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 칼럼> (2) 성산포 터진목을 찾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

 

▲ 2008년 노벨문학수상자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 Le Clezio).

“성산일출봉을 보고 있노라면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화산섬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이 떠오른다. 똑같은 비극을 담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4ㆍ3사건 때 민병대에 끌려온 성산 마을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은 반란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끝까지 기어올라 허공에 몸을 던진 곳이다” 

‘제주매력에 빠진 르클레지오’란 제목의 시작 부분이다.

 2008년 노벨문학수상자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 Le Clezio)는 ‘살아 있는 최고의 불어권 작가’이다. 그가 프랑스판 『지오(GEO)』 2009년 3월호에 제주여행기를 실었다. ‘제주매력에 빠진 르클레지오’란 제목의 제주방문기이다. 그가 제주에 관해 쓴 첫 본격적인 산문이다.

르 클레지오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마우리티우스 공화국이 바로 모리셔스(Republic of Mauritius)이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이다. 자연도 제주도와 비슷하다. 화산 폭발로 인해 생성된 섬으로 추정된다. 유럽인들이 이 섬을 발견했을 당시 이 섬은 무인도였다. 대한민국과는 1971년, 북한과는 1973년에 동시 수교하였다. 

그래서 르 클레지오는 섬을 사랑한다고 했는지 모른다. 그는 “나의 정신적 고향은 모리셔스섬이며 여전히 나의 국적도 모리셔스다”고 할 만큼 ‘섬의 사람’이다. 그가 모리셔스섬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는 제주섬을 사랑한다고 했다. 모리셔스섬사람들이 그 섬의 사람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침략자)들에게서 핍박당한 아픔이 있듯이 제주섬에도 그 같은 아픈 역사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지오(GEO)』는 “유목민 작가 르 클레지오는 몇 차례 체류한 한국을 유달리 좋아한다”며 “한국의 가장 남쪽에 있는 제주란 섬에서 그는 우수에 사로잡혔다”라고 제주도를 소개했다. 그가 쓴 제주 여행기는 ‘제주 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주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 있다.

제주4·3은 이제 세계인의 키 워드가 되었다. 지난 해 11월 6일 미국하와이문화센터에서는 섬 평화문화 콜로키움이 열렸다. 참석한 토론자들도 미국정부가 제주4·3의 대량학살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미국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르 클레지오는 ‘제주매력에 빠진 르클레지오’란 글에서 하멜의 표류에 대한 상상부터 성산일출봉, 돌하르방, 샤머니즘, 4ㆍ3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제주의 아픔까지 공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냉전의 기억은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 바다에서 멱을 감고 자기 조상의 피를 마신 해변에서 논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성산 마을의 한 여인이 경찰에 남편이 끌려가는 것을 봤다.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갔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여인의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경찰 중 한 명이 그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여인은 받아들였다. 경찰은 그가 처형했던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이 감동적이면서 잔인한 역사, 슬프면서도 삶의 욕구로 가득 찬 철학이 제주의 영혼이다”

르 클레지오는 새가 날아가다가 아름다운 곳을 찾았다고 했다. 아름다운 곳에 매일 오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제주를 찾았다고 했다. 자신의 제주 방문을 새의 비행에 비유했다. 아름다운 곳을 방문하게 되면 또다시 마음이 끌려 찾게 되듯이 제주는 그러한 땅이라고 했다.

르 클레지오에게 제주섬은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땅”이며 “확신의 땅이라기보다는 감성의 땅”이다. “제주도는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자연을 갖고 있는 섬”이라고도 했다.

르 클레지오는 1948년 학살사건이 일어난 성산일출봉에 올라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난 모리셔스의 모른 바위를 떠올렸다고 했다. “이제 잔인했던 과거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피를 마신 모래 위에서 뛰놀고 있다”고 말한 그는 “감동적이면서도 끔찍한 4·3이야기는 슬프면서도 동시에 섬에 스며든 생존의 열망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고백했다.

“제주에서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바다로 향해 있습니다. 생계를 제공하는 행운은 바다에서도 오지만, 침략의 위협과 파괴자 태풍도 또한 바다에서 옵니다. 이러한 운명을 꿰뚫고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성산일출봉에서 보는 떠오르는 해와 같이 제주도의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 문형순 서장, 그리고 르 클레지오

 

▲ 프랑스판 지오(GEO) 3월호 30주년 기념호에 실린 르클레지오의 제주도 여행기.
그러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경찰 중 한 명이 그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여인은 받아들였다. 경찰은 그가 처형했던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이 감동적이면서 잔인한 역사, 슬프면서도 삶의 욕구로 가득 찬 철학이 제주의 영혼이다.인의 삶은 고달팠다.”

 

제주4·3의 광풍이 온 섬을 휩쓸던 시절, 어디 하나 상처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성산포도 그랬다. 특히 서북청년 특별중대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성산읍과 구좌읍을 관할하며 툭하면 주민들을 잡아가 혹독하게 고문하다 대부분 총살했다.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못'과 '우뭇개동산'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해안에서 벌어진 처참한 슬픔과 분노의 역사는 시간과 더불어 뇌리 속에 사라질 것인가.  

제주4·3은 1947년을 기점으로 1954년까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성산포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수장은 1950년 7월 29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에 대해서는 문형순(文亨淳) 성산포경찰서자이 총살을 거부함으로써, 상당수 목숨을 건졌다.

독립군 출신 문형순은 예비검속된 주민들에 대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며 거부했다.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문형순!’ 제주사람들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하고 있다. 

제주시 오등동 산 11-1번지 평안도민공동묘지 북쪽 울타리 안에는 문형순(文亨淳, 1897~1966)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에는 '故 南平文公亨淳之墓'라고 뚜렷이 적혀 있다. 또 좌측에는 '西紀 1897년 1월4일 平南 安州 出生. 1966년 6월20일 死.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大韓民國 樹立 後 摹瑟浦 城山浦 警察署長 歷任' 이라고 새겨져 있다.

“제주에는 보람이란 감정이 있다. 그것은 고통과 긍지가 섞인 것이다. 이런 감정이 해녀에게 있다. 어릴 적 태평양 섬에서 조개나 진주를 캐기 위해 반쯤 벗은 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여성에 관한 에로틱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진실은 산문적이다. 해녀는 실제로는 고기잡이의 프롤레타리아다. 하늘과 바다의 상황이 어떻건 매일 바다에 뛰어들어 조개를 잡는다.

오늘날 제주 해녀의 대부분은 나이든 여성이다. 그들은 관절염 류머티즘 호흡기장애를 안고 산다. 채취할 수 있는 양은 줄어들고 그들은 점점 더 멀리,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보람, 즉 희생의 정신이다. 그들의 딸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다 그들 덕분이다.제주 사람은 늘 바다로 향한다. 바다는 고기를 제공하고 뗏목을 제공한다. 외부의 침략이 시작되고 파괴적인 태풍이 오는 것도 역시 바다로부터다”

르 글레지오는 “제주에는 보람이란 감정이 있다. 그것은 고통과 긍지가 섞인 것이다.”라고도 했다. 문형순은 고통과 긍지가 섞인 감정으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며 거부했다.

# 강중훈과 르 클레지오

“여기 가을 햇살이/ 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 그때 핏덩이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 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 건진/ 수수깡 같은 노파 잔등 위로 무진장 쏟아지네/ 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우리들이 바라보네/ 성산포 ‘앞바를 터진목’/ 바다 물살 파랗게 질려/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숨비기나무 줄기 끝에/ 철 지난 꽃잎 몇 조각/ 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 듯 숨어드는데/ 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 성산포 4·3위령제령재단 위로 뉘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시인 강중훈의「섬의 우수」전문

성산읍에서는 4·3당시 약 445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중에서 약 200명이 터진목 에서 학살되었다. 터진목에는 ‘제주4·3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일출봉을 등지고 서있다. 그 곁 바다쪽으로는 시인 강중훈의 「섬의 우수」와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에서 발췌한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기념비는 가로 1.7m, 세로 0.8m, 높이 0.4m 크기로 표면이 곡선 형태다.

“1948년 9월25일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해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마을 사람들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것,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르 클레지오 기념비에 음각된 처절한 ‘제주 찬가’는 계속 이어진다.

“공산진영과 자유세계가 맞선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다. 모든 것은 4월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을 일으킨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매카시즘을 알리는 숙청정책에 영향을 받은 미국 공권력의 지원과 현지 군정의 감독을 받으며 플라워 장군과 한국 군대는 학살(제주 주민 1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을린 땅’ 작전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인구의 10분의 1이라고 한다”

2007년 11월 8일, 시인 강중훈이 운영하는 민박 ‘해 뜨는 집’에 프랑스 제5채널 TV제작진이 르 클레지오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8일부터 1월 22일까지 르 클레지오는 ‘해 뜨는 집’을 다시 찾았다. 그래서 시인 강중훈과 르  클레지오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파란 눈의 서방인 르 클레지오. 그는 일출봉 앞 바닷가에 앉아 역사적 이데올로기로 파괴된 실낙원에 대한 반성과 자유와 평등과 평화로의 회귀에 관한 생각들을 하나씩 그의 내면에 담았으리라.

성산포 한도만 야외공연장은 바로 「해뜨는 집」 옆 공간이다. 2008년 9월 27일, 제주문협이 주최하는 「지역간 특성 있는 문학균형발전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나는 주제발표자로 나서 “제주도는 4․3을 체험한 역사적으로 아픔을 간직한 지역이다. 그래서 4․3문학이 지역문학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 되는지를 계속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을 느낀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 자리에 르 클레지오가 참석한 것이다.

나는 르 클레지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슬프고 어두운 4․3의 기억을  어떻게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원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미래의 더 큰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한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인 4·3의 올곧은 진실을 세상에 계속 알린다면 더 큰 문학의 미래가 도래할 것이다. 문학을 통한 생생한 현실인식과 인류문화에 대한 작가의 개방적 자세,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으로 참다운 문학운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올바른 작가의 길이다. 르 클레지오는 파란눈으로 흔들리는 파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중훈은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2013년 6월 3일 모리셔스 공화국을 찾았다. 제주와 모리셔스는 '형제'처럼 닮았음을 확인하기 위한 걸음이다. 흑인 노예들이 섬 문화를 일궜던 모리셔스 공화국은 제주 못지않게 천혜의 자연과 역사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 말고도 제주가 이어도라는 이상향을 꿈꾸듯, 그곳 역시 유토피아를 꿈꾸던 정서가 맞아떨어진다고 느끼고 싶었으리라. 모리셔스의 주민들도 오랜 시간 핍박 받으며 살아온 아픈 역사가 제주사람들과 너무 닮았음을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속에/ 꿈꾸는 눈 하늘을 관조하는/ 와불/ 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세 분이었으나 한 분 시위불이/ 홀연 절벽 쪽으로 일어나 가셨다/ 아직도 등을 땅에 대고/ 누운 두 분 돌부처는/ 일어날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란다// 서울 거리에/ 젊은이들, 아가씨들/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무언가를 사고, 팔고/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운주사의/ 가을 단풍 속에/ 구름도량을 받치고 계시는/ 두 분 부처님을/ 아뜩 잊은 채/ 찾아달라고/ 붙잡고 쓸어간다/ 로아(loas)의 형상을 한 돌부처님/ 당신堂神을 닮은 부처님/ 뜬눈으로 새우는 밤/ 동대문의 네온불이/ 숲의 잔가지들만큼이나/ 휘황한 상점의 꿈을 꾸실까?// 세상 끝의/ 바다 끝의/ 분단국/ 겁에 질려/ 분별을 잃은 듯한 나라//무엇인가를 사고 팔고/ 점을 치고/ 밤거리를 쏘다닌다/ 서울이 불 밝힌 편주片舟처럼 떠다닐 때/

고요하고 정겨운/ 인사동의 아침/ 광주 예술인의 거리/ 청소부들은 거리의 널린 판지들을 거두고/ 아직도 문이 열린 카페에는 두 연인들이 손을 놓지 못한다// 살며, 행동하며/ 맛보고 방관하고 오감을 빠져들게 한다/ 번데기 익는 냄새/ 김치/ 우동 미역국/ 고사리나물/ 얼얼한 해파리 냉채/ 심연에서 솟아난 이 땅엔/ 에테르 맛이 난다// 바라고 꿈을 꾸고 살며/ 글을 쓴다// 세상의 한끝에서/ 사막의 한끝에서/ 조명탄이 작렬하며 갓 시작한 밤을 사른다// 갈망하고/ 표류하고/ 앞지른다/ 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숲의 부러진 나뭇가지들처럼/ 나는 여기서 휘도는 바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 속으로 회색의 아이들을 눕히는 바람에 대해/ 매운 사막의 관 위로/ 기다리고 웃고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하다/ 서울의 고궁에/ 신들처럼 포동포동한/ 아이들의 눈매는 붓끝으로 찍은 듯하다// 기다리고 나이를 먹고 비가 온다/ 운주사에 내리는 가랑비는/ 가을의 단풍잎으로 구르고/ 길게 바다로 흘러/ 시원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두 와불의 얼굴은 이 비로 씻겨/ 눈은 하늘을 응시한다/ 한 세기가 지나가는 것은 구름 하나가 지나가는 것/ 부처님들은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꾼다/ 눈을 뜨고 잠을 청한다/ 세상이 벌써 전율한다” - 르 클레지오가 2001년 운주사를 다녀온 뒤 프랑스어로 쓴 시 「운주사(雲住寺), 가을비」(UNJUSA, PLUIE D' AUTOMNE)

르 클레지오는 2001년 처음 한국에 초청되어 전라남도 화순군의 운주사를 방문한 뒤 감흥을 받아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으며, 2007년 가을학기부터 1년 동안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비평과 프랑스 시를 주제로 강의를 하는 등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작가이다.

“제주는 감정의 섬이다. 한국어는 감정적 뉘앙스가 많은 언어다. ‘정(情)’이나 ‘한(恨)’은 번역이 불가능하다. 효성, 혈연, 원한? 한국 영화는 그런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주주에는 보람이란 감정이 있다. 그것은 고통과 긍지가 섞인 것이다. 이런 감정이 해녀에게 있다. 어릴 적 태평양 섬에서 조개나 진주를 캐기 위해 반쯤 벗은 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여성에 관한 에로틱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르 클레지오가 한국에 관한 본격적인 산문을 프랑스어로 써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그는 ‘운주사, 가을비’ 등 시 몇 편과 2007년 ‘발라시네(Ballaciner)’란 책에 박찬욱 등 한국 영화감독 3명과의 인터뷰를 부록으로 담은 바 있지만 한국을 소재로 한 본격적인 산문을 발표한 적은 없었다.

르 클레지오는 앞으로 한국에 대해 쓸지도 모르는 글들은 프랑스어권에 한국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한국 사람이 백 마디 하는 것보다 백배나 강한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프랑스의 저명 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글을 쓴 것은 1901년 6월 서울을 방문한 피에르 로티의 20쪽짜리 ‘서울에서’란 글 이후 처음이다.

르 클레지오는 어린 시절을 남프랑스에서 보내고, 니스 대학에서 학위를 얻은 후 브리스틀 대학과 런던 대학의 교직에 있다가 1960년 런던에서 결혼했다. 주요 작품은 1963년 르노드상을 탄 소설 『조서(調書. 1963)』ㆍ『대홍수(1966)』와 단편집 『열(熱 1965)』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죽음, 침략, 폭력, 사물의 예속화, 삶의 파괴를 가져오는 인위적인 서구 사회에 대한 비난, 공격, 그리고 그 사회로부터의 도피 수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언어, 사물, 자연, 세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신화적 유년 시절(남미 인디언들의 세계로 현재화된)로 회귀하는 긴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글이 발표된 잡지『지오(GEO)』는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비슷한 고급 잡지로 세계적 미디어그룹 베텔스만이 유럽을 중심으로 독일어판 프랑스어판 영어판 등을 발행하고 있다. 사진물을 위주로 한 여행기를 주로 게재한다.

르 클레지오는 특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유목민 작가’답게 성산일출봉에서 인도양의 모른 봉을, 당신(堂神) 조각상에서 마르키즈 제도 폴 고갱 무덤 앞의 오비리 조각상을, 돌탑 꼭대기의 수리 형상에서 멕시코 중부 푸레페차 원주민 마을을 떠올렸다.

그는 지난해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된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걷고 먹고 말하고 자고 사랑하고 꿈을 꾸는 것에 대해 쓸 뿐이다”라고 말했다.

 

▲ 김관후 소설가. ⓒ제주의소리

제주 사람은 늘 바다로 향한다. 바다는 고기를 제공하고 뗏목을 제공한다. 외부의 침략이 시작되고 파괴적인 태풍이 오는 것도 역시 바다로부터다. 바다와 죽음의 이상한 근접. 여행자를 감싸는 우수의 감정이 태어나는 곳이 여기다. 진실하고 충실하고 환상적인 제주, 모든 계절에 그렇다”

 

르 클레지오의 글 ‘제주매력에 빠진 르클레지오’ 마지막 부분이다.

르 클레지오는 제주를 정의하는 키워드로 ‘insularity’란 단어를 선택했다. ‘섬나라 근성’이 아닌 ‘고립’ ‘근원적인 섬의 모습’이란 의미에 가깝다. 이제 제주섬은 르 클레지오가 추진하는 모리셔스 섬과의 가교가 시작되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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