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과 5·18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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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의 '野'한이야기] (2) 광주의 고통을 빚어 만든 보석

지난 토요일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3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늘도 광주의 아픔을 기억이라도 하는지 모처럼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토요일에 내린 비 때문에 주말 사회인리그는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사회인야구가 아닌 5.18과 관련한 선동열 기아타이거즈 감독의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야구칼럼을 금요일에 정해서 내보내다보니, 5.18과 관련한 얘기를 하기에는 시기를 놓쳐버린 느낌이 듭니다만. -필자 주

▲ 광주일고에서 선수 생활하던 시절 선동열의 모습. (KBS N 화면 갈무리)
선동열 감독은 고교 3학년 시절인 1980년 3월에 대통령배전국야구대회에서 광주일고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입니다. 선동열은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며 일약 고교스타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영화 <스카우트>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탱크를 몰고 광주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은 대검을 꽂은 총을 들고 시민들을 사냥하러 다녔습니다. 역사적인 5월 18일, 선동열을 포함한 광주일고 선수들은 학교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낮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연습을 했고, 밤에는 합숙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새우잠을 자야했죠.

그런데 광주 시내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숙소에는 식량마저 바닥이 났습니다. 선수들은 오도가도 못하면서 엄습하는 공포와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이들을 구하러 온 것은 선동열의 아버지 고 선판규씨였습니다. 이미 장남 선형주를 백혈병으로 먼저 보낸 선판규씨에게 아들 선동열은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죠.

아버지는 송정리 자택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계엄군의 감시망을 뚫고 아들을 구하러 광주일고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은 물론이고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친구 3명을 모두 오토바이에 태우고 광주 시내를 빠져나가 송정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계엄군이 갑자기 선동열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시위도중 도망간 학생들을 쫓고 있었는데, 대검을 꽂은 총을 선동열에게 들이대며 "도망간 놈들 어디에 있냐?"고 윽박질렀다고 합니다. 그때 "그 학생은 건드리지 마라"는 장교의 만류가 없었다면 훗날 국보급 투수로 명성을 날리게 될 어린 선동열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

그해 청룡기대회는 계엄에 봉쇄된 광주지역의 고교들이 불참한 가운데, 선린상고가 우승기를 거머쥐게 됩니다. 선린상고에는 박노준과 김건우라는 두 2학년 스타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비상하는 중이었죠.

그리고 여름방학이 되자 봉황대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광주일고는 1차전에서 약체로 분류되던 경기고와 맞붙었는데, 이 경기에서 선동열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고교 최고의 투수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2차전에서 중앙고에게 패배면서, 아쉽게도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십니다. 5월 광주의 충격이 너무도 컸던 탓일까요?

9월말에 벌어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도 광주일고는 우승기를 거머쥐는데 실패했습니다. 선동열, 차동철의 투톱 마운드가 버티던 광주일고는 부전승으로 1회전을 통과한 후, 중앙고, 마산상고, 천안북일고 등을 차례로 제압했지만,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를 만나 아쉽게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이후 선동열은 고려대로 진학하였고, 81년 세계청소션야구대회에 출전하여 결승전에서 미국과 맞붙게 됩니다. 이 경기에서 선동열은 삼진 11개를 잡아내는 기염을 토합니다. 또 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미국, 일본 등 야구강국들의 타선을 잠재웁니다.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힌 선동열은 미국의 명문구단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습니다.

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했습니다. 광주를 연고로 했던 해태타이거즈 팀은 다른 어떤 팀보다도 팬들로부터 열렬한 사람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원정경기에서도 홈팀보다 더 많은 응원진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 해태타이거즈에서 활약할 당시 선동열은 해태의 우승을 견인하면서 무등산폭격기라는 별명을 얻었다.(KBS N 화면 갈무리)

80년 5월 광주의 비극으로 절망하던 전라도 사람들에게 해태타이거즈는 현존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태타이거즈의 관중은 다른 팀들과는 달리 '정치화된' 관중이었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선동열은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지역연고팀인 해태타이거즈를 선택하게 됩니다. 해태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해외에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해태를 선택한 이유가 "광주의 시민들의 요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동열이 고등학교에서 활약하던 80년은 국내 아마야구의 인기가 최절정에 달하던 시기입니다. 광주가 고향인 야구팬들은 광주일고가 당시 청룡기에 출전하지 못한 것이나, 봉황기 예선에서 탈락한 것을 두고 오래도록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당시 야구풍토를 돌이켜보면 아쉬워만 할 일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이스 한두 명이 많은 경기에 무리하게 등판하면서 혹사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기입니다. 야구 유망주 중에 고교에서의 선수생활을 끝으로 선수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5.18로 인해 고교무대에서 기량을 마음껏 뽐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로 인해 선동열이 혹사될 위험을 피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조개류 속에서 진주 알갱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생충이나 모래알갱이 같이 외부에서 핵이 될 이물질이 체내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물질이 체내로 들어오면 진주는 그로 인해 매우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이물질을 자신의 몸과 분리하기 위해서 이물질을 감싸는 진주주머니를 만듭니다. 그리고 진주주머니의 상피세포는 진주층이라는 물질을 분비하는데, 진주층이 굳어진 것이 보석 진주입니다.

국보급투수 선동열은 '광주'라는 조개가 키워낸 진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물질의 침입을 받아 아픔과 통곡 가운데서 빚어낸 찬란한 보석 말입니다.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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