인인 최호(崔顥, 704~754)가 지은‘황학루에 올라(登黃鶴樓)’가 있다.

 

▲ ⓒ양기혁

옛사람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이곳엔 쓸쓸히 황학루만 남겨져 있구나.
한번 떠난 황학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천고의 흰 구름만 부질없이 떠가는구나.
맑은 냇물 저쪽엔 한양의 나무들이 역력하고
봄풀은 앵무주에 무성히 자라 있네
해는 지는데 고향은 어디쯤인고?
안개 낀 강물은 시름에 잠기게 하네.

이백(李白) 또한 황학루를 소재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아래 시는 이백이 37세 때 과거에 낙방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맹호연(孟浩然)을 전송하며 쓴 시다.

送孟浩然之廣陵
故人西辭黃鶴樓
烟花三月下揚州
孤帆遠影碧空盡
惟見長江天際流

맹호연이 광릉으로 떠나감을 전송하며
옛 친구는 황학루에서 작별의 인사를 하고
안개 낀 삼월, 양주로 떠나가네
외로운 돛대는 멀어져 푸른 하늘 끝으로 사라지고
보이는 건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長江) 물뿐이네.

* 광릉은 지금의 강소성 양주를 말하며, 장강을 따라 양주를 향하
여 동쪽으로 떠나가는 맹호연이 서쪽의 황학루에 있는 이백에게 작별
의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西辭’이다.

* ‘烟花’는 삼월의 꽃이 만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는 호수 위에 안개가 자욱한 모습으로 새겼다.

황학루를 내려와 길 건너에 있는 웅장한 모습의 현대식 건물로 다가갔다. 신해혁명기념관으로 알고 간 곳은 입구에 공연포스터 같은 것들로 가득한 공연장이었다. 옆에 서 있던 한 노인에게 물었다.

“신하이꺼밍지니엔관 짜이날(신해혁명기념관이 어딥니까)?”
노인은 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비엔(저쪽입니다.)”
우거진 나무그늘에 가려져 처음엔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쪽으로 다가가자 붉은 벽돌과 붉은 기와로 된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 앞에 ‘中山先生之像’이라고 쓰여 있는 쑨원의 동상이 서 있었다. 건물 전체를 보수공사하려는지 지지대로 감싸고 있었고 출입문은 닫혀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 황학루에서 바라본 우창과 한양을 연결하는 장강대교의 모습. ⓒ양기혁

쑨원의 동상과 기념관은 주위의 현대식 고층건물에 압도당하는 듯 어쩐지 왜소하고 초라해보였다. 여기엔 찾는 사람도 없고 화환은 달랑 하나가 울타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는데 홍콩의 한 단체에서 두고 간 것이었다.

사오산의 마오 생가에 밀려드는 인파와 당당한 모습의 동상을 생각해 보니 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과 쑨원의 위상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해혁명은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일어났다. 올해는 신해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창의 신식 군대에서 발생한 혁명의 도화선은 혁명단체들에 전해져 한커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우한삼진을 점령하고, 그에 따라 남부의 각 성들은 청조에 대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세력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그 한 해 전 우리나라는 일제에 나라를 잃었는데, 중국은 스스로 수천 년에 걸쳐 이어온 전통의 왕조국가를 해체하고 공화국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였다.

우창봉기가 있은 4개월 뒤 혁명지도자 쑨원과 청나라의 내정과 군권을 쥐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협약에 따라 1912년 2월 12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가 퇴위하고 268년간 계속된 만주족의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부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3살 때이고, 3년 뒤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1912년 1월 1일 혁명세력의 임시대총통에 추대되었던 쑨원은 협약에 따라 4개월 만에 그 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였다. 총통직을 이어 받은지 얼마 안 되어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를 자처하며 왕조체제로의 복귀를 시도하다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고 1916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 쑨원의 동상과 신해혁명기념관. ⓒ양기혁

그의 사후 중국은 각지에 할거한 군벌들이 지배하는 혼돈의 세월이 10여 년간 계속되었고,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신해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1925년, 혁명가 쑨원은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60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기념관 앞 소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일어섰다. 우한에서 내가 보려고 생각했던 것은 다 본 셈이고 이제 난징으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봐야 했다. 한적한 공원에서 나와 거리로 나서니 사람들과 차량이 홍수를 이루어 북적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버스정류장으로걸음을 옮기는데 2층으로 된 시내버스가 보이고 전차도 운행되고 있어서 신기하게 느껴졌다. /양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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