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소용돌이에 몸 던져야 했던 中 소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 던져야 했던 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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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9) 격랑기에 시대를 썼던 中 대표 작가, 라오서를 만나다

공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 주변의 소공원에 이름만 붙였을 뿐 라오서 흉상 외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공원 끝까지 걸어가자 왠지 낯익어 보였는데 그 끝에 나 있는 도로가 칭다오에 도착한 첫날 칭다오역을 거쳐 천주교회를 돌아 나온 바로 그 길이었다. 그때는 뒤쪽에 있어서 이곳이 라오서 공원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 칭다오의 다쉐루(大學路).

라오서 옛집은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 시간 여유도 있고 하니 지도를 보고 대략 방향을 잡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번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지도에 ‘老舍故居’가 표시된 걸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의 대학로는 요란한 간판과 사람들로 넘쳐나는 한국의 대학로와 달리 거리에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깨끗하게 잘 정비된 도로와 우거진 가로수, 사람도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거리다.

▲ ⓒ양기혁
▲ ⓒ양기혁

군데군데 미술관과 출판관련기관 등 문화예술단체들이 작은 표지판을 문에 달고 있을 뿐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큰길에서 다시 인적 없는 한 골목으로 들어가 조금 올라가니 대문에 ‘낙타상자박물관’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는 2층 주택에 이르렀다. 현판 옆에는 이곳이 라오서 옛집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老舍故居’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산동대학 중문과 교수로 초빙되어 이곳에서 문학작품들을 창작했다고 쓰여 있다.

▲ ⓒ양기혁
▲ ⓒ양기혁

대문 안의 마당에는 라오서의 조그만 흉상이 한가운데 서서 방문객을 맞아주었고 한쪽 구석에는 인력거를 끌고 있는 샹쯔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라오서가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고 초판본이나 ‘Rickshaw Boy’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된 것, 영화와 연극 포스터들이 있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베이핑(北平)의 풍경(*베이징, 北京)은 1928년 국민당정부가 난징을 도읍으로 삼았기 때문에 1949년 신중국의 성립까지 베이핑으로 불렸다.) 등이 전시되어 있고 드라만지 연극인지 스피커에선 작품의 대사가 계속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물 1층 내부 의 전시물을 둘러보고 다시 밖으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문 옆 관리실에서 소설책 ‘낙타샹쯔’를 팔고 있어서 중국어와 영어로 번역된 것 두 권을 사고 라오서 옛집을 나왔다.

‘루어투어시앙쯔’ 한국어 번역판의 해설을 쓴 철학자 김용옥 선생은 라오서가 중국현대문학의 소설과 희곡 두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으며, 중국현대문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설 두 편으로 루쉰의‘아큐정전(阿Q正傳)’과 라오서의 ‘루어투어시앙쯔’를, 가장 대표적인 희곡 두 편으로 차오위의 ‘뇌우(雷雨)’와 라오서의 ‘차관(茶館)’을 들면서 버나드 쇼와 토마스 만을 합쳐놓은 인물 같다고 평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현대문학에서 ‘파진(巴金)’, ‘쉬디산(許地山)’, ‘주즈칭(朱自淸)’ 등의 명문장가들이 있지만 순수한 구어(口語)의 아름다움을 구사한 작가로는 라오서를 능가할 작가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 ⓒ양기혁
▲ ⓒ양기혁

본명이 ‘수칭춘(舒慶春)’인 라오서는 청조가 몰락의 길을 가고 있던 1899년 만주족 기인(旗人)의 후손인 하급군인의 아들로 북경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이듬해 일어난 의화단사건으로 황궁수비병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서양연합군의 공격에 비명횡사했고, 그의 가족은 어머니의 날품팔이에 생계를 의존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여 라오서는 불우하고 곤궁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시절 북경의 밑바닥 하층민의 생활을 경험하면서 몸에 밴 북경어와 생활상들이 후에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아 20세기 초 청나라가 멸망하고 군벌이 지배하던 시절과 항전시기의 북경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라오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낙타샹쯔’를 1935년 칭다오의 이 집에서 썼다. 1934년 산동대학 교수로 초빙되어온 라오서는 교내의 갈등과 소요로 인해서 그 다음해 사직을 하고, 그 이후 오직 글만을 쓰는 ‘붓 한 자루의 생활’로 들어섰으며, 그 첫 작품이 ‘낙타샹쯔’이다.

중국대륙에 문화대혁명이라는 광란의 소용돌이가 처음 몰아닥쳤을 때,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뚱이 천안문 광장에서 일백만 명에 이르는 홍위병(紅衛兵)들에게 기존의 권위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할 것을 선동하고 나서, 7일 후인 8월 25일 67세의 라오서는 홍위병들의 야만적인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북경의 한 호수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양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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