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6) 옌저우로 가는 기차 안에서

기차는 깨끗하고 쾌적했다. 전에 탔던 기차와는 다른 고급스런 분위기에 승객도 붐비지 않고 빈 좌석이 많아 여유가 있었다. 아마 등급이 다른 고급열차인 모양이다. 기차 내의 매점에서 산 커피 한잔과 비스킷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몇 군데 중간 역을 거치고 한적한 농촌 풍경도 뒤로 하고 몇 시간 후 기차는 또 다른 장강대교를 건너가면서 난징에 도착하였음을 알렸다. 아래는 6.7km의 철도, 위는 자동차가 다니는 4.5km의 고속도로로 된 거대한 규모의 이중복합교인 난징의 장강대교는 우한의 장강대교가 러시아의 지원으로 건설된 반면 순수한 중국 자체 기술로 건설되어 1960~70년대 중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상징물이기도 했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우선 다음 가야 할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 곡부)로 가는 길목인 옌저우() 가는 기차표를 먼저 알아봐야 했다. 뜻밖에도 기차는 오후 2시 50분 출발이다. 겨우 세 시간 남짓 남았을 뿐이었다. 태평천국박물관과 난징대학살기념관은 가보고 싶었다. 세 시간이면 그 중 가까운 한 곳은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역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곳 다 역에서 가깝지가 않았으므로 비가 내리는 것을 핑계로 난징 관광을 포기하고 바로 옌저우로 가기로 작정했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역 안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계산하는 패스트푸드(快餐) 식당이었다. 닭 뒷다리 하나, 오이와 무채 하나씩, 미역국과 밥 한 공기. 오랜만에 신선한 채소가 곁들여진 식사를 하게 됐다는 즐거움은 잠시뿐, 오이와 무채는 삶아 나온 듯 물컹한 것이 식감을 여지없이 뭉개버리고 말았다.

닭다리에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밖으로 나오니 그새 비가 그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촉박해서 어디 나가서 관광하기는 글렀다. 난징 관광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역 광장 그늘에 앉아 배낭을 내려놨는데 배낭 뒤쪽 작은 주머니의 지퍼 두 개가 다 열려 있었다. 배낭을 지고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뒤에 서 있던 사람의 소행일 거라는 의심이 가기는 했으나 확인할 순 없고, 거기에 훔쳐갈 만한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기차 출발시간이 1시간 정도 남자 역 안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엄청난 규모의 역 안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러니 시간이 임박해서 기차역에 도착하면 당황할 수밖에,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기는커녕 그것을 기회로 돈을 우려낼 궁리를 하는 이 사람들의 속성을 감안하면 스스로 미리 예방하고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난징역은 한커우 역보다도 훨씬 커서 역 안에서도 몇 번을 물어서 옌저우행 기차의 개찰구 앞 대합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한커우에서 난징까지 기차요금이 180원이었는데 난징에서 옌저우까지의 요금은 64원이다. 지도상으로 본 거리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옌저우행 기차요금은 한커우-난징의 3분의 1이다.

내가 산 옌저우행 기차표는 일반열차의 지정좌석이 없는‘잉줘(硬座)’였다. 일반열차의 등급이 침대칸인 루안워, 잉워, 좌석으로 된 루안줘, 잉줘로 나뉘어 있고, 또 침대칸은 상, 중, 하로 나뉘어 있는데, 잉줘는 앉아 가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고 게다가 지정좌석도 없어서 서서 가게 생겼다.

기차에 올랐을 때 객실은 이미 좌석뿐만 아니라 통로에도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선반에도 짐들로 채워져 있어서 비좁은 통로에 배낭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서서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새로운 역에 정차할 때마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기 좌석을 찾아가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어서서 좌석을 내주곤 했다.

▲ ⓒ양기혁

몇 개의 역을 지나고 통로가 조금 한산해질 때쯤 해서 옆에 서 있던 한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밝은 인상에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어서 호감을 갖게 했고 노인이나 여자들이 주위에서 짐을 선반에 올리거나 할 때도 선뜻 도와주고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옌저우는 작은 도시라서 혹시 한밤중에 도착하면 모르고 지나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나는 그에게 부탁했다.

“워스한궈런, 짜이옌저우 워시아처, 훠처다오다옌저우 니게이워 수어화. (나는 한국사람인데 옌저우에서 내린다. 기차가 옌저우에 도착하면 나에게 말해달라.)”
“커이, 팡신바(염려하지 마라).”

기차가 다시 몇 정거장을 지나고 빈 자리가 생기자 그 청년과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다. 기차 내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서 내가 캔맥주를 사자 그는 통에 든 감자칩 하나를 샀다. 그는  산동성 하택시 정도현은 출신지이고, ‘옌더하오’는 이름이었다. 그의 성(姓)인‘옌’은 내가 전혀 본 적이 없는 글자였고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는 지난에 있는 산동교통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고 올해 졸업했다고 한다.(* 교통대학교의 교통은 도로교통의 의미가 아니라 영어의 communication으로 번역된다.)

내가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자 그는 체홉, 고리끼,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이름을 말했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지바고를 읽은 적이 있으며, 영화도 매우 감명 깊게 봤다고 말하자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이유 그 영화가 개봉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중국 또한 청년실업이 심각해서 대학 졸업생들도 취업이 매우 힘들다고 들은 터라 취업을 했는지 그에게 물었다.

“니전머양(너는 어떠냐)?”
“하이 커이(괜찮다).”


‘하이커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괜찮다, 잘됐다 정도로 얘기한 느낌이었다. 졸업하고 바로 굴삭기를 생산하는 회사에 취업을 했다고 한다. 흔히 포크레인이라고 하는 굴삭기가 중국에서는 와줴지’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덧붙여서 그는 代合作(우리 회사는 현대와 합작을 하고 있다.)’라고 썼다. 굴삭기를 만드는 현대는 현대중공업을 말하는 것 같았다.

▲ ⓒ양기혁

내가 내일 취푸(曲阜)를 거쳐 칭다오에 간다고 하자 그는 가방에서 트북을 꺼내더니 얼마 전에 여자친구와 취푸를 다녀왔다고 하며, 공자 사당인 공묘와 공부(孔府), 공림(孔林)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다. 그리고 취푸에서 칭다오는 직접 가는 차편이 없으니 지난을 거쳐가는 것이 좋다며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10시 넘어서 기차는 옌저우에 도착했다. 비슷한 거리로 보이는 한커우-난징이 세 시간 정도 걸렸는 데 난징-옌저우는 여섯 시간 넘게 걸렸다.

한 청년이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옌저우에 살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내린다는 것을 알고 안내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기차역을 나서자 ‘꾸이더(비싼 곳)’,‘ 피에니더(便宜的, 싼곳)’, 어떤 곳으로 갈 것인지 묻고는 내가 싼 곳으로 가자고 말하자 역앞의 많은 호객꾼들을 제치고‘빈관’이라고 쓴 붉은색 간판을 내건 곳을 가리키며 앞장서 나갔다. 입구에 앉아 있던 주인은 30원을 달라고 했다.

따로 보증금을 받지 않는 대신에 방 열쇠도 주지 않는다. 아침에 알아서 나가라는 것이다. 안내해준 청년은 이층까지 올라와서 방을 확인하고 돌아서 나갔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데 혹시 돈을 줘야 하는 건데 그냥 보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빈관은 좀 고급스러운 호텔로 생각했는데 이곳은 충칭에서 묵었던 초대소보다도 더 낡고 누추한 곳이었다. 아직 저녁을 안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배낭을 방에 벗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연 식당이 있었으나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가게에서 생수와 캔맥주를 사들고 왔다. 오늘도 저녁 식사는 캔맥주 한 병과 비스킷 몇 조각이다. /양기혁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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