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정부에서 제주출신으로는 고위인사 1호가 된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그에게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예술가 포스가 절로 풍긴다. ⓒ 제주의소리
<이재홍이 만남사람> 왕따인생에서 문화예술 중심에선 제주출신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그를 만나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술가’ 포스가 느껴진다. 백발이 날리는 외모부터 남다르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제주출신 고위인사 1호로 모습을 드러낸 고학찬(67) 예술의전당 사장은 제주사회에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물’이었다. 제주출신 누군가 내각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바람이 문화예술단체장으로 나타난 것도 도민들에게는 의외였다. 제주를 떠난지 50년이 됐으니 도민들에게 그는 낯설었다.

문화예술계는 더욱 그랬다. 고학찬 사장 등장을 마치 이방인에게 자신들의 안방을 빼앗긴 분위기처럼 싸늘했다. 그가 쌓아온 30년 넘은 현장 경험과 15년 대학강단 이력은 ‘코드인사’로 덧칠됐다. 구멍가게 사장이 대기업 사장 자리를 넘보는 ‘야심찬’ 혹은 ‘주제넘은’ 인물로 묘사하는 시각도 있었다. 고학찬 사장에 앞선 13명의 예술의전당 사장 중 7명이 행정관료 출신이었고, 민간인 출신 중에서도 그나마 방송-공연 기획자는 그가 처음이었다는 전문성도 예술의전당에 비하면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소극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됐다.

고 사장은 박근혜 대통령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에서 문화예술분야 간사를 맡고 있다. 또 대선 캠프인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지난 3월 예술의전당 사장이 된데는 이런 배경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이 배경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다는 느낌은 없을까? 

고 사장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스스로를 ‘왕따인생’에 비유했다.  제주출신으로, 방송국 라디오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으로 살아갈 때도, 그리고 다시 고국에 돌아 왔을 때도 그가 쌓아온 이력과 경력은 혈연 지역 학연으로 똘똘뭉쳐진 대한민국의 비뚤어진 주류사회의 벽을 넘진 못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그가 스스로를 ‘왕따 인생’이라고 평하는 아이러니는 ‘기득권 천국’ 대한민국에 대한 질타인 셈이다.   

지난 3일  ‘2013 제주 해비치 아트페스티벌’ 대회장 자격으로 고향에 온 고학찬 사장을 <제주의소리>가 만났다.

고 사장은 그동안 서울 울타리 안에서만 안주해 왔던 예술의전당을 시골 땅끝마을까지 옮겨 놓기 위한 공연 영상사업을 추진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내 놓았다. 또 우을증과 스트레스 등에 시달리는 현대병을 예술로 치유하는 ‘아트힐링’, 70세 이상 노년층을 위한 공연혜택 등도 내 놓았다. 소위 ‘있는 사람들’ 전유물이었던 예술의전당을 ‘없는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왕따 인생’에서 체험한 결과물인 셈이다.

고 사장은 자신을 향한 일부의 낙하산 논란에 대해  “구멍가게 주인도 대기업 사장 될 수 있는 게 바람직한 사회 아니냐. 관료들이 사장됐을 때는 아무 소리 안 하다가 소극장을 운영하던 사람이 왔다고 비판하는 건 부당하다. 예술의 전당 사장 3년간 일 열심히 해서 업적 만들어 ‘그런 (낙하산) 사람 아니었구나’란 걸 보여주고 가려고 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고향 제주도 자연환경과 대규모 시설투자을 벗어나 ‘문화산업’을 육성할 것을 주문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국제적 공연과 축제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세계 10대 페스티벌 중 하나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예로 들면서 제주 해비치 아트페스티벌을 국제적 페스티벌로 키울 것을 당부했다.  제주의 캐치프에이즈로 ‘제주도 이제는 문화다’란 말을 내 걸자고 말했다. 

 # “고향 떠난지 50년...하지만 제 몸 속 DNA는 100% 제주도산” 

- 제주 출신이면서도 고향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제주시 용담 출신이다. 서초등학교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나고 자랐다. 서교(2회)와 일중(12회)을 거쳐 제주일고(9회) 1학년 마치고 2학년때부터 서울(대광고)로 전학 갔다.  몸은 비록 제주를 떠났지만 제 몸속 DNA는 100% 제주도산이다. 제주출신으로 고마운 건 건강이다. 별로 운동하지도, 보약 먹는 것도 아닌데 건강하다. 싱싱한 해산물과 자연식품을 먹고 ,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덕에 건강하다는 게 소문났다.”

- 그럼 제주를 떠난 지 몇 년이나 됐나. 제주에 가족은 있는지, 친구들은 어떤가.

“1963년에 떠났으니  이제 딱 50년이 지났다. 가족들은 서울과 미국에 있다. 누나가 제주에서 (마리나)호텔을 경영하고 있다. 제주 친구들은 많다.  제가 고교 1학년때 먼저 서울로 올라갔고, 친구들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거의 친형제처럼 지냈다. 좌승희 전 경기개발연구원장,  현상훈 연세대 교수, 강창구 충남대 교수, 서영수 치과원장 등이 있다. 지금도 서울에서 동기들 모임 계속하고 자주 만난다.”

▲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마치고 서울로 전학갔다. 고향을 떠난지 50년이 흘렀지만 그는 스스로 '제 몸 속 DNA는 100% 제주도산'이라고 말 할 정도로 제주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 제주의소리
- 80년 신군부에 의한  통폐합조치로 지금은 없어진 TBC방송국 PD 출신이다. 

“한양대(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 TBC로 갔는데 제주출신 방송 PD 1호였다. 그 때 TBC에는 제주KBS에서 스카우트된 고려진 아나운서 밖에 없었다. 고려진 아나운서도 처음엔 몰랐다. 다른 입사동기들은 고향이다 대학 선배다 하면서 출근 첫날부터 점심을 사줬는데, 나에겐 밥 먹자는 선배가 없었다. 한양대도 PD1호, 제주 출신도 1호로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3~4주 지날 때까지 요즘 말로 왕따였다. 하지만 그게 저에겐 약이었다.  왕따를 극복하는 건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키우는 것밖에 없다. 1년만에 손오공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라디오 전체 1등을 차지했다. 그때서야 저에게 밥 먹자고 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 후배들에게 비록 제주사람 숫자 적어서 기 죽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더 노력하고 실력 발휘해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내가 똑똑하고 능력이 있으면 주변에서 손을 내민다.”

- TBC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TBC 통폐합 때문이었나. 또 미국에서 한인방송국을 만들었는데.

“신구부에 의해 TBC가 KBS로 통폐합됐다.  대부분 KBS로 옮겼지만 나는 미국으로 갔다. 누님이 있는 하와이에 6개월 있다가 1981년 뉴욕엘 갔다. 그 때 이장희씨가 LA에서 한인방송을 최초로 시작했는데 뉴욕엔 한인 라디오 방송이라고 해 봐야  한국일보에서 일주일에 1시간, 문선명씨가 일주일에 1시간 방송하고 있었다. 일주일 1시간 방송은 의미가 없었다. 그 때 뉴욕시장이 에드워드 카치였는데, 시장실에 전화해서 공보비서에게 ‘중국 일본 사람은 자기 나라 말로 방송 하는 데 왜 한국어 방송은 없느냐’고 따졌더니 시장이 나중에 만나자고 했다.”

 # 제주출신 TBC PD 1호, 뉴욕시장에게 항의에 한인방송 설립 유명한 일화

- 뉴욕에 가자마자 시장에게 한인방송 만들자고 항의했고, 그래서 만났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항의를 하긴 했지만  당시 생각은 나는 한국에서 온 무명 방송인인데 세계에서 가장 큰 시를 운영하는 시장을 만난다는 게 꿈만 같았다. 생각해 봐라 서울시장이 방글라데시에서 온 외국인을 전화 한통에 만나주겠나?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하고, 조금 먼저 가서 시장실 옆  민원인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데 에드워드 카치 시장도 내 옆에서 볼 일을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군수만 되도 전용화장실을 쓰는데 뉴욕시장은 그냥 민원인 화장실을 함께 쓰더라. 참 달랐다. 화장실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뉴욕시장은 ‘아직까지 한국인 중에 방송을 신청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에서 뭘 했느냐’고 묻고는 그 자리에서 낮 12시부터 매일 2시간씩 FM방송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줬다. 전파는 뉴욕시 산하 방송전파였다.”

- 허가는 났지만 방송이란 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또 당시 방송으로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지 않았나.  

“당시 원룸에서 부인과 어린 딸 3명과 함께 살았는데 방송 기자재가 뭐 있겠나.  빈손이었다. 급한 대로 라디오 수리점에 가서 마이크를 빌리고, 턴테이블과 녹음기를 사고 원룸에서 라디오방송을 시작했다. 뉴욕 교포들은 대부분 1세대로 영어를 잘 못했다. 세탁소나 생선 야채가게, 편의점을 하면서 오로지 라디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들어야 하는 데 틀어봐야 영어만 나오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어가 나오니 교민 중에서는 우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지만 라디오 방송만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양말장사, 모자장사, 웨이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트럭에 물건을 싣고 오늘은 필라델피아, 내일은 뉴욕, 모레는 뉴저지로 벼룩시장을 다니면서 한국 오일시장식 장사를 했다.”

- 그럼 미국생활은 언제까지 했나.

“1980년부터 94년까지 15년 했다. 1994년에 한국엘 잠시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막 케이블TV 시대가 열릴 때였다. 삼성그룹 제일기획 제안으로 Q채널 제작국장으로 한국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삼성그룹 영상사업단 방송본부 총괄로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도 제작했는데, 김대중 대통령 당시 ‘케이블은 중소기업 영역으로 대기업은 손 떼라’고 해서 직원 50명 데리고 나와 프로덕션 제작사를 차렸지만 봉급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방송은 접을 수밖에 없다.”

- 그래서 시작한 게 소극장 사업인가.

“강남에 누님(제주 마리나호텔 운영)이 갖고 있는 윤당빌딩이 있다. 누님 부부를 설득해 윤당아트홀로 만들었다. 강남엔 돈은 많을지 모르지만 문화는 약하다. 큰 극장은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소극장은 거의 없다. 그래서 소극장을 해보자고 했는데 반대가 많았다. 사실 강남은 소극장 불모지다. 유인촌 전 장관이 하던 소극장도 문을 닫았다. 그래도 강남에 소극장 몇 개는 있어야 한다고 우겨서 겨우 하게 됐고 3년6개월만에 흑자로 전환해  성공하게 됐다. 지금 윤당아트홀은 강남에서 모른 사람이 없다.”

▲ 그는 박근혜 대통령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출신이다. 그래서 그의 예술의전당 사장 자리를 놓고 일각에선 '코드인사' '낙하산인사'라고 혹평한다. 관료들이 사장자리를 차고 있을 땐 아무말도 않다가 자신에게만 유독 가혹한 평가에 그는 섭섭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왕따 인생'이라고 말한다. ⓒ 제주의소리
 # “관료들이 사장됐을 땐 침묵하다가 소극장 출신이라 비판하는 건 부당하다”

- 윤당아트홀 관장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는 국가미래연구원에 소속되기도 하고, 대선때는 국민행복위에도 들어갔다. 박근혜 캠프 출신인데 그 때문에 예술의 전당 사장이 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처음 예술의전당 사장 되니까 많은 매스컴에서 코드인사다. 낙하산이다. 말이 많았다.”

- 보수진영에서도 낙하산이라고 했다.

“저를 걸고넘어지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200~300석 소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어떻게 2000~3000석의 예술의전당을 운영할 수 있느냐가  첫번째다. 구멍가게 사람이 대형마트를 운영하고, 지역방송하던 사람이 KBS 사장이 된 꼴이라는 거다.  하지만 구멍가게 주인도 대기업 사장 될 수 있는 게 바람직한 사회 아니냐. 제가 실력이 없으면 말이 된다. 하지만 저는 방송경력 30년 이상을 한 사람으로 대학에서 연극.영화.공연 관련해서 15년 이상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예술의전당 역대 13대 사장 중 그나마 소극장이라도 운영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로 문광부 관료들이 왔다. 13명 중 7명이 관료였다. 물론 관료도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예술의전당은 극장과 전시장 운영 등 전문가가 필요하다. 관료들이 사장됐을 때는 아무소리 안하다가 소극장을 운영하던 사람이 왔다고 비판하는 건 부당하다.”

- 그래도 박 대통령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활동을 한 건 사실이 아닌가.

“국가미래연구원에서 문화예술 담당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연구소지 선거 캠프는 아니다. 선거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다.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이었을 뿐이다. 혹시 필요했을 때 자문에 응해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선거캠프에서 선거운동을 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 예술의전당 사장에 임명받기 직전 윤당아트홀에서 육영수여사 뮤지컬을 해서 논란이 일었다.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법과 질서에 위배되지 않으면 누구 얘기든 무대에 올릴 수 있다. 누구는 되고 육영수 여사만 안되는 이분법이 어디 있느냐. 그 뮤지컬은 제가 기획한 게 아니고 대관한 것이다. 어떤 청년이 육영수 여사 퍼스트레이디 대본 갖고 와서 대관을 신청했다. 연출자에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무조건 찬양은 안된다고 했다. 더군나 선거전에는 대관이 안된다고 했다. 선거 후에 한다면 검토해 보겠다고 한 것이었고 나중에 돈 받고 대관해 줬다. 언론에서는 ‘육영수 스토리 올려서 청와대 잘 보이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도했지만 그건 펙트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형편없는 나라는 아니다. 그렇게 잘 보여 예당 사장 한다면 육영수 뮤지컬을 제작한 사람이 사장으로 가야 맞다.”

- 언론의 비판을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사장 취임 이후 인터뷰에서 ‘제주출신이여서 왕따 인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방송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소극장 어렵게 시작했는데 공연계 사람들이 ‘방송하던 사람이 왜 소극장을 하냐’고 했다. 자기들 밥 숫가락을 뺏는 게 아니냐는 표현이었다. 공연계만 그런 게 아니다. 방송국 라디오에서 잘나가다 TV로 옮길 때도 그랬다. 미국에서도 백 인들이 동양인을 차별했고, 미국생활 15년 끝내고 조국에 왔는데도 똑같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 학교 선후배와 만나고 옛날처럼 돌아가야지’ 했는데 와보니 왕따였다. 미국에서 발붙이는 것보다 다시 한국에 발붙이는 게 더 어려웠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오면 견제한다.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지 않고 일단 벽을 친다. 제주 역시 그럴지 모른다. 제주에 언제 살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돌아오면 ‘젊을 때 잘 살다가 왜 늙어서 왔나’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겁 날 때도 있지만 객지생활 하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젠 웬만큼 왕따는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나에게 질타나 비판은 삶의 에너지다.. 예술의 전당 사장 3년간 일 열심히 해서 업적 만들어 ‘ 그런 (낙하산) 사람 아니었구나’란 걸 보여주고 가려고 한다.”

▲ 고학찬 사장의 꿈은 야뮤지다. 서울사람,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의전당을 땅끝마을 초등학생들에게까지 돌려 주겠다는 것이다. 첫 작품은 공연 영상사업이다. 수십만원짜리 오폐라 등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국 문예회관, 학교 등에서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 제주의소리
 # “출근하자마자 <제주의소리> 통해 고향소식 확인, 제주사랑방 역할 해 주길...”

-  제주를 떠난지 50년이 됐다고 하는데, 제주 형편은 알고 지내나.
 
“매일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우선 메일을 확인하고, 그다음에 열어보는 게 <제주의소리>다. 신문은 받아보기 어렵다. <제주의소리>에서 내가 떠난 고향이 어떤 얘기가 이슈인지, 고향이 편안한 지를 살펴본다. 내가 당장 고향에 기여할 수 없어도 아이디어로 기여할 부분 있는지 관심이 있다.”

- 예전에 윤당아트홀 제주사랑방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주변에 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주도 사람 서울에 많다. 엘리트도 많다. 숲 밖에서 숲을 보는 시각이 나을 수 있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 제주를 잘 알겠지만 바둑도 훈수들 때 잘 보인다. 우리도 제주를 보면 훈수 둘 게 나온다. 윤당아트홀에서 제주 사람들이 한달에 한번 모여서 제주현안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는 제안을 했었다. <제주의소리>도 제주밖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페이지를 마련하는 게 어떻냐. 제주도가 발전하려면 밖에 있는 사람 얘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또 제주 사람이 아니라도 제주를 좋아하고, 살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제주도에 무엇을 바라는지 하고 싶은 얘기도 많다. 그런 것을 <제주의소리>에서 해도 좋을 것 같다.”

- 예술의전당 많이 들어 봤지만 가보지 않은 분들이 많다. 소개해 달라. 또 고 사장의 계획은 무엇인가.

“예술의전당은 이제 25년 됐다. 동양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 공간이다. 모든 시설을 갖추고, 음향설비도 좋아서 공연하는 예술인들에겐 로망이다. 문제는 동양최대라도 전체 국민으로 보면 지극히 일부분만 온다. 연간 입장객 250만명이라고 하지만 주로 오는 사람만 온다. 제주도처럼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오기 힘들다. 오페라 공연만 20~30만원이 든다. 보통사람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제가 사장이 되면서 대한민국 최초로 공연 발레 오페라를 고화질 영상으로 만들려 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오페라를 영상으로 찍어 극장에서 상영한다. 예술의전당에 오지 못하는 ‘땅끝마을’ 초등학생도 예술의전당 오페라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 영상 카메라는 장점이 있다. 공연장 오페라를 풀샷으로 볼 수 있고, 심지어 배우의 눈물도 볼 수 있고, 무대 뒤도 볼 수 있다. 배우 인터뷰와 해설자 해설도 넣으면 영상매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

이 외에도 6가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우선 가곡의 밤을 시작했다. 어느 샌가 우리 주변에 가곡이 사라졌다. 아까운 장르다. 클래식은 어렵고, 오페라 아리아는 못한다. 접근하기 쉬운 클래식이 가곡이다.  예술의전당에서  매달 공연하고, 지역 문예회관과 연계해서 가곡 부활운동을 펼칠 예정이다. 아트힐링센터도 준비하고 있다. 현대인은 아프다. 우울증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병원 갈 정도의 중증은 아니다. 마음의 상처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도록 치료센터를 개설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상처가 치유된다면 얼마나 좋나? 또 고령화시대를 맞아 노인들을 위한 문화적인 향유기회 없다. 70살이 넘는 노인들에게 싼값에 티켓을 판매하고, 예술의 전당 아카데미도 싸게 등록시켜 드리려고 한다. 품격있는 노년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 고학찬 사장은 고향 제주에 애정이 가득하다. 그러나 대규모 개발에만 의존하는 고향은 딱하다. 고 사장은 제주의 미래는 '문화'에 있다고 단언한다. 문화가 제주의 희망이라며 서울로 문화의 힘을 키울 것을 주문했다. ⓒ 제주의소리
 # “제주의 희망은 문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국제적 공연 축제 만들어야” 

- 대한민국은 모든 게 서울에만 집중돼 있다. 교육과 의료도 그렇지만 문화예술은 더 심각하다. 지방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고향에 올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제주의  캐치프레이즈로 ‘제주도 이제는 문화다’라고 전해주고 싶다. 문화에 집중해야 한다. 현 정부가 문화융성을 국정 4대 기조에 포함시켰다. 앞으로 예산 확보도 쉽다. 공무원과 예술인, 외부인까지 힘 합쳐 청사진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 문화를 팔아먹어야 한다. 제주도 와야만 볼 수 있는 공연,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국제적으로 해야 한다. 세계 10대 페스티벌 중 하나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페스티벌이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은 영국만 아니라 전 세계 공연예술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제주도도 그런 시야를 갖고 세계로 문을 열어야 한다. 제주에서 열리는 해비치 아트페스티벌을 중국 일본 타이완 홍콩 베트남에서도 참여하는 동양의 에딘버러 페스티벌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제주에 희망이 있다. 이젠 역량을 문화로 돌려야 한다. 저는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있으면서 지역들과 끊임없는 교류할 계획이다. 예술의전당만 갖고 안된다. 전 국민이 높은 문화를 향유해야 한다. 고향이 제주도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주고 싶다. 제가 갖고 있는 재산은 돈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기획이다. 비행기에서 제주를 보면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을 볼 수 있다. 제주는 1만8000여 신들의 고향이다. 전세계 샤먼축제를 제주도에서 하면 어떨까. 각 나라 샤먼들이 모여서 토속신앙 축제를 한다면 세계적인 볼거리가 될 것이다.”

- 자치단체장의 입장에서 돈을 쏟으면 바로 피드백이 와야 하는데 문화예술은 시간이 걸린다. 티도 안난다. 그래서 뒤로 밀린다. 말로만 그친다.  

“맞다. 문화예술은 표가 안 나온다. 제주뿐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화투자가 결국은 문예회관 짓는 게 되고 만다. 전국적으로 문예회관이 200개가 넘는다. 건물 지어놓으면 뭐하나? 할 게 있어야 한다. 돈을 투자해도 이젠 콘텐츠에 투자해야 한다. 뭘 보여줄 것이냐가 중요하고, 그 다음에 극장이 필요하다. 인프라 지어놓고 아무것도 안하는 문예회관이 태반이다. 문예회관 가동률이 30%도 안된다. 그나마 지역행사다.  순수 문화예술은 거의 없다. 예산을 쓰더라도 제주도만 갖고 있는 콘텐츠와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배비장전 내용으로 오페라 ‘살짜기 옵서예’를 만든다고 하는데 아주 좋다. 다만 오페라는 한번 하면 한 팀이 3일 이상 공연하지 못한다. 마이크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뮤지컬과 믹스해서 상설 공연장에서 항상 공연이 이뤄 질 수 있도록 하면 더 좋겠다. 그래야 대표 공연이 될 수 있다.”

- 앞으로 계획하고 잇는 것은 있나?

“사람일은 모른다. 예술의전당 사장 될 지 누가 알았나?”

- 예당 사장 이전에 문광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는데.

“후보로만 거론됐다. 기대하지 않는다. 제 신조는 현재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회가 오면 하는 것이고, 아무리 하찮은 일도 최선을 다한다. 미국에서 바텐더 생활을 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미국에서 놀란 게 쇼 구경 갔는데 춤을 추는 무용수인데 그렇게 열심히 춤을 추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열심히 하면 다른 기회는 찾아온다. ‘저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주변에서 오히려 추천한다. 제 나이 67세다. 현재 맡고 있는 예술의전당 사장 일을 충실히 하고 싶다.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향 후배들과 고향 제주에서 어부극단을 만들고, 해녀합창단 만들고 싶다. 말년에 그런 일 하고 싶은 게 꿈이다.” <제주의소리>

<이재홍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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