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에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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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후 칼럼> 선진사회 갈수록 위험에 적절한 대응 모색돼야

사람들은 위험천만하고 공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짜여진 호러물에서 쾌감을 느낀다. 반면 신종전염병, 자연재해, 유독가스 누출 같은 산업재해, 원전사고, 사이버테러 같은 호러물에 버금가는 실제상황은 자신과 무관한 일로 애써 외면한다.

산업자본주의가 이룩한 풍요와 행복에 도취되는 사이에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위험’이라는 독버섯은 자라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행복과 파멸을 동시에 의미하는 힌두교의 신 저거노트(juggernaut)에 푹 빠져있는 모양새다. 저거노트의 신상을 실은 거대한 수레에 치여 죽으면 극락환생한다는 믿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레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올여름 ‘소설특수’를 누리고 있는 출판시장에서 정유정의 장편소설 <28>이 큰 인기다. 수도권 도시 화양에 정체불명의 인수공동전염병이 발생하면서 28일간 폐쇄된 도시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간다. 인간에게 병을 옮긴 것으로 지목된 개들이 대량으로 무참하게 살처분 당하는 장면에서 2010년에 발생하여 350여만 마리의 가축을 죽여야 했던 구제역 사태가 연상된다. 인간의 과도한 이기주의와 소비 탐닉이 인류를 멸종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묵시록적인 위기의식을 담고 있다.

최근 집중호우가 경부 고속도로를 덮쳐 산사태가 발생하는 순간 자동차가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모습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2011년 서울 우면산 산사태와 며칠전 노량진 배수구 수몰사고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인간의 편익을 위해 도로, 댐, 4대강, 간척 같은 국토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난개발이 지구 생태계를 교란시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구 환경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자연재해가 인간의 탐욕적인 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올해 들어서 제철, 반도체, 석유화학, 건설 등 거의 모든 업종에서 산재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산재 사고로 한해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산재공화국이라고 할 만하다. 작년에 구미 공단의 불산사고로 5명이 사망하고 3천여명이 치료를 받았으며, 관계기관의 대응도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세계적으로 크고 작은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매일 6천 3백여명, 매년 230만명이 죽는다는 통계가 있다. 1984년 인도 보팔 가스참사, 올해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와 미국 텍사스주 비료공장 폭발 사고가 대표적이다.

산업재해의 근본 원인은 효율성과 이윤·물질만 추구하는 시장만능주의, 성장지상주의, 독과점에서 찾을 수 있다. 대기업과 하청업체 간의 불균등한 갑을관계로 인한 대기업의 책임회피와 안전불감증,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야 성장과 고용을 증대할 수 있다며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정부의 정책도 이를 뒷받침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부터 최근 원전의 불량부품 납품 비리까지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원전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내렸다. 원전에서 재앙 수준의 사고가 날 위험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간 원자력 분야는 전문영역으로 과학적 합리성이 지배하다보니 안전성과 값싼 에너지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신뢰가 산업사회의 위험을 낳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국민들은 원전이 국제적인 안전기준 준수와 투명성을 확고히 보장하고 있는지 알고자 한다. 탈원전을 포함한 새 에너지정책에 대한 논의도 요구하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과소비문화, 무분별한 토건 개발, 성장만능주의,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은 위험사회의 징후들이다. 또한 탐욕과 놀이가 교묘하게 결합된 사이버테러는 그 규모와 파괴력이 날로 커지고 있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다.

현대 사회는 산업 발전이 불러들인 위험을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시민들은 사고 초기 정부의 대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정부는 사후약방문식의 대책을 마련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처리 수순은 종결된다. 위험에 대한 근본 대책보다는 정권의 안위에 더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생존환경과 조건에 따라 위험사회를 인식한다. 일상화된 위험에 대해서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히 맞서 있다. 개인, 정당, 정부, 기업, 시민사회는 각기 위험에 따른 이해관계 때문에 의견이 각양각색이다. 위험 불감증이나 무시론도 한편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위험이 가져오는 이익이 비용을 능가하며, 인류의 진보를 견인하여 새로운 풍요와 행복의 유토피아를 열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반면, 비관론자들은 시장의 자기조정력은 작동불능이라고 본다. 방사능 같은 위험은 인류의 능력을 완전히 벗어나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조한다.

위험의 발생에 따른 편익과 비용의 분배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일부 극소수가 이익을 독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담만 짊어질 경우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위험이 미치는 사회적 균형과 계층의 변화 양상, 생태계에 초래될 결과들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제주의소리

선진사회로 나아갈수록 위험의 강도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과 해결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무한경쟁과 노동의 질 저하, 허술한 사회안전망,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빅브라더의 출현 등 위험 양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적으로는 위험에 대한 공동체의 감수성을 높이고, 일방의 탐욕을 억제하는 장치를 구축하여 지속 가능한 삶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위험을 추구하는 인간 행위에 대한 지속적 성찰과 위험불감증을 탈피하는 노력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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