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숲의 주인은 숲에 사는 생명들, 인간은 손님이다

멈추지 않는 시간은 봄을 뒤로하고 여름을 불러 들였다. 6월 초순, 장마가 오기전에 여름의 길목에 들어선 숲을 보기 위해 한라산 어리목에 갔다.

숲의 주인인 나무, 풀, 동물들을 만나기 위해 잠깐 동안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빛이 차단되어 어두운 숲의 터널이 시작되는 입구에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울창한 모습으로 변모하는 식물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새소리, 짐승소리, 잎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어울려 유현(幽玄)하다.

나무나 풀잎, 꽃의 생김새에서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대칭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한라산은 멀리서 보면 갈색의 검은 색조이지만 가까이서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의 정원으로 손님을 맞아준다.

어리목에서 마주친 초여름의 숲은 쑥쑥 자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청소년의 모습이다.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낮은 지대의 봄꽃들은 후손들을 남기고 사라졌지만 여름꽃은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숲은 꽃과 잎의 향기로 사람들을 맞아들인다. 하루하루 몰라보게 변하는 녹색에 놀라고 꽃향기에 취한다.

벚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음나무, 멀구슬나무, 보리수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범의말채, 솔비나무, 합다리나무, 마가목, 자귀나무, 아그배나무, 팥배나무, 비목나무, 먼나무, 가막살나무, 이나무, 쪽동백나무, 사람주나무, 나도밤나무, 참꽃나무, 쥐똥나무, 조팝나무, 이팝나무, 작살나무, 새비나무, 화살나무, 병꽃나무, 상산, 산수국, 청미래덩굴, 굴거리나무, 종가시나무, 후박나무, 참식나무, 제주조릿대 등 수많은 종류의 나무가 눈에 띈다.

사제비동산과 선작지왓에서 남벽분기점까지 용천수가 흐르는 드넓은 고원에는 봄꽃의 잔치가 한창이다. 열악한 기후 조건을 이겨내고 고개를 내민 제비꽃, 양지꽃, 설앵초, 구슬붕이, 괭이밥, 미나리아재비, 새바람꽃, 산괴불주머니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등산로 나무데크나 바위의 갈라진 틈새에서 자라는 풀꽃의 생명력이 놀랍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고원은 피고 진 진달래꽃 대신에 홍자색의 철쭉꽃이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혹독한 추위와 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몸을 바싹 낮추고 자라는 구상나무, 눈향나무, 시로미, 자작나무, 꽝꽝나무가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경이롭다. 모든 꽃들이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리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초봄의 꽃들을 또다시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고 사치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어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이라고 표현한 최영미의 시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숲속의 동반자인 새들은 산란기를 맞아 짝짓기에 분주하고 사람들의 왕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새들의 부쩍 높아진 소리는 번식과 생존의 몸부림이다. 한라산에는 제주휘파람새, 흰눈썹황금새, 동박새, 노랑턱맷새, 삼광조, 큰오색딱따구리, 큰부리까마귀, 칼새, 박새, 바위종다리, 굴뚝새, 곤줄박이, 직박구리, 소쩍새가 살고 있다. 수컷 새가 노래하면 암컷이 반응하고, 멋진 노래를 부르는 수컷이 암컷의 선택을 받는다.

환경오염이 새들의 노래소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봄과 여름의 숲속에서 들리는 새들의 소리는 고통과 환희로 직조된 장엄한 교향곡이다. 숲의 아름다움에 마냥 취할 수 없는 이유다.

숲에 사는 생명체들의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숲 생태계의 일상이다. 서로 얽히고 설킨 먹이사슬의 행태가 매일 반복된다. 숲에 뿌리를 박고 있는 동식물들은 날고, 기고, 뛰고 경쟁하면서 생명을 이어간다. 숲은 생존력이 강한 강자와 힘없는 약자로 갈라지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이다.

경쟁에서 탈락한 고사목들은 숲에서 살아 가는 다른 생명에게 자양분이 되어준다. 매일 숲에서는 낮동안의 경쟁이 밤까지 계속되며 즐거움과 슬픔이 교차한다. 아침이면 살아남은 자들은 환호하고, 삶을 마감한 자들은 말이 없다.

식물들은 햇빛을 더 받기 위해 봄과 여름에 분주하게 움직인다. 작은 식물들은 잎을 빨리 넓게 키우고, 큰 식물들은 느긋하게 잎을 피운다. 햇빛에 따라 식물의 생사가 갈린다. 식물들은 수분(受粉)을 위하여 갖가지 색과 맵시로 꽃을 치장하고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소나무 군락지처럼 한 종의 식물이 일정 지역을 독점하면 다른 종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곳도 있다. 한라산에 서식하는 각종 새들과 노루, 오소리, 족제비, 다람쥐 같은 동물들은 나뭇잎과 풀, 곤충, 애벌레, 작은 동물들을 먹고 산다. 숲은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인정투쟁이 벌어지는 힘과 능력의 각축장이자 경연장이다.

숲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자들은 문명 발전에 대한 맹신으로 숲의 훼손과 파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힐링이라는 유행에 편승하여 숲을 찾는다. ‘야호’ 같이 천박하게 큰소리를 지르고 함부로 걸으면서 숲의 생명에게 해악을 끼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숲보다 스마트폰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똑똑한 기계 앞에서 무능하고 초라한 인간의 모양새를 연출한다. 자연과 합일하고, 자연의 본성인 생명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숲이 표현하는 언어와 상징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여가를 유흥하려는 이기심만 드러낸다. 숲에 있는 동안 탐욕을 버리고 겸손하라는 소리를 무시한다.

손님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의 경지에 이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건한 자세를 갖춘다. 평범한 자연숭배론자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숲은 삶의 공간으로 자폐성을 탈피하여 소통하는 광장이며, 지혜의 보고(寶庫)다. 인간은 눈이 있기에 숲에서 뭇 생명을 분별할 수 있다.

다리가 있기에 걸을 수 있는 숲길은 더 나은 삶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숲길에서 생존과 이기심, 정념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부와 지식, 쾌락까지 모든 것을 갖겠다는 파우스트적 속성을 제어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숲은 에로스적인 충동을 절제하고 새로운 형태의 우정과 여가, 윤리를 만드는 장소다. 사람과 숲 사이에는 고귀한 관계와 조화로운 사랑, 노자가 말한 ‘으뜸이면서도 지배하지 않는’(長而不宰) ‘깊은 덕’(玄德)이 존재한다.

숲에는 인간의 아픈 역사가 있다. 오래전부터 삶에 지친 사람들이 먹고 살기위해서 한라산의 숲에 모여들었다. 그들을 화전을 일구고 서어나무, 참나무로 숯과 표고버섯을 생산하여 고된 영혼과 육체의 위안으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사시설의 구축과 임산물 공출을 위해 넓은 면적이 파괴되었다.

4.3 시기에는 살기위한 피난처였지만 수많은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한라산을 찾는 사람들이 4.3 희생자와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화전민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농목축업과 토지 개발, 산업화로 숲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제주의소리

숲이 흡수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는 숲을 급격하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도는 골프장, 휴양단지 건설을 위해 중산간까지 개발되면서 숲의 허파인 곶자왈이 사라지고 있다. 현재 한라산에는 생태계의 변화와 남획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절대 보호종이 많다. 지구온난화가 빨라진다면 한라산의 동식물 중 얼마나 많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숲의 생명과 함께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과소비 중독과 같은 생활방식을 바꾸고 자연 친화력을 높여야 한다. ‘숲의 주인은 숲에 사는 생명들이며, 인간은 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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